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도에 없는 나라, 교황청
이백만 전 주교황청 한국 대사
교황청이라는 나라가 여타 국가와 구별되는 특이점을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어떤 단어가 적확할까요? 저는 유일무이성(唯一無二性)이라고 생각합니다. 단적인 사례를 하나 들면, 세상에 실재하는 국가인데 세계 지도에는 없다는 사실입니다. 스마트폰의 구글 지도나 네이버 지도에서 교황청을 검색할 경우 나오지 않습니다. 물론 오프라인 지도책에도 교황청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지금 당장 한번 실행해 보십시오! 스마트폰 지도를 켜고 ‘교황청’을 검색할 경우 ‘교황청’은 나오지 않고 ‘바티칸 시국’이 나옵니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저를 ‘주바티칸 대사’라고 불렀습니다. 저는 이런 분들에게 저의 명함을 한 장 건네면서 이렇게 말했지요. “저의 공식 타이틀은 주교황청 한국 대사입니다. 주바티칸 한국 대사가 아닙니다.” 그러나 저에게 누군가가 비공식적인 자리에서 “주바티칸 한국 대사이시냐?”고 물으면 그냥 “그렇습니다”고 답했습니다. 굳이 “주바티칸 대사가 아니고 주교황청 대사입니다”라고 말하지 않았다는 것이지요. 현실에서는 교황청이나 바티칸이나 같은 의미로 사용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엄격하게 말하면 바티칸과 교황청은 완전히 다른 개념입니다. 역사적으로나 법률적으로나 정치외교적으로 큰 차이가 있습니다. 교황청의 공식 국호는 영어로 ‘Holy See’, 이탈리아어로 ‘Santa Sede’입니다. 바티칸의 공식 국호는 한국어로 ‘바티칸 시국’, 영어로 ‘Vatican City State’, 이탈리아어로 ‘Stato della Città del Vaticano’입니다.
교황청과 바티칸의 차이점을 말씀드리지요.
첫째, 역사적으로 아주 큰 차이가 있습니다. 교황청의 초대 교황은 예수님의 열두 제자 가운데 맏형인 베드로 사도입니다. 현재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266대 교황입니다. 교황청은 약 2천 년의 역사를 갖고 있지만, 라테란조약(1929년)에 의해 탄생한 바티칸 시국의 역사는 100년도 되지 않습니다.
둘째, 국가 조직에서도 큰 차이가 있습니다. 교황청은 세계 13억 가톨릭 신자를 영적으로 지도하고 총괄하는 ‘영적인 국가’입니다. 교황청은 여느 국가와 똑같은 형태의 정부 조직(국무부, 외교부, 인류복음화성 등)을 갖고 있습니다. 반면 바티칸은 창경궁 정도의 국토 면적(0.44㎢)에 인구(시민권 소유자)가 850여 명에 불과한 ‘세속적 국가’입니다. 바티칸은 이처럼 세계에서 가장 작은 초미니 국가이긴 하지만, 국제정치학에서 규정하고 있는 국가의 3대 요소(국민 주권 국토)를 실체적으로 확보하고 있습니다. 교황은 교황청과 바티칸의 수장을 겸하고 있습니다.
셋째, 국가의 기능에 있어도 크게 다릅니다. 교황청은 국제법상 완전한 주체로서 영세중립국입니다. 외교사절의 파견과 접수, 조약 체결 등 외교 행위를 여느 나라와 똑같이 수행합니다. 교황청이 수교하고 있는 나라는 2019년 말 현재 183개국에 달합니다. 또 국제연합(UN) 유럽연합(EU) 국제원자력기구(IAEA) 국제형사경찰기구(인터폴) 등 주요 국제기구에도 옵서버 또는 정식 회원국으로 가입하여 적극적인 외교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이에 비해 바티칸의 실질적인 기능은 단출합니다. 바티칸은 라테란조약에 근거하여 이탈리아와의 협력업무(치안 교통 통신 전기 수도 등 행정서비스)를 주로 하고 있고, 교황청 소유의 각종 시설물들을 관리(유지•보수)하고 있습니다.
교황청과 바티칸은 불가분의 관계에 있습니다. 바티칸은 교황청의 초석이자 구심점입니다. 쥘부채의 사북이나 자전거 바퀴의 허브와 같은 존재입니다. 바티칸은 교황청이 주권을 독립적으로 온전하게 행사할 수 있게 하는 도구적인 역할을 수행합니다. 교황청은 바티칸이 없이도 존재할 수 있으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이론적인 말입니다. 교황청은 바티칸이라는 물리적 공간에 기초하여 영적인 활동을 하고 있는 국가입니다. 교황청은 개념상 ‘영적인 국가’이기 때문에 구글 지도에 표기할 수가 없습니다.
교황청과 외교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나라들이 대사관 운영을 어떻게 할까요? 많은 사람들이 주교황청 대사관이 어디에 있느냐고 묻더군요. 문자적 의미로는 ‘주(駐)교황청 대사관’이니 대사관 청사가 당연히 교황청 본부가 있는 바티칸에 있어야겠지요. ‘주독일’ 대사관은 독일에 있고 ‘주이탈리아’ 대사관은 이탈리아에 있으니, ‘주교황청’ 대사관도 교황청(바티칸)에 주재해 있을 것 같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주교황청 대사관은 교황청(바티칸) 안에 있지 않습니다. 이탈리아, 정확히는 이탈리아령의 로마에 있습니다, 어떤 분은 웃으며 붕어빵에 붕어가 없는 것과 같다고 하셨습니다. 사실 그 농담이 맞습니다. 교황청 안에 대사관 청사를 둔 나라는 하나도 없습니다. 바티칸 시국의 면적이 워낙 작다 보니 물리적으로 외국 대사관 청사를 둘 수 없습니다.
교황청의 핵심적인 기관은 대부분 바티칸에 있습니다. 또 교황을 비롯하여 각 부처의 장관 차관 등 고위 사제들이 바티칸 내부의 공동 숙소(기숙사)에서 살고 있습니다.
바티칸 내부는 일반인들의 접근이 무척 어렵습니다. 가톨릭 성직자라도 함부로 바티칸 출입을 할 수 없습니다. 바티칸이 ‘신비의 성(城)’ 또는 ‘신비의 공간’으로 불리는 이유입니다.
교황청은 국가 구성, 권력 구조, 정부 조직, 유구한 역사와 전통, 독특한 전례와 관행 등 거의 모든 면에서 유일무이합니다. 어느 나라나 갖고 있는 헌법이 교황청에는 없습니다. 성경과 가톨릭 교리서가 헌법 기능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