뜻밖의 만남, 한국 현대사의 ‘매듭’을 풀다
이백만 전 주교황청 한국 대사, 현 한국방송광고진흥공사 사장
뜻밖의 만남, 흔히 조우(遭遇)라고 합니다. 일상에서 뜻밖의 만남은 때때로 인생을 살맛 나게 합니다. 먼 길을 가다, 아니면 홀로 여행을 하다, 우연히 마주친 사람이 인연이 되어 고달픈 인생살이가 펴지기도 하고, 진퇴양난의 어려움이 풀리기도 합니다. 뜻밖의 만남을 통해 평생의 인연을 맺은 경우도 종종 있습니다. “인생은 만남이다.”라는 말이 그래서 나왔을 것입니다. 국가나 민족의 역사에서도 뜻밖의 만남이 주는 은혜는 적지 않습니다. 한국 현대사에서 그런 사례를 하나 소개하겠습니다.
1948년 12월 12일, 유엔(UN)이 신생 대한민국을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정부로 승인한 날입니다. 세상이 아는 장면 박사(제2공화국 국무총리 역임), 가톨릭 신자들이 아는 장면 사도요한은 1948년 10월 소화 데레사 성녀의 축일을 맞아 프랑스 파리 근교로 성지 순례에 나섰습니다. 당시 장면은 파리에서 열리고 있던 유엔 3차 총회에 한국 정부의 특사단 단장으로 활약하고 있었습니다. 초대 대통령 이승만은 장면에게 “유엔 총회에서 정부 승인을 받아오라”는 특명을 내렸습니다. 나라의 운명이 걸린 일이었습니다.
장면의 임무 수행은 험난하기 그지없었습니다. 시쳇말로 맨땅의 헤딩 수준이었습니다. 한국 특사를 알아주는 사람은 거의 없고, 총회 의장을 만나 사정을 하려고 했지만 면담 자체가 불가능한 상황이었으니까요. 당시 유엔 총회에서는 이스라엘 문제가 핫이슈로 부각되어, 한국 문제는 안중에도 없었습니다. 의사봉을 쥐고 있는 에바트 의장을 만나야 했는데 난공불락이었습니다. 호주노동당(ALP) 출신으로 외무장관을 지낸 분이었는데. 진보적 이념 성향 때문인지 한국(남한)을 의도적으로 기피했습니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던 장면은 소화 데레사 성녀에게 도움을 청하려 성지순례를 떠났습니다. 기도가 통한 것일까요. 장면은 성지에서 귀인은 만납니다. 그 뜻밖의 만남이 꼬이고 꼬인 매듭을 풀어 줄지를 누가 알았겠습니까. 호주 시드니 대교구의 오브라이언 부주교! 장면은 성지순례 중 우연히 만난 오브라이언에게 고민을 털어놓았습니다. 뭐 큰 기대를 했겠습니까. 그런데 그게 아니었습니다. 오브라이언과 에바트는 개인적으로 잘 아는 사이였습니다. 오브라이언은 에바트를 만나 장면의 고민을 전달하며 한국에 대한 특별한 관심을 요청했다고 합니다.
교황청은 이미 한국 지원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었습니다. 교황 비오 12세는 국무장관 몬티니 대주교와 주프랑스 교황대사 론칼리 대주교에게 한국을 지원하라고 특명을 내렸습니다. 지성이면 감천이라던가. 12월 12일 기적 같은 일이 벌어졌습니다. 한국에 비우호적이기만 했던 에바트 의장이 총회 마지막 날 마지막 안건으로 ‘대한민국 정부 승인의 건’을 공식 상정했고, 장면 대표에게 발언권도 준 것입니다. 장면은 유창한 영어 연설로 각국 대표단을 감동시켰습니다. 투표 결과는 ‘가결 48표 반대 6표’, 한국 안건이 압도적인 표 차이로 통과되었습니다. 옛 소련을 필두로 한 공산 진영의 방해 공작으로 한국 정부의 승인이 물 건너갈 뻔했지만, 한국 대표단이 ‘9회말 역전 홈런’을 친 것입니다. 미국의 트루먼 대통령은 1949년 1월 1일 대한민국 정부를 공식 인정하는 성명을 발표했습니다.
역사에 가정이 없다지만, 만약 그날 한국 정부가 유엔 승인을 받지 못했더라면 한반도 역사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상상만 해도 끔찍합니다. 3년 후 6.25전쟁이 터졌습니다. 한국은 풍전등화의 위기 상황에 몰렸습니다. 유엔군이 극적으로 참전하여 한국을 살렸지요. 한국이 유엔 회원국이 아니었다면 유엔군 참전이 가능했을까요? 1948년의 ‘파리 대첩’은 바로 호국의 토대였습니다.
미국 유학파인 이승만 대통령은 국제정세에 밝았습니다. 세계외교무대에서의 가톨릭의 위상과 교황청의 영향력을 잘 알고 있었지요. 이승만은 교황청과 가톨릭 네트워크의 지원을 겨냥, 독실한 가톨릭 신자인 장면을 특사로 선택했던 것입니다.
장면을 단장으로 한 특사단에는 조병옥 정일형 김활란 등 국제 감각이 뛰어난 해외파 지식인이 포함되어 있었고 시인 모윤숙도 있었습니다.
모윤숙의 회고는 당시 특사단이 얼마나 비장한 마음으로 임무 수행에 임했는지를 짐작게 합니다. 모윤숙은 가톨릭 신자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장면 단장을 수행하여 파리 성당에서 새벽 기도를 드렸다고 합니다.
12월 11일 밤 파리의 날씨는 몹시 사나웠습니다. 특사단은 비가 마구 퍼붓는 파리의 하늘 밑에서 국운을 걱정하며 밤을 지새워야 했습니다. 장면은 모윤숙과 함께 12일 새벽 3시 비를 맞으며 호텔 근처의 세인트 조셉 성당에 기도하러 갔습니다. 두 사람은 촛불이 켜진 성모상 앞에 경건히 무릎을 꿇고 거의 1시간 동안 기도했습니다. 장면은 아베마리아 성당에 가서 기도를 더 하자고 모윤숙에게 청했습니다. 모윤숙이 “장 박사님 저는 무릎이 아파서 도저히 따라가기 힘들겠어요”라고 말하자 장면이 “모 선생, 그래 큰일을 눈앞에 두고 그것도 못 참아 어떻게 하오”라고 다독였다고 합니다. 모윤숙은 장면의 인격에 다시 감동하여 결국 아베마리아 성당에 가서 약 30분 하느님께 기도를 드렸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