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 가는 길’에
함께 선 길동무에게
지난 9월 17일 한옥마을 공간봄에서 203회 마당 포럼이 열렸다. ‘함께 사는 사회를 생각하다’를 주제로 다큐멘터리 영화 ‘학교 가는 길’의 김정인 감독과 함께 영화를 보고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이었다. 특수학교인 서진학교의 설립과정을 담은 ‘학교 가는 길’은 숱한 반대와 모욕 가운데서 아이를 위해 감내하고, 백 번이고 더 숙이고, 투쟁하며 굳게 서 나간 부모들의 모습을 담았다. 2017년 장애인 특수학교 설립을 위한 2차 토론회 현장에서부터 시작된 5년간의 여정, 그 이야기를 김정인 감독이 전한다.
글 김정인 감독
풍경 하나.
제가 사는 곳 인근에는 서울시 성북구장애인복지관이 위치하고 있습니다. 골목길에서, 지하철역에서, 시장 어느 가판대에서 문득 발달장애인들과 마주치는 건 드문 일은 아닙니다. 가끔씩 남다른 그분들의 행동에 잠시 움찔한 적도 있었지만 사실 무시하고 말면 그만인 것, 굳이 의식할 이유는 전혀 없었습니다. 발달장애인들을 싫어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그들의 존재를 깊이 생각해 보거나 관심 갖고 지켜본 일은 더더욱 없었던, 딱 그만큼의 태도로 살아왔습니다.
풍경 둘.
학창시절 다큐멘터리를 공부했던 저는 한때 다큐멘터리가 세상을 바꿀 수도 있다는 치기 어린 생각에 빠져있던 적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위대한 작품을 만들기에는 한없이 모자란 저의 역량을 자각하고, 이어 가정을 꾸리고 한 아이의 아빠가 되면서 자연스레 평범한 생활인의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내세울 것 하나 없는 무명의 독립다큐 감독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예상은 했지만 그 예상을 훨씬 뛰어넘어 쉽지 않았습니다. 그나마 가족들의 응원과 지지가 없었더라면, 모짜렐라 치즈마냥 길게 늘어난 미련은 진즉에 끊겼을 것입니다.
풍경 셋.
아이는 무럭무럭, 건강하게 자랐습니다. 엄마 손 엄지와 검지 사이에 쑥 들어가던 발바닥은 어느새 한 손으로 다 잡지 못할 만큼 커졌습니다. 무엇보다 옹알이도 제대로 못 하던 이 녀석이 이제는 엄마, 아빠 말에 맞서 꼬박꼬박 말대꾸를 하고 있습니다. 요즘 들어 부쩍 아이의 심리전에 말려 제 말문이 막힐 때가 늘고 있는데, 괘씸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대견함도 느낍니다. 그게 부모 마음인가 봅니다. 그러면서 어느 땐가부터 ‘우리 아이들에게 조금 더 좋은 세상을 만들어 주고 싶다’란 마음이 뒤따르기 시작했습니다. 오 신이시여, 제가 이런 생각을 다 하다니요... 너무나 진부하고 뻔하며 닳고 닳은 말. 아빠가 되기 전까지는 전혀 이해하지 못했고 절대 공감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세월이 흐르면서 이것은 머리로 고안해낸 것이 아니라 가슴에서 자연 발생하는 개념임을 알게 됩니다. 우리 아이들이 살아갈 세상은 내가 살아온 세상보다 단 한 뼘이라도 더 나았으면 좋겠습니다. 유사 이래 세상의 진보를 가능케 한 요인을 꼽아보자면 그 어떤 눈부신 과학적 발견만큼이나 평범한 부모들의 이런 마음이 크게 일조했다고 생각합니다.
풍경 넷.
2017년 7월 초, 인터넷을 검색하고 있던 제게 뉴스 하나가 눈에 띄었습니다. 서울시 강서구에서 장애인 특수학교 설립을 위한 토론회가 시작도 전에 무산되었다는 내용의 그 기사는 유난히 깊은 여운을 남겼습니다. 내 아이가 다닐 학교와는 관계가 없고 강서구에는 대학 시절 딱 한 번 SBS 공개홀 견학차 가본 게 전부였지만, 또 다른 부모에게는 바로 그들의 자녀들이 다닐 학교이기에 구체적인 정황이 궁금했습니다. 그렇다고 이것을 연대나 동료의식 등의 고차원적인 언어로 포장하기는 어렵습니다. 처음에는 그저 단순한 호기심에, 가벼운 마음으로 길을 나섰으니까요. 하지만 희한합니다.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여전히 그날의 온도, 질감, 긴박했던 분위기를 생생하게 기억합니다. 그렇게 저는 2017년 9월 5일 열린 2차 토론회 현장을 찾았고, 전혀 예기치 못한 상황을 목격했고, 무릎으로 호소하던 부모님들을 만났으며, 결국 5년이란 시간이 걸릴 줄도 모른 채 겁도 없이 덜컥, ‘학교가는길’의 여정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풍경 마지막.
역사는 반복된다는 말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대게는 비극적인 사건에 맞물려 등장하는 이 말은 실수를, 잘못을 되풀이하고 마는 인류의 한계를 너무 쉽게 규정합니다. 서진학교는 무사히 개교했고 170명의 학생들은 맑고 밝게 배우고 있습니다. 감사하게도 당시 반대하시던 주민들도 대부분 마음을 돌이키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일견 모든 게 해피엔딩... 그래서 누군가 제게 말했습니다.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이미 지난 과거, 학교가는길로 인해 굳이 아픈 상처를 다시 들추는 게 과연 바람직한 일이겠냐고... 타당한 의견입니다. 저 역시도 그간 많은 고민을 했고 특히 이번 가처분 소송 이후 단 하루도 마음이 편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감히 말씀드립니다. 저는 학교가는길의 여정을 여기서 멈출 수가 없습니다. 서진학교가 일궈낸 작은 성취에 안주하기에는 중랑에서, 시흥에서, 울산과 부산, 진해, 전국 각지에서, 지금 이 순간에도 수많은 장애학생들과 그 가족들이 학교 가는 길에서 직면한 삶이 너무 절박하고 위태롭기 때문입니다. 우리 사회가 서진학교 설립 과정에서 있었던 일을 충분히 기억하고 성찰하지 않는다면, 아무런 교훈도 얻지 못한다면 역사는 언제나 그랬듯, 반복되고 말 것입니다.
이상 제가 ‘학교가는길’을 만들게 된 이유를 두서없이 적어 보았습니다. 그리고 이름 모를 길동무, 당신에게 어쩌면 불편할 수도 있지만 꼭 해야만 하는 이야기를 조금만 더 건네고 이 글을 마무리하고자 합니다.
말도 많고 탈도 많지만 대부분의 부모에게 자녀를 양육하며 느끼는 기쁨과 행복은 그 무엇과도 비견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어떤 부모에게는 바로 그 자녀가 삶을 포기하게 만드는 이유가 된다면, 그 세상은 과연 살만한 세상인가요? 작년 광주에서 자녀에게 수면제를 먹이고 연탄불을 피웠던 부모의 마지막 심경이 어땠을지, 저는 감히 헤아리지 못합니다. 왜 이 나라에서는 장애인 자녀와 동반으로 극단적인 선택을 하고 마는 부모가 끊이질 않는 것입니까? 또한 부모로서 겪는 최고의 비극은 내 자식을 먼저 떠나보내는 일일 텐데 내 아이보다 하루만 더 살았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서슴없이 품고 사는 그들은 과연 누구인가요? 언제까지 반복되는 비보 앞에 무기력을 방패 삼아야 하는지, 저에게는 아직도 풀리지 않은, 수많은 의문이 남아있습니다. 그리고 이 질문들은 언젠가는 제 아이가 아빠에게 던질 질문이기도 합니다. 훗날 다음 세대들이 2021년의 대한민국을 어찌 평가할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라는 말은 듣고 싶지 않았습니다.
물론 잘 알고 있습니다. 아무리 뜻을 굳게 세워도 우리 앞에 놓인 길은 여전히 멀고 험합니다. 이내 곧 직면할 현실의 암담함은 이 여정을 제대로 시작하기도 전에 모두의 간담을 서늘하게, 그리고 주눅 들게 만듭니다. 그래서 나는 더욱 고개를 푹 숙이고 지난날을 살아왔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이제 조금씩, 아주 조금씩 희망을 보고 낙관을 떠올립니다. 당신이 길동무가 되어 함께 걷는 날들을 상상하기 때문입니다. 더 많은 당신들이 모이고 모여 기꺼이 이 길을 걸어주신다면 모든 아이들의 학교가는길은 한층 더 기쁘고 즐거우며, 무엇보다 보다 인간적일 수 있다고 믿습니다. 이렇게 우리는 함께 나아갑니다. 당신을 환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