모항 박형진 시인께
서울시 용산구 후암동 어느 오르막 골목길이었습니다. 걷다 보면 언뜻언뜻 달이 보였습니다. 차오르기 시작하면서 달의 모양이 애매했습니다. 무더위에 대한 기억이 남아있는데도 새롭게 다가온 서늘한 기운에 휩싸이고 있었습니다.
어디다 말할까
어떻게 말할까
오늘이 내 생일이라고
(1985. 08 음력)
희한하게 호텔(서울힐튼인터내셔널)에 입사를 하여 가방 하나 침낭 하나로 후암동 어느 독서실을 숙소로 하였습니다. 삼시 세끼를 안에서 다 해결해야 했고, 또 두세 시간 초과근무가 당연한 시절이라 퇴근길은 늘 어두웠습니다. 그 몇 년 전 재수 시절에는 오르락내리락 했던 남산을 허리춤에서 왔다 갔다 하게 되었던 때였습니다.
서울힐튼호텔과의 인연은 괜한 소리로 시작되었습니다. 1981년 농업대학에 진학하겠다고 재수를 할 때였습니다. 서울역 앞 대일학원과 남산의 도서관엘 다녔습니다. 지하철 서울역 앞에서 내려 지하에서 나오면 가야 할 남산 쪽으로 대우빌딩이 턱 하니 막혀있는 것이 답답했습니다. 그래 괜한 소리로 ‘이담에 돈 벌어 저걸 사서 부수고 초가집을 짓겠다’고 했습니다.
졸업장은 따야 해서 복학을 하여 필수학점인 현장실습을 나가야 했습니다. 지도교수께서 배정을 해주는데 저는 무조건 힐튼호텔로 가야 한다고 우겼습니다. 그러니까 허튼소리였지만 잠깐(한 달)이라도 대우빌딩엘 드나들고 싶었습니다. 그래 지하철 서울역에서 내려 대우빌딩으로 들어가 승강기를 타고 육층에서 내려 구름다리로 남대문 교회로 해서 힐튼호텔로 갔습니다. 그러다 어쩌고저쩌고해서 입사를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둘째가 셋째와 통화하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그리고 저에게 ‘곧 아빠 생신이에요’ 합니다. 저는 생일이 거의 곤혹스럽습니다. (무슨 기념일 대부분이 그렇습니다) 그렇지만 저 자신만 생각할 수 없어 ‘셋째하고 열린책들에서 출간한 [돈키호테]를 사주렴’ 했습니다. ‘아니 왜 [돈키호테]를?’ ‘황당한 이야기잖아요?’ 합니다.
1983, 1984년도는 엿장사와 방위병 시절입니다. 그 시절에 TV에서 돈키호테가 애니메이션으로 방영되었습니다. 주제가가 멋져서 엿장사(고물장사)를 나갈 때 그 노래를 힘차게 불렀습니다. 그러면 끄시는 니아까(손수레)가 꼭 돈키호테의 애마처럼 느껴졌습니다.
“아침햇살 빛난다 패기에 찬 기사여
달려라 돈키호테 정의의 기사여
실패와 모험은 성공의 비결
인정많은 마을에서 하룻밤 쉬어갈까
돈키호테 돈키호테
초저녁 샛별도 내 마음 알아주네
달려라 돈키호테 정의의 기사여
달려라 달려 돈키호테
정의의 기사 돈키호테
달려라 달려 돈키호테
정의의 기사 돈키호테“
또 그 시절에 창간된 [월간 멋]이라는 잡지가 하나 있었습니다. 제목이 근사해서 사봤는데 패션잡지라 저하고는 전혀 상관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칼럼(장명수)에 근사한 글이 있었습니다. [돈키호테]를 뮤지컬화한 ‘맨 오브 라만차’의 대표적인 노랫말이 쓰여 있었습니다.
“이룰 수 없는 꿈을 꾸는 것.
무찌를 수 없는 적을 무찌르는 것,
참을 수 없는 고통을 견디는 것.
고귀한 이상을 위해 죽는 것.
잘못을 고칠 줄 알며,
순수함과 선의로 사랑하는 것.
불가능한 꿈속에서 사랑에 빠지고,
믿음을 갖고, 별에 닿는 것.“
그래 ‘이룰 수 없는 꿈’을 아니리(사설)로 두고 돈키호테를 부르면 엿장사를 나가는 발걸음이 보다 힘차게 되었습니다. 제가 사실 기막히게 음치이고 또 박치라 혼자일 때만 부르는데 까라면 까야 하는 방위병 시절에는 여럿 앞에서 노래를 해야 하면 이 노래를 불렀습니다. 방위병을 마치고 다시 엿장사를 할 때는 복음성가를 개사하여 아니리(사설) ‘이룰 수 없는 꿈’ 뒤에 붙여 불렀습니다.
“엿, 엿, 엿, 엿
나는 엿장시.
장계고물상의 나는 엿장시.
내가 비록 인물은 훤해도(?)
나는 엿, 나는 엿 나는 엿장시.
이 세상의 모든 고물아 몽땅 다 내게로 와라.
이 세상을 앞장서 가는
나는 엿, 나는 엿, 나는 엿장시.“
아니리 ‘이룰 수 없는 꿈’과 ‘돈키호테’를 다시/ 또/ 다시/ 읊조리게 되었습니다. 아니 이 삶이 그대로 그랬습니다. 이십대의 객기로 부르고 불러도 이 모양, 이 꼴인데 육십 대로 들어서는 이 시점에서 다시 부르는 ‘이룰 수 없는 꿈, 돈키호테’
허/ 망/ 하/ 겠/ 지/ 요/
그래 한 번이면 될 생일을 또 맞이하는 거,
또 생일인 것이 참 곤혹스럽습니다.
2021,09,12
옹기장이 이현배드림
손내 선생님!
추석이 이제 며칠 앞으로 다가왔군요. 뭐 특별할 것도 없는 것이지만 명절이 돌아오면 괜히 바빠집니다. 아마도 우리 마음이 바빠지는 것이겠는데 평소의 하는 일에다가 조금이라도 주변을 더 깔끔히 정리하고 명절을 쇠려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하긴 명절 그 자체가 특별한 것이긴 하지요. 저도 요 며칠 벌초를 하느라 힘들고 즐거웠습니다. 예초기를 어깨에 메고 풀을 깎는 일은 힘이 들지만 조카들과 함께 일 년에 한두 번, 산 높은 곳에 있는 할아버지 할머니의 묘를 찾아보는 일은 즐겁습니다. 벌초가 끝나면 챙겨간 술을 부어놓고 성묘를 하는데 저는 늘 마음속으로 빕니다. ‘내년에도 무탈하게 성묘를 하게 해 주십사’라고요. 조상의 묘 앞에서 이러는 것이야 나이 먹어지며 자연스러운 것이 됐지만 언제부턴가 그 대상이 여러 가지가 됐습니다. 가령 길을 가다가 아름이 넘게 자란 나무를 본다든지 이른 새벽 동편에 떠오르는 태양의 기운을 느낀다든지 아니면 뒤안 장항아리까지도 말입니다.
저는 이번에, 그러니까 8월 20일부터 29일까지 DMZ 평화누리길을 걸었는데 그 과정에서 만난 나무 한 그루가 잊히지 않습니다. 평화의 댐 밑에 있는 200년 된 소나무인데 화천군이 지정한 노거수이더군요. 그것이 외진 산속에 우뚝하니, 그러나 정말 외롭게 서 있어서 쉬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래 한동안 바라보고 있다가 다음에 기회 있으면 또 보러오마고 잘있으시라고 합장을 했습니다. 그러면서 저의 앞길이 무사하기를 빌었습니다. 그 덕분인지 세 번의 조난 위기를 잘 넘길 수 있었답니다. 우습지요? 젊어서라면 그냥 지나칠 일들이 이제는 그럴 수 없는, 간절함으로 다가오는 것 말입니다. 사람 마음이란 걸 제 자신을 통해 확인했다고나 할까- 결국 남을 좀 더 이해하게 된 것입니다.
저번 7월달에 동해안을 치달아 오를 때도 어느 마을 동구에 서 있던 두 아름은 됨직한 훼나무 한 그루와 어떤 동네의 입향조가 심었다던 팽나무, 그리고 길옆에 있던 오백 년 됐다는 몸이 흰빛을 띠던 향나무 앞에서 깊게 합장을 했습니다. 주변 사람들이 쳐다보든 말든 저절로 고개가 숙어지던 것을 제가 어쩌지 못했습니다. 그리고는 이런 생각을 했지요. ‘빈 놈과 빌지 않은 사람은 어디가 달라도 조금은 다를 것이다’고요. 역시 무탈하게 여행을 마쳤습니다 그려.
합리라는 것은 이성이 작동한 결과이겠는데 이런 몸 행위에 우리가 꼭 이성적으로만 생각해야 되는 것인지요? 아까 세 번의 조난 위기를 넘겼다고 했는데 이번 여정은 동해안에 비해서 참 많이 힘들었습니다. 동해안의 더위와 사람, 그리고 이제는 지겨울 정도로 끝까지 바다를 옆에 끼고 걸어간 것이었다면 DMZ 누리길은 여러 주간에 걸쳐 포장도 되지 않은 첩첩산길을 한나절씩 걸어도 사람 하나 만날 수 없었다는 점입니다.
인제 원통에서 양구 펀치볼 넘어가는 산길과 평화의 댐을 넘어가는 아흔 아홉구비라는 해발 860고지 구간, 그리고 화천의 만산령이라는 산길은 저처럼 농사로 단련된 체질 아니라면 혼자 갈 일은 아니겠더라고요. 하도하도 산굽이를 이리저리 돌고 돌으니 방향을 짐작할 수도 없고, 더군다나 비가 부슬거리고 안개가 끼는 상황에서는 왈칵왈칵 무섬증마저 생기더군요. 철원을 접어들며 눈앞이 트이고 논에 누렇게 익는 벼를 보니 왜 그리 반갑던지- 이제 돌이켜보니 한참 철 지난 일이 됐습니다만 7월달의 동해안이 저를 진짜 괴롭게 한 것은 지나치는 곳마다 해수욕장이어서 그런지 관광지가 지니고 있는 번잡함과 그 속스러움이었습니다. 거기에 또 하나, 서해의 해수욕장과는 달리 주로 청춘남녀들로 무리를 이루는 서퍼들과 스쿠버들을 보는 것이었습니다. 서울의 어느 거리를 그대로 옮겨다 놓은 것 같은 쭉쭉 뻗은 물 좋은 청춘들을 볼 때 저는 제 딸들 생각에 괴로웠습니다. 직장에서 땀 흘리고 있을 딸들과 아무리 비교를 안 할래야 안 할 수가 없어 마음이 내내 울적했더랬습니다. 그러나 달리 생각해보면 제 딸들도 이제는 제 앞가림을 하는 40이 가까운 나이들인지라 저의 이 울적함은 아비의 맹목적이며 부질없는 것일 뿐이지요.
올해 두 번의 여행을 통해서 제가 느낀 것은 인생이라는 것이 결국은 한 치 앞도 알 수 없다는 점입니다. 이무것에도 의존하지 않고 오직 원시의 방법으로만 앞으로 나아갈 때 제가 알 수 있는 것은 제 눈이 읽어낼 수 있는 불과 몇 미터 앞일뿐이었습니다. 단 한 발자국도 더 걷기 어려울 때는 판단마저 흐려져서 좋은 샘물을 몇 발짝 앞에 두고도 나쁜 냇물을 움켜 먹을 수밖에 없거나 반듯하고 깨끗한 식당을 한 건물 옆에 두고도 허름한 식당에서 입에 맞지 않은 음식을 사 먹을 수밖에 없던 일들, 깊고 짙은 그늘을 앞에 두고도 손바닥만 한 그늘에 주저앉을 수밖에 없던 상황들은 그마저 놓치고 지나치면 더 힘들어질지도 모른다는 절박함 때문이었지요. 그러나 현실에서 우리는 어떠한가요? 스마트폰이라는 전지전능한 신 한 분씩 모시고 살지 않습니까? 좋은 식당이 어디 있는지, 지금 자기가 서 있는 곳이 어디인지, 갈림길에서 어디로 가야 하는지, 모텔은 어디 있는지, 일기예보는 어떤지, 좋은 경치는 사진을 찍을지 동영상을 찍을지, 이것을 멀리 있는 사람에게 보낼지 말지, 손바닥만 한 이 물건을 하나만 가지면 여행을 하면서도 생업에 관련된 여러 가지 일들을 처리할 수 있고 게임을 즐길 수도 있는 게 지금의 세상입니다.
어쩌면 인생이 한 치 앞도 볼 수 없는 게 아니라 선택의 문제인 셈이기도 한데 그러나 이런 선택사양은 인생의 본질은 아닐 것입니다. 무수하게 많은 경우의 수를 생각하면 무엇이 본질이고 무엇이 비본질인지 생각 나름이긴 하겠지만 어쨌든 여행이라는 것은 저의 이런 방식의 경우엔 모든 것을, 그 지도를 저의 몸에 하나하나 새기며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었습니다.
이제 제가 계획했던 여정의 3/4쯤 마무리했습니다. 올해 안에, 그러니까 벼나 베어놓고 다시 이번에 마무리한 문산에서부터 김포, 강화, 인천을 거쳐 충남 해안을 타고 내려오려 하는데 마음대로 될지 모르겠네요. 여행 이야기는 이제 그만 쓰겠습니다. 명절을 잘 보내십시오.
그럼 이만.
처서 무렵1
막걸리야 김치하나면 먹는다지만
땀 흘려 일하는 허구한 여름날에는
김치하나는 왠지 깊은 허기가 있다
변산 앞바다에서 잡히는 바늘귀만한 자하(紫蝦)를
손바닥에 한 움큼 올려놓아 주먹 쌈을 하거나
후리질로도 끌어 올렸던 맷방석만한 가오리
그놈 한데 솥 걸어놓고 된장 발라 찌던
그래서 마당가득 잔치판이 벌어지던
어느 해 말복 날 생각만 떠오르기 시작하면
꿀떡꿀떡 넘어가던 막걸리도 목이 막히고
항상 먹던 김치쪼가리도 쓰기만하다
그렇다고 다른 안주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안 듯 모른 듯 섭섭하게 여름도 다 가는데
그 흥성거리던 갯것들을 어디 가서 만날까
에헤야 데에야 그물 메고 뒷 장물 가서
밀물에 반달처럼 후리를 놓을거나
당겨라 올려라 세물바다에 숭어가 튈라
쉐뱅이 되에미 망둥이 가오리
헛헛한 목구멍에 꿈틀대는 배암처럼
이 싱싱하게 살아오는 비릿함을 어찌할거나
*작년 이맘때 썼던 시입니다.
2021.09.16
박형진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