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 유토피아 또는 디스토피아, 메타버스
글 최필식 기술작가(Techonology Writer)
‘메타버스’(Metaverse). 불과 1년 남짓 만에 그야말로 용광로처럼 뜨거운 용어이자 사회 현상이 됐다. 이 기이한 현상을 확인하는 방법은 아주 쉽다. 새로 시작하는 서비스뿐 아니라 이미 존재하는 어떤 것-심지어 디지털이 아닌 것마저-에 ‘메타버스’를 끌어다 이름을 짓거나 구구절절 이 용어를 늘어놓으며 장황하게 홍보하고 있으니 말이다.
때문에 메타버스를 알고 싶은 이들을 이해시키려는 수많은 이야기가 쏟아지고 있다. 어쩌면 이 글도, 아니 당연히 이 글도 그런 류의 글 중 하나일 뿐이다. 다만, 이 글에서 메타버스는 “도대체 어떻게 생겨 먹은 세상인거야?”라는 질문에 답하지 않는다. 그저 인터넷이 어떻게 바뀌어 가고 있는지 조금 말할 뿐이다. 그것은 탈중앙화를 통한 권리의 투명한 분산이라는 다음 세대 인터넷이 갖추게 될 새로운 표준에 대한 이야기다.
디지털 전환에 적응한 인류
(처음부터 이 용어를 쓰게 돼 미안하지만,) 아마도 많은 이들은 디지털 전환(Digital Transformation)이라면 산업계에서 쓰는 전문 용어로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그것도 무리는 아니다. 사실 대다수의 일반인에게 디지털 전환은 그다지 중요한 용어도 아니고 굳이 신경 쓸 필요조차 없으니까.
그런데 재미있는 사실이 있다. 우리는 끊임없이 디지털 전환의 중심에 서 있었고 변화를 이끌었으며 적응했다는 점이다. 특정 기업이 아닌 바로 우리 자신이 디지털 전환을 주도하고 이끌어 왔음에도 그것을 자각하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왜냐고? 굳이 컴퓨팅의 역사를 되짚지 않아도, 우리는 지금 디지털 컴퓨팅 없는 삶을 살 수 없다. 당장 이 글을 PC에서 쓰는 나는 물론 이 글을 읽는 독자 모두, 내가 프로그램을 통해 입력한 글자들을 디지털 데이터로 코드화하고 이 데이터를 디코딩해 읽을 수 있는 컴퓨팅 장치를 갖고 있다. 전 세계 1억 명이 넘게 봤다는 <오징어 게임> 등 상당수의 영상물은 더 이상 필름에 기록하지 않는다. 디지털 방식으로 기록한 원본이 디지털 편집을 통해 CG와 디지털 음원을 입혀 완성되면, 디지털망을 통해 전송된 디지털 데이터를 스마트폰이나 태블릿, OTT 셋톱 같은 컴퓨팅 장치로 디코딩해 보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작업은 우리 주변에서도 흔하게 일어난다. 우리 중 누군가 거의 매일 이용하고 있을 배달앱을 보자. 우리가 메뉴를 고를 수 있도록 만든 이 디지털 앱은 결제하는 순간, 음식점과 카드사와 앱 개발사와 라이더에게 디지털 정보가 전송되고 각자가 필요한 일을 한다. 단 한 명의 주문자에 의해 생성된 디지털 정보를 나눠 갖게 된 이들이 움직이는 사회가 된 것이다. 새삼스러울 게 없다. 은행도, 쇼핑도, 택시 호출마저 이미 그렇게 움직이는 세상이 됐다.
지난 50년 동안 대중화된 컴퓨팅과 네트워크의 티키타카가 만든 생태계에 서서히 녹아든 오늘날의 모습이 이렇다. 아직도 많은 이들은 디지털을 우리 삶에 도움을 주는 다른 차원의 기술적 요소로 받아들인다. 하지만, 실상은 디지털을 통해 살아가는 사회로 이미 전환됐고, 이 전환은 멈춤 없이 앞으로도 계속 이어지게 되리라는 것은 변함없는 진리다.
모든 것을 초월하는 동력, 디지털
메타버스라는 이 합성어는 기가 막힌, 정말 멋진 용어다. 나는 닐 스티븐슨이 80년대 소설에서 이 말을 썼다는 사실에 더 놀라고 있다. ‘초월’이란 의미의 그리스어 ‘메타’-히브리어로 죽음의 의미도 있다-와 ‘세계’를 합친, 초월한 세상 또는 초월의 세상으로 해석할 수 있는 메타버스는 이 뒤의 인터넷을 대중적으로 표현하는 용어로 매우 적합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나는 ‘다음의 인터넷’이 초월한 세상이라 가정한다면, 반드시 두 가지를 질문해야 한다고 말한다. ‘무엇을 초월할 것인가?’와 ‘어떻게 초월할 것인가’다. 즉, 초월한 세상이라면 뛰어넘어야 될 대상이 존재한다는 의미다. 그리고 대상이 정해지면 어떻게 초월할지 방법을 정해야 한다.
초월의 대상은 수만 가지가 있을 수 있다. 그중에서 가장 큰 덩어리를 하나만 말하면 우리가 살고 있는 물리적 세상이다. 정해진 공간, 잡을 수 없는 시간, 통제할 수 없는 자연 현상, 능력의 한계를 지닌 신체 등 물리적 세상은 수많은 제약으로 가득 차 있다. 과학이 물리적 세상의 비밀들을 조금씩 풀어내고 있지만, 그렇다고 공간 이동이나 시간 여행 같은 초월적인 일은 어렵다.
그런데, 우리는 이미 일부나마 물리적 제약을 초월한 삶을 사는 중이다. 직접 공간을 이동하지 않고, 시간을 들이지 않으며 몸을 쓰는 일 없이 말이다. 은행에 가지 않아도 돈을 주거나 받고, 마트에 가지 않고 여러 물건을 주문하고 받는다. 물론 지금은 다른 사람이 대신 시간을 쓰고 공간을 이동하지만, 이를 대체할 로봇 같은 수단이 대중화될 때면 그런 문제도 사라질 것이다. 직접 시간을 거스를 수는 없어도, 시대상이 반영된 디지털 게임이나 디지털 문화 공간을 통해 그 시대를 살 수도 있다. 또한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물리적 법칙을 무시한 새로운 세상 역시 디지털을 이용해 만들고 있다.
이처럼 컴퓨팅과 네트워크로 다져진 디지털 기술은 물리적 세상의 한계를 넘을 수 있는 사례를 넘치도록 쌓아가고 있다. 다만, 아직은 물리적 세상을 완전하게 초월한 건 아니다. 디지털이 물리적 세상을 초월하게 만들 동력인 것은 분명하지만, 그것을 세상이라고 느끼는 이는 아직 드물다. 우리의 감각이 그것을 세상으로 보지 않기 때문이다.
감각이라는 디지털 세계의 최대 장벽
혹시 이런 의문을 가져본 적이 있을지 모르겠다. 이 세상을 디지털로 똑같이 구성한 다음, 그것을 스마트폰이나 PC 같은 컴퓨팅 장치에서 보면 왜 실제 세상처럼 느껴지지 않는지 말이다. 알 만한 장소에 눈에 익은 건물, 사물까지 복제해 완벽한 디지털 세계를 만든다 해도, 우리가 사는 세상이 아닌 그냥 컴퓨팅 장치에서 처리된 그래픽이라는 것만 또렷하게 이해할 뿐이다.
그 이유는 멀리서 찾을 필요 없다. 바로 우리의 감각이 그 원인이라서다. 무엇보다 오감 가운데 시각의 영향을 크게 받는다. 분명 디지털 세계는 공간을 비롯해 온갖 3D 모델 데이터를 모아 놓은 곳이지만, 오늘날 모바일 화면이나 PC 모니터, 대형 TV 같은 장치를 통해서 볼 땐 그 모든 것이 2D로 인식된다. 아무리 시야각을 바꾸고 공간의 깊이를 준다 한들 강제적인 2D 필터인 평면 디스플레이로는 우리 뇌에서 이를 공간으로 알아채지 못한다. 2D 디스플레이는 마치 창과 같아서 우리가 움직이는 방향이 아닌 화면 안에서 바뀐 공간과 사물을 보는 것인 만큼 현실감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현실의 복제든, 상상으로 짓든 3D 공간과 데이터로 건설된 디지털 세상을 보기 위해선 우리의 감각이 이해할 수 있는 방식이 필요하다. 눈에 들어오는 디지털 세상을 더 이상 뇌가 가짜라고 판단하지 않을 수 있는 속임수를 써야 하는 것이다. 기존 데스크톱, 또는 모바일 컴퓨팅을 위해 존재했던 평면 디스플레이가 아닌, 디지털 세상의 깊이를 재현할 수 있는 입체적인 디스플레이 기술에 기반한 새로운 컴퓨팅 인터페이스의 등장은 그래서 자연스러운 일이다. 가상 현실, 증강 현실 헤드셋이나 제한적이나마 무안경 3D 디스플레이들이 필요한 이유이고, 이런 것이 모바일 다음의 차세대 컴퓨팅 인터페이스로 뜨는 것이다.
무형적 실체를 거래하는 새로운 표준
그런데 새로운 인터페이스를 통해 우리의 뇌가 속기 시작하면 지금까지 디지털 세상의 공간, 사물을 구성하는 3D 데이터를 보는 관점도 바뀔 수밖에 없다. 분명 3D 데이터는 물리적 형태로 만들지 않으면 실체를 확인할 수 없는 컴퓨팅의 결과물일 뿐이다. 하지만, 이미 속임수에 적응해 버린 우리의 뇌가 깊이를 느낄 수 있는 디지털 공간을 실제처럼 돌아다니고, 사물을 자연스럽게 만지는 데 익숙해지면 이 데이터들은 굳이 물리적인 형태를 띠지 않아도 실체를 가진 것처럼 여길 수밖에 없다.
3D 데이터가 물리적으로 세상에 나오지 않아도 무형적 실체로 이해되는 것은 디지털 경제 생태계에서 매우 중요한 변화다. 그것은 컴퓨팅이 단순히 처리해야 할 데이터가 아니라 3D 데이터 자체를 디지털 상품화하고 그 권리의 소유에 대한 이해관계를 발생시킨다. 3D 데이터로 만들어진 디지털 상품에 대한 거래가 빈번하게 일어나게 되면 디지털 경제 생태계로 성장하고 확장되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디지털 경제 생태계를 위해선 특정된 플랫폼이 필요한 게 아니다. 디지털 상품에 대한 소유의 권리 부여 및 데이터 이동을 위한 표준이 필요하다. 즉, 우리가 편의점에서 산 물건을 집이든, 차든 가져갈 수 있는 것처럼 디지털 세상에서 산 3D 상품도 구매자가 원하는 어디든 이동할 수 있어야 한다. 냉정하게 말해 3D 데이터에 불과할 뿐이라 해도 그것에 대가를 지불하는 이유는 소유하고 이동할 권리라는 가치를 갖기 때문이다.
지금 메타버스라고 부르는 수많은 서비스도 그 안에서 온갖 3D 상품을 판매하지만, 단 한 가지를 인정하지 않는다. 이용자가 그 데이터를 소유하고 이동시킬 수 있는 권리다. 3D 상품을 사기는 쉬운데, 그 서비스 안에 있어야만 권리가 유지된다. 서비스가 사라지면, 또는 이용자가 그 서비스를 떠나면 상품도 사라지고, 권리도 잃는다. 결과적으로 권리라는 가치를 담은 3D 상품을 모을 수 있으면 디지털 자산으로서 가치를 갖게 되는 셈이다.
그런데 디지털 상품에 대한 권리를 부여하려면 여러 존재가 붙어야 한다. 생산자와 구매자, 중개자, 법적 기관 등 다양하다. 물론 이들이 모두 만나서 상품의 계약을 확인할 필요는 없다. 정해진 거래 규칙에 따라 각 구성원의 고유 코드를 그 상품에 담고, 거래 정보를 나눠 가지면 될 뿐이다. 그러나 아직 어떤 형태의 코드를 공유하고 정보를 나눠 가질 것인가에 대한 보편적 정의나 표준은 없다. NFT를 통한 실험은 눈여겨 볼 대목이지만, 표준까지 가려면 더 많은 논의가 필요한 부분이다.(머지않은 훗날 권리를 가진 디지털 상품에 대해 우리는 어떻게 상속할 것인가를 논하게 될 것이다.)
무엇보다 이용자가 권리를 갖는 3D 상품, 디지털 통화 등 디지털 자산을 보관해야 할 장소가 필요하다. 이용자가 자체 보유한 데이터 은행, 또는 이를 대신할 데이터 금고다. 나의 디지털 자산을 관리하기 위한 공간은 필연적이기 때문에, 클라우드처럼 중앙화된 현재의 인터넷은 탈중앙화를 통해 분산과 분권의 형태로 재편될 수밖에 없다.
디지털 유토피아 또는 디스토피아
2000년대, 웹 2.0 시대의 모토는 개방, 참여, 공유였다. 이를 통해 수많은 사람들이 참여하는 소셜 기반의 서비스가 등장했고, 초대형 클라우드 서비스들이 성장했으며, 사회는 아주 빠르게 변화했다. 하지만 그 변화가 모든 이에게 축복만 내려준 건 아니었다. 주식 가격만 따져 1천조가 넘는 IT 기업들을 보는 부러운 시선 곁으로 권리를 독점한 플랫폼의 피해자들도 함께 서 있는 상황이다. 누군가에겐 지금의 디지털 세상을 유토피아, 또 다른 누군가는 디스토피아로 보는 것은 너무 당연하고, 이 일은 앞으로의 세상에도 이어질 것이라는 점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때문에 지금처럼 중앙에 집중된 불투명하고 독점적인 권리를 나누는 일은 디지털 및 우리가 사는 세상의 발전을 위해 불가피한 일이다. 이를 위해선 중앙에서 처리하고 독점했던 정보와 데이터를 나눠 가져야 하고, 권리를 분산시키는 일을 가속화할 수 있는 새로운 표준이 나와야만 한다. 하지만 아직은 그 출발조차 제대로 하지 못한 채, 우리는 존재하지도 않는 메타버스의 허영만 좇고 있다. 그러니 이제 메타버스가 무엇이냐고 묻지 말고 질문을 바꾼다. “다음 인터넷 세상은 무엇에 가치를 두고 나아가는가?”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