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번과 동일하거나 더 나쁘지 않기 위하여
글 문신 시인, 우석대 교수
올해도 새해 벽두에 백여 명의 신진 작가들이 탄생했다. 예전 같지 않다는 말들도 많지만, 여전히 신춘문예는 예비 문인들에게 중요하고 의미 있는 행사이다. 심사평을 보면 응모자는 예년보다 늘었거나 비슷하고, 응모자의 질적 수준도 해마다 상승 곡선을 그리는 것으로 판단된다. 의례적인 수사나 다소의 과장이 섞였더라도 대단한 일이다. 예비 작가의 솜씨가 그러하다고 하니 치열한 경쟁을 이겨내고 당선한 작품은 말할 필요도 없을 것 같다. 그러함에도 마음 어딘가 개운하지 않은 맛이 있다. 예비 작가가 늘고 작품 수준이 높아진다고 하는데 어째서 문학의 위기 담론은 계속되고 있을까?
문학의 위기 또는 문학의 죽음에 관한 이야기는 사회역사의 발전 과정에서 필연적이었다. 문학적 글쓰기는 문자 매체가 도달할 수 있는 가장 완성된 표현 형식이었다. 문자 시대에 가장 세련된 문자 표현 장르였던 문학이 세력을 펼칠 수 있었다. 하지만 영상 매체가 우리 삶을 표현하기 시작하면서 문자는 위축되었고, 덩달아 문학의 위상도 예전 같을 수 없게 되었다. 반면 영상 문법은 나날이 새로워지면서 영상을 구현할 도구의 기술적 발전은 상상을 초월하고 있다. 문자의 표현 매체가 책에 갇혀 있는 동안, 영상은 스마트 기기를 통해 발 빠르게 우리 삶을 포위해버렸다. 이런 상황에서 문화체육관광부가 발표한 ‘2021년 국민 독서실태’ 조사 결과는 뜻밖(?)이었다. 2020년 9월부터 2021년 8월까지 성인의 평균 종합 독서량은 4.5권이며, 이 결과는 2019년에 비해 ‘고작’ 3권밖에 줄지 않은 것이다.
아이러니의 세계
독서 인구는 줄어드는데 작가 지망생이 꾸준히 증가하는 현상은 분명 이례적이다. 게다가 글쓰기에 관심이 높아지고 자기 책을 출판하는 일이 유행하면서 문자 매체가 주목받는 일도 새삼스럽다. 인문학적 사유와 통찰이 중요하다고 떠드는데, 정작 문학·사학·철학의 학문적 위상은 거꾸로 가는 현상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이런 생각의 바닥에는 인문학이 중요한 건 알겠지만, 그것이 내 삶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건 아니라는 판단이 있을 것이다. 이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문학은 오랫동안 여분의 세계였으니까. 그리고 이 말에는 인문학의 중요한 속성이 감추어져 있다. 곤핍하고 각박한 세태에서 문학은 숨을 죽일 수밖에 없다는 것. 이것이 보편적 생활인의 먹고사니즘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그건 잔인한 아이러니다. 문학은 우리 삶의 곤핍을 겨냥한 사유이고, 시대의 각박을 견뎌내는 힘이라는 점에서 그렇다.
문학은 세계의 비참에 주목하고 비참 속에서도 독자에게 한 줄기 빛을 주는 예술이라고 알고 있다. 따지고 보면 우리 삶이 곤혹해졌을 때 문학은 가까이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문학에 사망 선고가 내려진 지금, 세계는 더 이상 비참하지 않고 우리 삶도 곤혹하지 않은 것일까? 선뜻 동의하기 어려운 물음이다. 과거에 비하면 물질적으로 풍요로워진 건 사실이지만, 양적 성장이 우리 삶의 질적 만족도를 보장하지는 않는다. 문학은 우리 삶의 빈틈, 정확히 말하자면 곤핍과 각박이 자랄 수 있는 비참한 순간을 파고든다. 드물지만 사람 사는 세상에 그런 빈틈은 언제나 생겨나기 마련이고, 눈썰미 좋은 작가라면 찰나의 순간을 놓치지 않을 테니까.
나는 이러한 문학의 방법을 예외 상태를 향한 도전이라고 생각한다. 일상의 비참한 순간은 언제나 예외적으로 발생한다. 아니, 우리 스스로 그 순간을 예외적이라고 믿는다. 곤혹과 각박이 예외 아닌 일상이 되는 일은 상상만으로도 견딜 수 없다. 가끔 예외적인 순간을 견딤으로써 우리는 일상을 회복할 수 있고, 일상의 가치를 새삼 깨닫는다. 문학을 비롯한 예술의 역할 가운데 하나가 바로 그런 것이다. 예외적 순간을 강렬하게 포착하고 형상화하여 무난한 일상을 가치 있는 순간으로 만드는 것. 문학은 예외 상태를 예외 아닌 상태처럼 보여주는 힘이 있고, 예외 아닌 사람들에게 예외 상태를 경험하게 해준다. 이것이 내가 아는 한, 문학의 가장 아름다운 역할이다.
예외적 삶과 문학
지금까지 문학을 둘러싼 아이러니를 이야기한 건 나 스스로 오랫동안 예외적 인간의 출현을 기다려왔기 때문이다. 그런데 최근 몇 년 동안 우리 지역에서 배출한 신인 작가를 찾아보기 어려웠다. 매년 서너 명씩 배출하던 신춘문예 당선자가 뜸해진 것은 물론, 지역 일간지 신춘문예 당선자 또한 줄곧 다른 지역 출신이었다. 이런 현상을 이야기하는 건 지역적 감성을 협소하게 피력하려는 게 아니다. 전북의 문학 생태에 관심을 보이기 위해서다. 일반적으로 생태의 조건은 토대와 개체 그리고 개체의 사슬 구조를 필요로 한다. 숲(토대)에서 살아가는 생물(개체)과 각 생물 사이에 발생하는 포식의 순환이 원활한 상태가 되어야 우리는 건강한 생태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전북의 문학 문화의 생태는 어떨까? 감추어진 속내까지는 모르더라도, 젊은 작가가 드물다는 것, 전국적인 인지도를 갖춘 작가를 찾기 어렵다는 것, 시 중심의 창작 풍토와 비평 담론의 부재 같은 눈에 띄는 몇몇 아쉬운 대목은 지나칠 수 없다. 그러나 내가 주목하고 있는 것은 전북 문학 문화의 활력이다. 작가와 작가, 작가와 독자의 교류를 말하는 게 아니다. 매년 출간되는 지역 작가의 책을 말하고 싶은 것도 아니다. 전북의 작가들에게 문학적 새로움을 향한 도전을 말하고 싶은 것이다. 이러한 도전은 노력의 영역이 아니라 용기의 영역이다. 기존의 창작 방법을 폐기할 줄 아는 것도 용기에서 비롯하고, 지금껏 아무도 가보지 않은 길에 나서는 일은 용기의 문제다. 용기 없는 문학은 감흥도 감동도 만들어내지 못한다.
용기를 말하는 이유는 나 스스로 부끄러웠던 순간을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다. 수년 전, 시를 쓰는 후배로부터 이런 말을 들었다. 촌스러운 시는 그만 써도 되잖아요. 무심코 들어넘긴 말이 지금은 때때로 나를 괴롭힌다. 후배가 말한 촌스러운 시는 과거에 머물러 있는 시였다. 그 후로 나는 거의 매일 내 글쓰기를 반성한다. 여전히 십 년 전에 머물러 있는 건 아닌지, 어제 쓴 글과 달라진 곳이 있는지. 다른 작가의 신간이 나왔다는 소식이 들리면 그 작가의 이전 책을 먼저 찾아보는 습관도 생겼다. 어떻게 변했는지 궁금한 까닭이다. 사소한 변화를 만들기 위해 불우했을 각고의 시간을 느껴보고 싶어서다.
‘촌스러운 시’를 쓰지 않기 위해 나는 위대한 피아니스트 스비야토슬라프 리흐테르의 말을 항상 마음에 새겨둔다. 그는 한 음반을 두고 이렇게 적었다. “이미 한 번 들은 적이 있는 녹음이다. 이번에 내가 받은 인상은 지난번과 동일하거나 더 나쁘다.” 나는 그의 말을 이렇게 고쳐 들었다. 지난번과 동일한 건 지난번보다 더 나쁘다. 오늘의 나는 분명 어제와 다른 존재다. 그러니 오늘도 어제처럼 썼다면 그건 돌이킬 수 없이 나빠진 것이다. 이건 개인의 고뇌이지만, 전북의 문학 문화가 함께 생각해봐야 한다고 여긴다. 문학이 위기라고 말했다면, 어제의 문학에서 발을 빼야 한다고도 말할 수 있어야 한다. 다만, 어제에서 회수한 우리의 발을 어디에 디뎌야 할지는 숙고가 필요하다. 그러나 당장은 촌스러운 문학에서 용기 있게 발부터 빼자. 어제처럼 사는 삶은 예외적일 수 없고, 전혀 문학적이지 않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