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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1 | 연재 [이휘현의 숨은 책 좋은 책]
김현 <행복한 책읽기>
이휘현 PD(2022-01-11 13:47:00)



김현 <행복한 책읽기>


이휘현 KBS전주 PD



그해 여름밤, 전북대 새날서점, 문을 열고 들어서면 보이는, 진열장을 빼곡하게 메우고 있던 책들, 이곳저곳에서 터져 나오던 날선 문장들의 소리 없는 아우성….

삼십 가까운 시간의 복도를 거슬러 올라 기억의 빗장을 풀면, 아득한 추억의 서재 한구석에 꽂힌 권에 젊은 날의 손길이 머문다. 

그때, 스무 살이었던 나는, 낯선 책에서 그리도 시선을 없었을까. 저자의 이름도 제목도 모두 생소했던 그곳에, 나는 청춘의 그늘을 의탁하고자 했던가.

여전히 이유는 또렷해지지 않고 있으나, 그리워라! 하나만으로도 생의 의지를 활활 태울 있었던 날들이여. 그리하여 나는 쓴다. 시간의 마모에 옅어가는 황홀한 독서체험의 한순간을.


삶이 아름다울수록, 죽음의 원통함은 절실하다. 

  - 김현, <행복한 책읽기>, 41-



김현이라는 고유명사는 나에게 처음부터죽음 어두운 이미지로 손을 내밀었다. ‘1942-1990’이라는, 그의 이름 곁에 괄호로 묶인 생몰년이 스무 살의 나를 압도했던 것이다. 우리 나이 셈으로 마흔아홉. 그리 길다 말할 없는 삶의 연대기를 스쳐 그가, 죽기 전부터 죽음의 예감에 사로잡혀 써내려 갔던 일기는, 하필책읽기 기록이며, 그것도 굳이행복한이라는 어울리지 않는 수식어를 붙였더란 말인가. 

역설적이게도 납득할 없는 형용모순이 나를 그의 책으로 이끌었다. 알지 못하는 수많은 저자들의 이름과, 또한 도저히 이해되지 않는 문장들과 의미들 사이에 튕겨나면서도 나는 끝끝내 책을 붙들고 늘어졌다. 뭐라 규정지을 없는 뜨거운 독서체험이 그렇게 끝나자, ‘김현이라는 이름은 어느새 흠모의 대상이 되어 있었다. 

삼십 가까운 시간 동안 <행복한 책읽기> 페이지 곳곳에 여러 차례 지문이 닿았다. 막막한 앞날이 두려울 , 사랑을 잃고 청춘이 휘청거릴 , 아무것도 해낼 없다는 무기력에 시달릴 , 나는 그가 남기고 글에 의지했다. 눈에 띄는 것들은 다시 음미하며 줄을 쳤다. 그렇게 문장에 쳐놓은 빨간 줄이 늘어갔다. 앞으로도 늘어갈 것이다.


서울대 불문과 교수, 한국 문단에 위세를 떨치던 문학평론가(혹은 문학권력!), 여자의 남편이자 아들의 아버지로서 남부러울 없는 삶을 살던 그에게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 아마도 1980년대 중반 즈음이 아니었나 싶다. 몸속에 생겨난 암세포 앞에 무력한 자신을 붙들고 그는 유서를 남기듯 일기를 써나가기 시작했다. 

일기는 특이한 것이었는데, 사실 일기라는 자체가 개인의 가장 내밀한 고백을 담은 방식의 글쓰기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애초에 일기를 남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썼기 때문이다. 1985 12 30일에 시작된 일기는 1989 12 12일에 끝난다. 그는 4년의 일기를 컴퓨터 자판으로 정성스레 가다듬어 제자인 소설가 이인성에게 맡겼다. 그리고 반년 그는 세상을 떠났다. 그렇게 일기는 그의 유고집이 되었다. ‘행복한 책읽기라는 제목은 그가 손수 정했다 한다. , 죽어가면서 행한 독서가 행복했다니! 그는 천생 읽고 팔자를 타고난 사람이었을까.


김현의 일기는 다채로운 내용을 담고 있다. 주변의 신변잡기에서 시작해 영화를 비롯한 대중문화 이야기 등등. 하지만 압도적으로 많은 분량은 문학 그것도 한국문학에 할애되어 있다. 문학평론가로서의 본분을 다하듯 1980년대 중후반 당대의 다양한 시와 소설이 그의 비평대에 올라 신랄한 비판과 칭찬 세례를 받고 있다(칭찬보다는 쓴소리가 월등히 많다!). 

일기를 통해 우리는 한국문학의 시대를 조망할 있는 수혜를 누린다. <태백산맥> 연재 중이던 조정래, 아직 완간이 <토지> 박경리, 한국시의 새로운 경향을 논쟁적으로 시연한 황지우, 보수 논객으로서의 면모를 서서히 가다듬어 가던 이문열 복거일 등등. 이제는 각자 거장의 자리에 올라선 수많은 작가들의 당대 상황이 1980년대 중후반의 시대 안에서 김현의 치열한 독서 결과물이 되어 독자들과 해후한다.  

이런 면모만 보면 이건 마치 일기를 가장한 하나의 비평서에 다름 아닌가 하는 생각이 기도 한다. 하지만 하나의 문학평론집으로서 책을 규정하기에는, 일기라는 내밀한 글쓰기 형식을 통해 김현이 보여주고자 했던 생각의 품이 매우 넓고 깊다는 점에 주목하자. 단순히 누군가들의 책을 읽고 비평하는 것에 그치지 않는 대신, 김현은 그의 손이 닿은 텍스트들을 통해 당대의 집단 무의식을 읽고 또한 시대정신과 자신의 생각이 가진 수많은 틈과 모순들을 진솔하게 드러냈다. 김현은 치열하게 싸웠음에 틀림없다. 싸움의 열기는 그가 일기를 써나가던 1980년대 중후반을 넘어 지금 시대에도 특유의 온기로 공명한다. 그게 책이 가진 마력일 것이다.

명문대 교수라는 주류의 타이틀과 전라도 사람이라는 비주류의 자의식 속에서 그는 굳이 자신의 정체를 어느 곳에 숨기려 하지 않았다. 주류와 비주류 사이의 경계인으로서, 그는 끊임없이 사유하며, 읽고 써나갔다. 1980 광주의 역사를 무척이나 가슴 아파했지만, 광주가 낳은 80년대의 도그마를 그는 경계했다. 서구에서 넘어온 수많은 수입 이론들을 치열하게 파고들었지만, 마음 한구석에서는 주변부 지식인으로서의 자의식을 붙들고 우리 학문의 고유성을 고민했다. 김현은 그런 사람이었다. 단순히 명의 문학평론가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시대를 사유한 철학자이자 사상가로서의 그의 면모가 행간 곳곳에 포진되어 있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보자면, <행복한 책읽기> 그가 독서일기라는 형식을 빌려 세상에 조심히 꺼내놓은김현 철학 총체가 아닐까 싶다. 책이 발간된 어느새 30 가까이 되었지만, 안에 스며든 그의 사유들은 여전히 푸르른 청춘이다. 그가 살아생전 얼마나 치열하게 생각을 가다듬고 가다듬었는지, 책을 처음 접했을 스무 살이었던 내가 서른이 되고 마흔과 가까운 나이가 되어가면서 거듭 읽어간 숫자만큼 감탄의 부피가 늘어가는 놀라운 사실이 이를 증명할 것이다.

김현의 <행복한 책읽기> 여전히 좋은 책이다. 세월이 많이 흘렀다는 이유로, 이제 김현이라는 이름을 기억해주는 사람들이 적다는 이유로, 책이 숨어있을 이유는 없다. 좋은 책은 다시 꺼내 들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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