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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1 | 연재 [임안자의 꿈꾸는 인생]
스위스에서 50년, 스위스에서 산다는 것 (25)
런던에서 보낸 1년
임안자 영화평론가(2022-01-11 13:38:42)

런던에서 보낸 1


나는 런던이 아주 마음에 들었다. 우선, 런던에 뒤로 시어머니를 보지 않고 듣지 않아서 마음이 한결 편했다. 그리고 애들이 보육원에 다니면서부터, 특히 미자가 살이 되면서 오전은 고스란히 나만의 시간이 되었다. 아침에 나는 애들을 보육원에 데려다준 자동차는 그곳에 남겨두고 시내 구경을 나섰다. 처음엔 걸어서 근처의 영국 박물관에 들리다가 시내의 지리에 익숙해지자 지하철을 타고 코벤 가든의 상점과 예술 갤러리들, 소호 지역의 중국 상가들, 토텐함 코트 로드의 책방들을 돌아다녔다. 그러다 런던 생활이 반년 지날 무렵에 영국의 영화전문 월간지사이트 앤드 사운드” (Sight & Sound) 읽기 시작하면서 자연스레 국립영화관 (National Film Theater, BFI SouthBank 전신) 프로그램에 관심이 쏠렸다. 낮에는 애들 때문에 어려워 주로 저녁 시간을 이용하여 영화를 보았고 남편이 동안 야간 근무를 적에는 아파트 근처의 필리핀 여자 유학생이 대신 애들을 돌봤다. 교통도 자동차로 워털루 다리(Waterloo Bridge) 남쪽 끝과 템스강이 맞닿은 곳에 있는 국립영화관까지 아파트에서 20분이면 닿는 거리여서 저녁 늦게까지 편하게 영화를 있었다. 


사실 결혼 이후 줄곧 애들과 가정생활에 묻혀 사느라 영화 기회가 별로 없었다. 그러다 우연찮게 런던에서 영화와 다시 가까워진 셈인데 국립영화관의 프로그램이 다양하고 폭이 넓어서 영화에 대한 관심을 부추기에 충분했다. 특히 신문학 시절에 이론으로만 배웠던 영화들을 영상으로 보는 재미가 쏠쏠했다. 예를 들어 50년대 프리 시네마(Free Cinema) 대가들인 토니 리차드손의분노에 뒤돌아봐”(Look Back in Anger, 1956), 카렐 라이즈의우리는 람베트의 소년들”(We Are the Lambeth Boys,1958) 그리고 70년대 새롭게 떠오르던 로치 감독의가족생활”(Family Life, 1971) 등을 드디어 영상으로 있었는데 모두 전후 영국 사회 빈곤층의 삶을 다큐멘터리 형식으로 파헤친 걸작들이었다. 로치 감독에 대해서는 한국의 초기 영화전문지였던 월간지映畵藝術”(영화예술) 1991 7월호에 글을 썼다. 영국 말고도 그곳에서 나는 처음으로 이집트의 유세프 샤힌과 세네갈의 우스만 셈벤 감독들의 회고전을 보고 그들의 강연도 들었다. 1995년에츄리히 필름 포럼에서 계획한 우스만 셈벤 회고전에서 감독을 직접 만나 인터뷰를 했는데, 그가 두어 시간에 걸쳐 차분히 들려준 세네갈의 영화에 대한 해명은 세네갈 뿐만 아니라 서부 아프리카 영화에 대한 이해를 높이는데 커다란 도움이 됐다. 그리고 러시아 혁명기의 명작 세르게이 에이젠슈타인의전함 포템킨 강의 시간에 몇몇 장면만 보다가 런던에서 전면으로 봤다. 다만 런던에서의 상영은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가 영화를 위해 작곡한 음악이 빠졌었는데, 뒤에 나는 바젤교향악단이 연주한 쇼스타코비치의 원작을 들으면서전함 포템킨 완벽하게 기회를 가졌다. 여기에 한마디 덧붙이면, 2016년에 나는 전주국제영화제서전함 포템킨 특별 프로그램으로 소개했다. 그러나 모스코바 영화아카이브에서 보낸 재료에는 런던에서처럼 쇼스타코비치의 음악이 들어있지 않아 너무 실망스러웠다. 


아무튼 국립영화관에서 숱한 영화 가운데 가장 관심을 끌었던 프로그램은 일본의 쿠로사바 아키라 감독의 회고전이었다. 동양 영화가 아주 드물기도 했지만 역시 신문학 시간에 깊은 인상을 받은라쇼몽”(Rashomon) 대한 호기심에 자극을 받아 대여섯 편을 봤는데, 그걸 계기로 나는 나중에 쿠로사바의 작품을 바탕으로 신문학 졸업 논문을 썼다. 참고로, 1957년에 세워진 국립영화관은영국 영화 연구소 속하며 앞에서 말했듯이 전통적으로 고전에서 현대에 이르기까지 영화 역사에 중요한 세계 각처의 대작들을 지속적으로 보여줌으로 영화 애호가와 전문인들에게는 시네마 천국으로 불리고 있다. 더불어 1956년에 태어난 런던국제영화제가 국립영화관에서 해마다 열리고 있다. 

  


런던에서 우리는평생 친구 쌍의 부부를 만났다. 한쪽은 보육원에서 우리 애들과 같은 반에 있는 리안의 부모였고 다른 쪽은 우리 아파트 옆에 사는 호주 출신의 의사 가족이었다. 리안의 부모인 애드리엔과 존은 우리 보다 1 앞서 남아프카에서 런던으로 이민 유대인들로 미자의 생일잔치를 계기로 애드리언과 가까워지면서 남편들도 친구가 됐다. 차르터하우스 광장 건너편의 바비칸 센터에서 살던 그들과 우리는 자주 저녁에 같이 식사를 하면서 위스키에 곁들여 세계의 정세, 특히 세계 경제의 상황에 대해 밤이 늦도록 말을 나눴다. 원래 남아프리카 요하네스버그에서 변호사로 활동하던 존은 애드리엔에게 약혼 선물로 고급 스포츠카 페라리를 선물할 정도로 한때는 부자였다. 그러나 그들은 원주민의 지도자 넬슨 만델라의 열렬한 지지자들로 백인 정부의인종 차별 정책 오래 저항하다 애들의 교육을 위해 하는 없이 런던으로 삶터를 바꿨다. 그러나 이민의 대가는 처참했다. 자산을 나라 밖으로 옮기지 못하도록 있는 남아프리카의 이민법 때문에 그들은 엄청난 경제적 손실을 감수해야 했다. 우리가 만났을 존은 어느 목재 수입회사의 변호사로 벌은 월급으로 그럭저럭 살면서 경제 전문지에 프리랜서로 세계 경제의 흐름에 대한 글을 쓰고 있었다. 그리고 프랑스어를 전공한 애드리엔은 역시 집에서 심심풀이로 애들을 위한 글을 썼다. 엄마가 부엌에서 자신이 만드는 음식 재료의 출처와 다양성을 애들에게 가르치는 내용인데, 그게당신들 부엌안의 세계”(World In Your Kitchen) 이름으로 출간되고 짧은 시간에 (한국어를 포함한) 여러 나라말로 번역되면서 작가로 성공했다. 밖에도 그녀는 가족과 시회로부터 버림받고 소외된 어린이들의 교육 문제에 대해 권의 책을 펴냈으며 그로 인해 정부로부터 분야의 전문가로 인정을 받아 지금은전국 젊은이들 직업컨설팅 총책임자로 활동하면서 중학교 학생들에게 강의를 하고 있다.


호주에서 부부 메리디와 샘은 우리보다 상당히 젊었으나 말이 통하고 열린 자세가 마음에 들어 쉽게 친구가 됐다. 우리는 그들이 자주 다니는 차이나타운에서 자주 중국 음식을 먹고 주말이면 애들을 데리고 런던시의 공원이나 시외로 빠져 산보를 했다. 그리고 때로는 저녁에 애들이 잠들면 그들한테로 가서 샘이 퉁기는 기타를 듣고 맥주를 마시면서 영국의 사회 문제, 특히 보스파의 수상 마거릿 대처의 노동조합에 대한 강경 노선의 정책에 대한 불만과 비판을 토했다. 메리디와 샘은 연극을 몹시 좋아했다. 나는 그들 덕분에 늦게나마 연극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는데 스위스에서 기회가 없었던 아니지만 언어에 자신 없어서 연극 보는 아예 포기하고 살았었다. 그러다 그들의 부추김에 이겨 말로만 듣던 유명한 셰익스피어 연극단이 연출하는베니스의 상인 봤는데 초보자에 불과했지만 감동이 컸다. 영어가 독일어보다 쉬어서 그랬을지도 모르지만 극의 텍스트를 이해하는데 그다지 어렵지 않아서 연극에 대한 거리감이 없어졌다. 그리하여 런던을 떠나기 전에 젊은 단체들이 연출한 체호프의 자매그리고 지금은 기억할 없는 아일랜드의 젊은 작가의 연극을 봤는데 보면 볼수록 나는 영국 배우들의 뛰어난 연기와 매력적인 영국식 발음의 영어에 끌려들었다.     



런던을 떠난 우리는 사이에 호주로 되돌아간 메리디와 샘을 찾아갔다. 원래 멜본 출신인 그들은 귀국 오스트렐리아 중북부의 연방 직할지역(Northen Territory) 수도 다르빈에서 살고 있었다. 샘은 원주민이 집중적으로 살고 있는 곳에서 1 치료 담당의 가정의사로 일함과 동시에 가정 의사 양성과 다르빈에서 떨어진 지역의 원주민들 의료 보호의 책임자로 활동했다. 그리고 대학에서관광 산업과 원주민 전공한 메리디는 애들을 키우면서 원주민 박물관의 책임자인 친구를 도와주고 있었다. 원주민들의 삶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던 우리는 샘을 통해 그들이 처해있는 현실적인 문제점에 대해 많은 알게 되고 남편은 샘의 가정 방문에도 동행했다. 밖에도 우리는 메리디의 안내로 예술박물관과 갤러리에서 원주민들의 예술품을 보고 그림도 하나 샀다. 샘은 런던에서처럼 여전히 기타에 열성이었다. 그는 몇몇 의사 친구들과 함께 밴드를 만들어 해마다 여름에 해변가에서 음악의 밤을 열었는데 마침 우리의 방문 시기와 맞아떨어져 우리도 비틀스, 말리의 음악과 재즈를 들으며 원주민들과 함께 흥겨운 분위기에 휩쓸려 아름다운 시간을 보냈다.  


런던에서 보낸 년은 우리에게 삶에 대한 새로운 용기와 꿈을 안겨준 아주 귀중한 시간이었다. 그리고 곳에서 우리는 좋은 친구들을 만나고 많은 보고 배우면서 부지런히 그리고 열심히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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