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던에서 보낸 1년
글 임안자 영화평론가
1980년 7월 중순에 우리는 다보스에서 바젤로 돌아온 뒤에 전에 살던 아파트에서 두어 달 살다가 다시 짐을 쌌다. 다음 목적지는 런던이었다. 다보스로 가기 전 어느 날 남편은 뜬금없이 ‘우리 런던으로 갈까? 얼마 전에 바젤 대학병원이 런던의 세인트 바르톨로뮈스 병원과 젊은 의사 교환에 합의하고 응모자를 찾고 있는데 만일 간다면 가을쯤일 것’이라며 나에게 어떠냐고 물었다. 나는 뜻밖의 희소식에 너무 기뻐서 서슴없이 갈 수 있으면 얼마나 좋겠냐고 대답했다. 내 긍정적인 반응에 남편은 그날로 바젤 병원에 신청서를 냈고 두어 달 지나서 교환 의사로 뽑혔다는 연락을 받았다. 런던과 의사 교환은 처음 있는 일이어서 경쟁이 심할 줄로 알았는데 놀랍게도 응모자는 딱 하나뿐이었다. 바로 남편이었는데, 왜 그런가 했더니 월급 차이가 40%나 되어 런던 쪽에서는 대환영이었던 반면에 바젤에서는 아무도 가려 하지 않았다. 우리는 경제적 불이익에도 불구하고 시어머니로부터 멀리 떨어져 살려고 망설이지 않고 런던 쪽을 택했다. 그리고는 9월 말경에 낡아빠진 러시아 자동차 “라다”에 짐을 싣고 마음을 졸이며 긴 여행길에 올랐다. 첫날은 하루 종일 프랑스를 횡단하다 칼레 항구에서 하룻밤을 잤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일찍이 선박을 타고 도버 해협(Dover Channel)을 건너 한 시간 반 뒤에 영국 땅 도보에 도착했다. 그런데 거기서부터 영국 특유의 관습인 오른쪽 운전이 시작되어 남편은 낯선 규율에 적응하느라 애를 먹었고 또 사고를 내지 않으려고 차의 속력을 늦추다가 시간을 빼앗겨 오후 늦게서야 드디어 런던에 도착했다. 런던의 우리 아파트는 “세인트 폴 성당의 근처인 “차르터하우스 광장”(Charterhouse Square) 한쪽 커다란 건물 안에 있었다. 흔히 ”의사(들)의 거주지‘로 불리는 그 건물은 전적으로 “세인트 바르톨로뮤스 병원”(St Bartholomew's hospital, 대개 “바르트”로 불림)에서 일하는 외국 출신 의사들을 위하여 특별히 세워졌다. 우리는 5층의 자그만 아파트에 살았는데 모두 외국인들로 이웃은 호주 이라크 그리스 등에서 온 의사들의 가족이었다.
아파트에서 가까운 거리에 있는 바르트는 영국에서 가장 오래된 병원으로 헨리 1세 시절 1123년에 세워졌다. 그리고 전통에 따라 ‘1년에 한 번씩 여왕이나 왕의 공식 방문이 있다고 했는데 남편은 여왕 엘리자베스 2세의 방문 때 소식만 들었지 직접 보지는 못했다. 그 밖에도 바르트는 교육 병원으로서 런던 대학의 ”여왕 매리 컬레지“와 협력하며 행정관리는 ”전국 건강 서비스“(National Health Service, NHS)에서 주관했다. 위의 조직체는 2차대전 후 영국 정부에서 국민 모두가 무료로 치료를 받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만든 것으로서 80년대 초까지만 해도 시민들, 특히 빈곤층의 건강 유지와 보호에 줄곧 앞장서 왔으나 그 뒤로는 대처 정부의 신자유주의 경제 정책으로 말미암아 점점 위기에 빠져들어 갔다.
런던은 나에게 새로운 곳이었다. 남편은 나를 사귀기 전에 영국 애인을 만나러 몇 번 들린 바 있어 전혀 낯설지 않았지만 외국 생활은 그게 처음이었다. 그의 병원과의 계약은 1년으로 전 기간 동안 내과 분야에서 인턴 과정을 밟았다. 월급은 예상했던 대로 스위스에 비해 거의 반절이 줄었지만 아파트 전세, 먹을거리, 교통비 등 일상생활에 절대 필요한 것들은 일반적으로 싼 편이어서 그런대로 견딜 만했다. 사실 남편의 직장 생활은 낮은 월급에다 매끄럽지 못한 영어로 편하지 못했으나 그는 ‘의술과 경영에 대해 배울 게 많아서 바르트에 오길 잘했다’며 상당히 만족스러워했다. 남편은 바르트 의사들이 의료기와 약품 사용에 있어 스위스 의사들보다 훨씬 신중하고 자제를 함으로써 약 처방과 검사의 회수와 수량이 스위스에 비해 눈에 띄게 낮다는 점에 주목했다. 그리고 치료의 유효성에 상관없이 무조건 비싼 첨단기술에 매달리지 않음으로 환자들의 부담을 줄이는 경영 방식도 마음에 들어 했다. 이래저래 바르트에서 얻은 색다른 경험은 그가 런던 이후에 바젤대학병원을 빨리 그만두고 개인병원을 차리는데 직접적인 동기 부여가 됐으며 경영 면에도 유효했다.
내 경우, 런던에 정착하고 며칠 지나서 나는 아파트 근처에서 우연히 바르트에서 영양사로 일하는 호주 출신의 젊은 여인을 만났다. 그리고 그녀의 도움으로 일주일 뒤에 4살짜리 현을 손쉽게 “세인트 레어나르드 보육원”(St Leonards Nursery School, 다음부터 보육원)에 보낼 수 있었다. 그녀의 두 애들이 다녔다는 보육원은 런던시의 한복판에 펼쳐져 있는 “코람 들판”에 있었으며 들판 안에는 18세기 중반에 세워진 “아동복지사업 선구자 토마스 코람 재단”의 자선 단체에서 운영하는 병원과 간호학교 그리고 보육원이 함께 붙어있었다. 1930년에 열린 보육원은 널따란 놀이터와 조그만 동물원까지 갖춘 대형의 조직체로 백여 명의 어린이들을 수용하고 있었으며 모두 코람 재단과 런던 의회에서 공동으로 운영했다. 우리 애들은 20명으로 짜진 조그만 반에 들어갔다. 그리고 아동교육 분야의 전문인 여성 서넛이 아침 8시에서 12시까지 아이들을 돌봤는데 놀랍게도 모든 게 무료였다. 보육원은 3살부터 들어갈 수 있었기에 딸 미자는 반년을 더 기다려야 했으나 50대의 친절한 여보육원장은 내가 곁에 있으면 괜찮다며 미자를 앞당겨 받아줬다. 그러므로 나는 월요일에서 금요일까지 현과 미자 곁에서 영어를 도와주고 같이 놀면서 반년 동안 보육원에서 반나절을 보냈다. 애들은 몇 달이 지나자 바젤 말(독일어 방언)에다 떠듬떠듬 영어를 뒤섞어가며 보육원의 애들과 뭉쳐 다니며 잘 놀았고 그중에 한 녀석은 바로 우리 아파트 옆에서 살고 있어 금방 친구가 되었다. 우리 애들에게 재미있는 놀이터였던 세인트 레어나르드 보육원에 대해 쓰려니까 언뜻 1981년 여름에 영국을 들끓게 했던 찰스 왕자와 평민 출신 다이애나의 결혼식이 떠올랐다. 그날 보육원에서는 왕자의 결혼식을 축하는 뜻에서 예쁘장한 동전을 특별히 만들어 아이들에게 기념품으로 나눠주고 학부모들을 보육원에 초청하여 커피와 케이크를 대접하며 얼추 잔치 분위기를 띄웠다. 그러나 한동안 대중과 매체로부터 ‘동화와 같은’ 또는 ‘20세기의 결혼’으로 극찬을 받던 왕자의 결혼은 알다시피 얼마 못 가서 비참하게 끝났다. 그럼에도 싱그럽던 보육원의 결혼 축하 파티 분위기는 40여 년이 지난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