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젤로 돌아가다
혼란과 슬픔 속에서
출산 뒤에 내 건강 상태는 비교적 빨리 정상으로 돌아왔다. 병원에서 집에 온 뒤로 내 하루하루의 생활은 거의가 애들을 중심으로 돌아갔다. 그렇게 매일 집안에서 꼬마들을 위해 똑같은 일을 반복하다 보니 심신으로 지루하고 피곤할 때가 흔했지만 그게 조금도 싫증 나지 않았고 산모들이 자주 겪는 ‘산후의 우울증’도 나는 모르고 지냈다. 그보다는 오히려 딸의 출생으로 어느덧 두 아이의 부모가 됐다는 자부심에 우리 둘은 온통 마음이 부풀렸다. 남편은 내가 애들 뒷바라지에 힘들어하면 자주 도와주지 못하여 미안해했다. 그래서였는지 주말이나 저녁에 어쩌다 시간이 나면 그는 ‘영화가 보고 싶을 텐데 바람도 쐴 겸 영화관에 다녀오라’며 나를 밖으로 내보냈고 집에 돌아오면 밥상을 채려놓고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의 아기자기한 가족생활은 그렇지만 시어머니의 정신 질환으로 앞에서도 말했지만 점점 찌그러졌다. 결혼 이후 시어머니는 남편과 자주 전화로 말다툼을 했으나 나하고 직접 맞부딪치지는 않았다. 그러다 딸이 태어난 뒤로 그녀는 날마다 남편이 근무하는 시간에 집으로 전화를 하고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마구 쏟아내며 나를 혼란 속으로 빠뜨렸다. 그 시기에 나는 애들이 밤에 여러 번 깨고 우는 바람에 몹시 수면 부족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래서 낮에 애들이 잠들 때 나도 좀 자려고 누워있으면 영락없이 시어머니의 전화가 울리고 매번 ‘애들이 아래층으로 떨어져 죽지 않도록 창문을 닫고 층층대를 잘 막으라, 애들 먹을 것은 다 준비됐느냐’는 등 끔찍스럽고 쓸데없는 말들을 되뇌었다.
시어머니의 끈질긴 전화 공세로 나는 정신적 위기를 스스로 느낄 만큼 큰 타격을 받았다. 그렇지만 남편에게 알리기가 싫어서 꾹 참으면서 억척스럽게 집안일을 제대로 꾸려나가려고 아등바등했다. 내 딴에는 어떻게 해서라도 애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려고 필사적으로 버티고 견뎠던 것인데, 그것도 따지고 보면 남편의 튼튼한 뒷받침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리고 파리에서 아동심리학 전문가로 일하는 시누이 친구의 처방도 크나큰 도움이 됐었다. 1979년 가을에 우리는 그녀의 집에 초대되어 애들과 함께 며칠을 파리에서 보낸 바 있다. 어릴 때부터 시어머니를 잘 알고 있던 파리의 친구는 그 기회에 시어머니의 문제점에 대해 여러 번에 걸쳐 우리와 이야기를 했다.
그 자리에서 처음으로 내 고통을 듣게 된 남편은 질겁을 하고 시어머니에 대한 분노를 참느라고 무진 애를 썼다. 파리 친구는 끝에 가서 나에게 간단명료하게 ‘시어머니가 전화하면 일단 전화를 받되 대답하지 말고 전화기를 옆에 놔두라’는 자아 방어법을 가르쳐줬다. 그리고 남편에게는 ‘시어머니에게 다시 전화를 못 하도록 금지시키라’라고 충고했다. 그때까지 나는 며느리의 예의를 지킨답시고 시어머니의 전화를 감히 끊지 못하고 끝까지 다 들었는데, 파리에서 돌아온 뒤로 시어머니가 전화하면 파리 친구가 가르쳐준 대로 전화기에서 흘러나오는 말을 듣지 않았다. 그런 반면에 남편의 전화 금지는 시어머니와 의붓시아버지가 굉장히 화를 낼만큼 그들에게 충격을 줬지만, 어찌 되었든 간에 그 뒤로 시어머니 전화는 정말로 뜸해졌고 내 괴로움도 그만큼 많이 가라앉았다. 전화 문제가 그렇다고 완전히 끝난 건 아니었지만 그 뒤부터 내 건강 상태가 조금씩 나아졌던 걸로 봐서 친구가 가르쳐 준 자아 방어법은 나의 경우 잘 들어맞았다.
나는 이 글을 쓰면서 어쩔 수 없이 자주 시어머니를 생각했다. 되돌아보면,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만 해도 그녀는 진보적인 지적 여성으로 한국에서 온 나를 조금도 이방인으로 다루지 않고 귀여워할 만큼 다정스러웠다. 그러나 몹쓸 정신병에 걸리면서 슬프게도 우리 사이는 돌이킬 수 없는 비극으로 끝나고 말았다. 시어머니가 자살한 지도 30년이 넘었다. 한때는 시어머니에 대한 미움과 원망이 많았지만 나이가 많아질수록 그녀가 불쌍하다고 느껴져 미움을 지우고 마음을 비우려고 내 나름대로 노력했다. 그녀가 어려서 부모로부터 좀 더 사랑을 받았더라면, 남편과 이혼하지 않았더라면 아주 다른 시어머니였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서.
다보스로
시어머니의 처참한 상황으로 모든 게 어수선했던 1978년 초여름에 우리는 다락방 생활을 마치고 가까운 곳의 좀 더 큰 아파트로 이사했다. 2층에 있는 아파트였는데 전찻길 옆이라서 밤늦게까지 시끄러웠다. 그러나 대신 택시를 타지 않아도 애들을 데리고 전차로 시내 중심지까지 직접 갈 수 있어서 외출할 때 편리했다. 그리고 아파트에 달린 커다란 베란다도 애들 놀이터로 알맞았다.
그쯤에 남편은 우리가 처음으로 만났던 바젤대학병원 이비인후과 병동에서 6개월 일했는데, 그 뒤에도 1980년 초까지 2년 반이 넘도록 똑같은 병원에서 적잖이 다섯 번이나 일자리를 바꿔가며 인턴 생활을 계속했다. 자꾸 직장을 바꾸는 이유에 대해 그는 실력 있는 의사가 되려면 될수록 여러 가지 질병에 대한 경험을 쌓아야 한다’고 밝혔는데, 지당한 말인 줄 알면서도 어쩐지 내 마음은 편하지 않았다. 남편이 혹시 시어머니의 질병과 내 건강 문제에 묶여 원하는 작장을 찾지 못하고 이리저리 헤매지나 않는가 싶어서였다. 스위스 사람들이 흔히 쓰는 통속어 “의자와 벤치 사이”(Zwischen Stuhl und Bank)는 ‘중요한 결정을 앞두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주춤거리며 헤매는 답답한 상황’을 뜻하는데 그 시기에 바로 우리의 처지가 그랬다. 그러던 중에 남편이 다보스(Davos)의 폐병 환자 요양소로 파견되면서 변화의 낌새가 얼마쯤 보였다. 무엇보다 잠시라도 시어머니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으로 갈 수 있어 속이 시원했다.
그리하여 우리는 1980년 4월 초봄에 얼추 휴가를 가듯 한껏 들뜬 채로 차로 두 시간 반 거리의 다보스로 훌쩍 떠났다. 목적지인 폐병 요양소는 다보스 시에서 상당히 떨어진 산속에 있었다. 우리는 요양소에서 멀지 않는 바젤대학병원에서 파견되는 의사의 전용 주택에서 살았는데, 커다란 주택의 주변은 그 옆에 자그만 집 하나가 서있을 뿐 사방이 모두 전원이었다. 너무 외떨어진 산골이어서 애들이 심심해할까 봐 걱정했으나 다행히 옆집에 사는 요양소의 책임 요리사 가족에 현이 동갑의 아들이 하나 있었다. 두 녀석은 만나자마자 금방 친구가 되어 잘 어울렸고 2살짜리 미자도 그들과 뭉쳐 널따란 정원에서 신나게 뛰놀고 소꿉놀이를 했다. 그해 다보스 지역에는 비가 자주 왔던 데다 7월 중순 한여름에 눈이 수북이 내려 눈싸움을 하는 애들 틈에 나도 끼어들어 다 같이 눈사람을 만들기도 했다. 그리고 어쩌다 비 오지 않는 날에는 다람쥐 떼와 한두 마리 어린 사슴을 쉽게 만날 수 있는 숲 근처에서 애들과 산보했다. 그곳에는 다람쥐 사슴 말고도 이름 모를 산새들이 수없이 많아서 애들에겐 조그만 동물원 같았다.
내가 애들과 산속의 맑은 공기와 푸른 자연의 아름다움을 즐기는 동안 주중에 남편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일을 했다. 그래도 일은 단조롭고 수월한 편이어서 그는 깊은 산속에서 오랜만에 평화로운 날들을 보냈다. 그에다 우리의 살림살이도 아주 편하고 단출했다. 그곳의 규칙에 따라 우리 가족의 식사 거리와 집 안 청소 문제는 요양소에서 모두 챙겨주었고 심지어 우리가 쓰는 침의마저 일주일마다 새것으로 갈아주어서 실지로 내가 해야 할 일은 그저 아침 식사나 준비하는 정도였다. 점심과 저녁은 항상 남편이 요양소에서 가져다주는 음식을 먹었는데 옆집 요리사가 만드는 음식으로 종류도 많았지만 맛도 좋았다. 그 밖에도 40대의 요리사 아저씨는 우리를 두어 번 저녁식사에 초대하여 그의 자랑거리인 스페인 음식 파엘라(Paella)를 만들어주고 그에게서 나는 요리법을 배웠다. 이래저래 우리는 다보스에서 분에 넘치는 호강살이를 했다. 거기다 애들이 밖에서 저들끼리 잘 놀아서 그 틈을 타고 나는 밀려있던 책들을 읽었다.
둘째를 임신하면서 나는 문학의 방향을 남아메리카에서 러시아로 바꾸었다. 옛날 간호학교 시절에는 도스또예프스키와 톨스토이를 좋아했으나 미국으로 간 뒤에 오랫동안 러시아 문학에서 멀어졌었다. 그러다 의붓시아버지 괴티가 생일 선물로 준 막심 골키의 “어머니”를 읽게 되면서 새로이 러시아 문학에 이끌렸는데, 다보스에서 나는 체호프 숙쉰 나보코프 푸쉬킨 뚜르게네프의 작품을 애독했다. 한마디로, 다보스에서의 산속 생활은 불과 4개월에 지나지 않았으나 우리의 지치고 상처받은 마음을 치유하는데 더없이 좋은 기회가 됐으며 신선한 경험이었다.
참고로, 칸톤 그라우뷘덴에 속하는 다보스는 해발 1,650미터 위에 있는 작은 도시다. 19세기 후반에 그 지역의 신선한 공기 때문에 “기후 건강 치료 장소”로 알려지면서 유럽의 여러 나라에서 환자들이 찾아올 정도로 주목을 받았다. 주로 폐병이나 결핵증 환자들이었는데 20세기 말경에 의학의 발전으로 치료소의 대부분은 사라졌으며 남편이 일하던 요양소도 사라진 지 오래다. 다보스는 그 밖에도 19세기 중반부터 썰매놀이, 스키 등 동계 스포츠의 중심지로 유명하다. 그리고 1971년에 다보스에 창설된 “세계경제포럼” (World Economic Forum)은 한국에도 잘 알려지다시피 오늘날 130여 개 나라를 대상으로 해마다 1-2월에 열리는 경제 토론의 국제적 주요 무대로 세계적 관심을 받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