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이 발명해낸 새로운 관계의 자리
글 김경태 영화평론가
베스트셀러 소설가인 ‘김현(류승룡)’은 7년째 신작을 못 내면서 출판사의 압박에 시달리고 있다.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는 그는 이제 ‘작가님’보다는 ‘교수님’으로 불리는 데 익숙하다. 어느 날, 아름다운 외모를 지닌 소설가 지망생 ‘유진(무진성)’이 나타나 술에 취해 다짜고짜 김현에게 사랑 고백을 한다. 그는 커밍아웃한 게이로, 김현의 동료인 게이 작가 ‘남진(오정세)’과 동거를 하는 중이었다. 김현의 수업까지 들으면서 지속적으로 구애를 한다. 김현은 유진이 건넨 ‘날이 서 있는’ 습작을 읽고, 잃어버린 창작욕을 되찾게 된다.
김현은 상대방의 감정을 생각하지 않는 사랑 고백은 폭력이라고 말하며 유진에게 노골적으로 거북함을 드러낸다. 공동 집필을 위해 어쩔 수 없이 유진의 집에서 동거 생활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는 자신이 줄곧 여자랑만 잤다는 사실을 강조하며 유진의 성애적 접근을 경계한다. 김현에게 있어 불편한 것은 사랑 그 자체보다는 동성 성애이다. 그 역시 성애적으로 과잉되어 있는 동성애에 대한 편견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유진이 커밍아웃했을 때 아버지가 대답 대신 건넨 김현의 소설을 읽고서 사랑에 빠졌다고 말했을 때도, 김현은 애써 동경이나 위로의 감정을 착각한 것이라고 그 사랑을 부정한다. 이번에는 그 사랑을 ‘젊은 남자’가 ‘늙은 남자’에게 느낄 수 있는 기존의 익숙한 감정들로 대체하고자 애쓴다. 이처럼 김현은 동성애를 둘러싼 오해와 회피라는 관성적 접근들로 유진의 사랑을 왜곡하면서 그 사랑을 날 것 그대로 마주하지 못한다. 반면에 유진은 단호하게 끝까지 김현을 향한 마음이 사랑이라고 확언한다. 그런 그와 제대로 마주하기 위해서는 자신을 비워낼 용기가 필요하다.
김현에 대한 유진의 사랑은 유진에 대한 남진의 집착과 대비된다. 질투에 눈이 먼 남진은 자신의 소설을 ‘싸구려 게이 정서’라고 평가한 ‘동성애혐오적’인 김현이 정작 게이인 유진과는 동거를 통해 공동 집필을 했다며 그의 이중적인 잣대를 비난한다. 그로 인해, 김현과 유진의 관계가 구설수에 오르게 되고, 유진은 김현을 지키기 위해 방송까지 출연하며 진실을 말한다. 그런데 게이 소재를 다룬 소설을 폄하했다고 해서 동성애혐오자라고 단정 짓는 것은 너무 성급하다. 김현이 비판한 것은 게이 정체성이 아니라 게이를 감상적으로 소비하는 방식이었다. 그 지점은 유진도 동의하는 부분이었고, 궁극적으로 남진을 떠난 이유가 되었다.
마침내, 김현은 유진과의 공동 집필을 통해 새로운 관계의 가능성을 발견한다. 나아가 문학의 주요한 기능이 바로 그 관계성의 성찰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에게 유진은 문학 그 자체였다. 영화의 마지막. 만우절인 4월 1일 하루 동안만 존재하는, 리투아니아의 ‘우주피스 공화국’에서 김현과 유진은 다시 조우한다. 유진은 관습적인 사랑을 넘어 자기만의 사랑 방식을 발명한다. 그는 김현을 향해 다시 한번 사랑한다고 말한다. 김현은 정색을 했다가 이내 익살스럽게 웃어넘긴다. 그 웃음은 유진의 사랑 고백에 대한 긍정적인 호응이다. 물론 그를 기꺼이 동성 연인으로 받아들인다는 뜻은 아니다.
김현은 유진의 사랑을 받아들이기 위해 새로운 관계의 영역을 상상한다. 그것은 비록 낭만적인 연인 관계는 아니지만 인간적 신뢰와 문학적 교감에 기반한 충분히 깊고 친밀한 관계이다. 유진의 반복적 사랑 고백은 관계의 새로운 자리를 만들어낸 것이다. 사랑의 본래적 힘은 규범적 관계 안에서 작동할 때가 아니라 그것을 위반하고 전복할 때 비로소 발휘된다. 사랑은 특정한 관계 안에서 길들여지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새로운 관계를 생성하기 때문에 더없이 강렬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