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실기에 탄생한 실패작?

글 이휘현 KBS전주 PD

한 역사가의 도스또예프스끼 평전

에드워드 H. 카(1892~1982)는 20세기 역사학의 봉우리에 위치한 영국 출신의 학자다. 그의 이름은 “역사란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라는 명제로 회자되는 책 <역사란 무엇인가>의 저자 이름에 박혀 있기도 하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꽤 친숙한 역사학자다.

카는 살아생전 러시아 역사의 세계적 권위자로 통했는데 특히 그의 첫 저작이 흥미를 끈다. 학자 이전에 영국 외무부 소속 공무원으로 재직한 그는 꽤 긴 세월을 소련에서 보냈다. 카는 20년 가까운 러시아 재임 경험과 젊은 시절 착실하게 쌓아온 학식을 바탕으로 첫 저서를 발간하게 된다. 그 책이 바로 <도스또예프스끼 평전>이다.

카는 도스또예프스끼를 이해하지 못하고서는 러시아의 근현대사에 다가갈 수 없다고 확신했다. 그런 그의 러시아 관련 첫 저작물이 <도스또예프스끼 평전>인 것은 어찌 보면 지극히 자연스러워 보인다. 1931년 카의 나이 서른아홉에 빛을 본 이 노작(勞作)은, 이후 수많은 이들이 도스또예프스끼의 삶과 문학을 이해하는 데에 중요한 사료가 되어주었다.

두말하면 잔소리지만, 도스또예프스끼 읽기를 연재 중인 나에게도 이 책은 중요한 텍스트다. 도스또예프스끼를 다룬 여러 평전이 번역본으로 나와 있으나 이 저서만큼 명징한 분석은 없기 때문이다. 무분별한 상찬도 터무니없는 폄하도 없다. 학자로서의 꼼꼼한 고증과 냉철한 분석만이 있을 뿐이다. 지극히 논리적이고 이성적인 시선으로 감성적인 문학의 영역을 파헤치는 이 모순의 풍경이 그저 흥미로울 따름이다. 그래서 나는 이 평전에 그 어느 것보다도 더 신뢰가 간다. 그런 이유로 나는 ‘도스또예프스끼 완전정복’에 도전하고자 하는 이들에게 이 책을 적극 추천하는 바이다. 매우 훌륭한 가이드북이 되어줄 것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마침내 ‘결실기’에 도달하다

<도스또예프스끼 평전>에서 에드워드 H. 카는 작가의 생애를 크게 네 시기로 구분하고 있다. 성장기, 격동기, 창조기, 결실기가 그것이다.

성장기는 도스또예프스끼 출생부터 정치범으로 붙잡혀 시베리아 옴스끄 감옥에서 죄수로 4년을 보낼 때까지의 기간을 말한다(1821~1855). <가난한 사람들>, <분신>, <백야> 등이 이 시기의 대표작으로 꼽힐 수 있을 것이다.

격동기는 시베리아 세미빨라찐스끄에서의 강제 징병 시기로부터 뻬쩨르부르그 복귀 후 출판 사업과 실패를 겪는 10년이 시간이 채우고 있다(1855~1865). 이 시기에 유부녀 마리야 이사예바와 사랑에 빠져 결혼한 그는 도박 중독 그리고 젊은 처녀 수슬로바와의 외도로 자신의 삶에 많은 얼룩을 묻혔다. 암흑기라 불린 이 시절 그는 <상처받은 사람들>과 <지하로부터의 수기> 등을 작품으로 남겼다.

창조기(1866~1871)는 <죄와 벌>의 집필이라는 화려한 이력으로 시작한다. 이후 <백치>와 <악령>으로 이어지는 걸출한 대작 퍼레이드가 펼쳐진다. 이를 통해 도스또예프스끼는 러시아 문단의 중심에 우뚝 서게 되었다. 20여 년 연하 속기사인 안나 그리고리예브나와의 결혼은 이 시절 도스또예프스끼가 꽃피운 문학적 성과와 맞물려 돌아간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도스또예프스끼의 인생 후반부에 두 번째 아내 안나의 ‘내조’가 끼친 영향력은 실로 컸다. 끊임없이 압박해오는 출판사의 빚 독촉과 그에게 빌붙으려는 친척들의 등쌀, 감정적으로 부침이 심한 도스또예프스끼를 끊임없이 흔드는 여러 여성들과의 관계는 안나의 ‘내조’에 의해 하나하나 정리되어 갔다. 그렇게 성장기와 격동기, 창조기로 이어지던 도스또예프스끼의 굴곡진 인생 행보는 드디어 결실기라는 종착점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이 결실기 10년(1871~1881) 동안 도스또예프스끼는 두 편의 대작을 완성했다. 그 중 첫 번째 작품이 바로 이번에 다룰 <미성년>이다.

이 장편소설은 제목에서 엿볼 수 있듯 아직 성숙하지 못한 한 자아가 여러 사건들을 통해 하나의 완성체로 성장해 나아가는 1인칭 고백록의 형식을 보여준다. 청년작가 시절 미완으로 끝낸 <네또츠까 네즈바노바>(정치범으로 체포되기 전에 쓴 소설) 이후 거의 써보지 않은 성장 서사를 이 완연한 결실의 시절에 도스또예프스끼는 어떤 이야기로 풀어나간 것일까. 이제 그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 보자.

‘미성년’ 이야기

주인공인 나(화자)의 이름은 ‘아르까지 돌고루끼’다. 돌고루끼라는 성을 물려준 사람은 농노 출신의 마까르 돌고루끼. 하지만 아르까지의 진짜 핏줄은 마까르 돌고루끼가 하인으로 살았던 집의 귀족 베르실로프와 연결되어 있다. 그러니까 아르까지 돌고루끼라는 존재는 귀족과 그의 하인 아내와의 부적절한 관계로부터 생겨난 것이다. 

아르까지는 어린 시절부터 멀리 기숙사에 보내져 천덕꾸러기 신세로 성장해 왔다. 진짜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고 배다른 형과 누나에게도 가족의 관계로 다가가지 못한 그는 어린 시절부터 울분을 쌓아왔을 것이다. 그렇게 스무 살을 넘겨 청년이 되었지만, 아르까지는 자신의 저주받은 출생의 비밀로부터 여전히 자유롭지 못했다. 

그의 가슴속 응어리는 세상을 향한 복수심으로 싹을 틔우고, 그 복수심은 당대 러시아 사회를 서서히 물들이던 물신주의와 결합한다. 어떤 방법을 쓰든 큰 부자가 되고자 하는 물욕은 아르까지의 관념 속에서 하나의 ‘철학’으로 포장된다. 

이 미성숙한 청년은 뻬쩨르부르그로 돌아와 생부 베르실로프 그리고 생모인 소피야와 불편한 동거를 시작한다. 호적상 아버지인 마까르 돌고루끼는 집을 나간 지 오래라 생사가 불분명한 상태다. 저주받은 출생에 대한 주인공 아르까지의 트라우마는 아버지에 대한 지독한 원망과 복수심으로 전이된다. 그 이면에는 어머니 소피야를 향한 안타까움과 뜻 모를 그리움이 배어있기도 하다. 

아르까지는 생부 베르실로프의 소개로 소꼴스끼라는 갑부이자 늙은 공작의 일상을 거든다. 그의 첫 직장인 셈이다. 이 노공작은 아르까지에게 호의적이다. 다만 늙고 병들어서 내일을 기약할 수 없는 처지다.

소꼴스끼 공작에게는 까쩨리나라는 외동딸이 있다. 그녀는 이혼 후 아버지 소꼴스끼 집에 빌붙어 살고 있다. 노공작의 사후 상속자는 당연히 딸인 까쩨리나가 될 것이지만, 그녀의 마음은 불안하다. 아버지인 소꼴스끼 공작의 정신상태가 온전하지 않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공작의 친한 벗인 베르실로프(주인공 아르까지의 생부)가 어떤 식으로건 공작의 재산을 가로채지 않을까 걱정한다. 아버지 주변에 머물고 있는 아르까지라는 존재도 뭔가 불편하기는 마찬가지다. 그런데 이를 어쩐다! 아르까지는 이혼녀이자 연상녀인 까쩨리나에게 연모의 감정을 품고 있는 듯 보이니 말이다. 

그러던 어느 날 주인공 아르까지 수중에 편지 하나가 전해진다. 편지를 건넨 사람은 이 봉투 속에 아르까지의 생부 베르실로프를 심각한 위기에 빠뜨릴 수 있는 내용이 담겨있다고 말한다. 아르까지는 묘한 긴장을 보듬은 채 편지를 가슴 속 깊이 감춘다. 과연 그의 행보는 어떤 결말을 향해 갈 것인가.

‘미성년’은 실패작?

총 3부로 구성된 이 이야기는 도스또예프스끼의 5대 비극 중 가장 덜 비극적이라는 점이 눈길을 끈다. 나머지 네 개의 작품에서는 ‘살인’이라는 거대한 파국이 이야기를 휘몰아치지만, <미성년>에서는 그 흔한(?) 살인사건이 한 번도 발생하지 않기 때문이다. 

다른 작품들에 비해 인물들도 꽤 순화되어 있다. 윤리와 정의의 이름으로 살인을 정당화하는 확신범도 없고(<죄와 벌>의 라스꼴리니꼬프), 정치를 명목으로 살인과 폭력을 서슴지 않는 왜곡된 혁명가(<악령>의 뽀뜨르 베르호벤스끼)의 초상도 없다. 겉으로는 악녀처럼 보이지만 그 내면은 한없이 처연한 여인(<백치>의 나스따시야)도 눈에 띄지 않는다. 

상대적으로 밋밋한 인물들이 심심한 이야기 속에서 허우적대다 보니 <미성년>은 도스또예프스끼의 ‘순한 맛’ 비극으로 완성된 측면이 없지 않다. 

그래서일까? 도스또예프스끼의 문학세계를 평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이 <미성년>을 그의 5대 비극 중 가장 ‘질 낮은’ 소설로 치부하고는 한다. 

어느 정도 동의할 수 있는 부분이기는 하다. 플롯은 정돈되어 있지 않고, 여러 캐릭터들이 일관성을 유지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도스또예프스끼가 이 긴 소설을 통해 하고자 하는 얘기가 무엇인지 파악하기도 좀체 쉽지 않다. 그러다 보니 그의 다른 비극들에 비해 주제의식이 선명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그건 아마 창작자인 도스또예프스끼의 내면뿐만 아니라 외적 요건도 어느 정도의 영향을 미치지 않았을까 싶다.

<미성년>이 연재된 잡지는 <조국 수기>다. 반면 5대 비극의 나머지 네 작품은 모두 <러시아 통보>라는 잡지에 연재되었다. 정치적 지표로 따졌을 때 <러시아 통보>는 보수 쪽으로 기울어 있고 <조국 수기>는 진보 쪽으로 기울어 있다.

말년의 도스또예프스끼는 이미 누차 얘기했듯 보수 논객으로서의 면모를 보여주었다. 서유럽의 자유주의에 대한 청년 시절의 믿음은 진작 깨어졌고, 그 관념의 빈자리를 메운 것은 러시아 적인 것에 대한 찬양 즉 민족주의자로서의 면모와 신앙에 대한 절대적 믿음 등이 차지하고 있었다. 이러한 보수적 정치관은 그의 비극 소설들 속에서 맘껏 활개 칠 수 있었는데 특히 <악령>은 이러한 관념을 돌직구로 던진 정치적인 작품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그가 진보적 성향의 잡지 <조국 수기>에 자신의 또 다른 비극을 연재한다는 것은 이미 그 안에 어떤 모순이 내재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보듬고 있었다. 이 특이한 이력은 도스또예프스끼의 청년 시절 대표작 <가난한 사람들>을 러시아 문단에 알린 공헌자이자 당시 <조국 수기> 편집의 책임을 맡고 있던 절친 네끄라소프와의 인연 때문에 성사되었다. 한때 소원한 관계를 유지하던 둘은 나이가 들어가면서 정치적 견해차를 극복하고 견고한 문학의 성채를 쌓는 것에 있어서 만큼은 같은 입장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렇게 네끄라소프의 원고 청탁을 도스또예프스끼가 받아들인 것이다.

아무래도 <조국 수기> 독자들의 성향을 고려했을 때, 도스또예프스끼는 서유럽의 정치에 경도된 일련의 진보주의자들을 향한 거침없는 비판과 냉소를 <악령>을 썼을 때만큼 맘껏 표출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자신이 가장 확신을 가지고 발설할 수 있는 사상들을 스스로 억누르다 보니 이야기는 목적지를 잃고 갈수록 힘이 빠질 수밖에 없었다. 캐릭터들 또한 갈피를 잡지 못하고 흐지부지되면서 이야기는 조금은 싱겁게 마무리되고 만다. 

귀족의 피를 받고 태어났지만 농노의 호적에 오른 주인공 아르까지의 운명처럼, 소설 <미성년>은 진보 잡지에 실린 보수 논객의 작품이라는 모순 속에서 미성숙한 상태로 세상에 나온 비운의 작품이 되고 만 것이다.

하지만 누가 알랴. 사람들의 평가는 시간이 흐르면서 변하기 마련이다. 도스또예프스끼의 5대 비극 중 가장 낮은 평가를 받아온 이 소설의 가치가 새롭게 평가받는 시대가 언젠가 도래할지도 모르는 일.

개인적으로 나는 이 소설을 그가 바로 직전에 발표했던 소설 <악령>보다는 훨씬 더 재밌게 읽었다. 실패작이라는 특별한 선입견만 없다면 이 소설은 꽤 재밌게 읽을 수 있는 도스또예프스끼의 몇 안 되는 작품 중 하나일 것이다. 다만 구성이 산만해지는 중반 이후에 정신을 바짝 차리고 읽어야 그 재미가 반감되지 않으니, 여하튼 <미성년>을 잡고 책장을 넘기신다면 끝까지 긴장을 풀지 마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