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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2 | 연재 [로마의 향기, 바티칸의 숨결]
황사영이 아직도 국사범?
이백만 전 주교황청 한국 대사(2022-02-09 14:30:46)


황사영이 아직도 국사범?

이백만 주교황청 한국 대사, 한국방송광고진흥공사 사장



숨이 멎어버릴 것만 같았습니다. ‘황사영 백서 여기에 이렇게 있었구나! 순간 배론 성지(충북 제천) 토굴이 생각났고, 거열형으로 목과 팔다리가 찢겨 죽어가는 황사영(1775~1801) 모습이 떠올랐고, 그분의 가족들이 맞은 풍파가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습니다. 


2020 2, 바티칸 민속박물관을 찾았습니다. 관리책임자인 마펠리 신부의 안내를 받아 고문서연구실에 들어갔더니, 백서가 책상 위에 놓여 있었습니다. 중고등학교 역사 시간에 알았던 황사영, 만고의 역적(국사범)으로만 기억했던 황사영, 천주교 신앙을 위해 목숨을 초개처럼 던진 진정한 신앙인 황사영 알렉시오! 저는 황사영을 그가 죽은 200 년이 지나 바티칸에서 만났습니다. 착잡하더군요. 황사영도 황사영이지만, 사건 이후 그의 가족이 겪은, 형언할 없는 고초를 생각하면 모골이 송연해집니다. 부인(정난주) 제주에서 관노비로 살아야 했고, 살배기 아들(황경현) 추자도에 유배되고….


황사영이 아직도 국사범인가요? 그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달라져야 하지 않나요? 저는 황사영을 생각할 때마다 박정희 시대와 전두환 시대, 민주화 운동을 하다 본의 아니게국사범 되어버렸던 수많은 민주 투사들의 얼굴이 떠오릅니다. 군사독재 시절 대표적인 국사범이 사형선고까지 받았던 김대중(DJ) 대통령 아닙니까?  



바티칸 당국은 황사영 백서가 워낙 귀중한 사료여서 특수제작한 상자에 넣어 문서고에 보관하고 있는데, 한국 대사 일행이 관람하러 온다는 연락을 받고서 특별히 개봉해 놓았다고 하더군요. 200년이 넘은 문서인데 방금 붓글씨를 것처럼 보관상태가 좋아 보였습니다. 신기할 정도로! 황사영은 작은 비단 조각(가로 62cm 세로 38cm) 무려 13,311개의 한자를 써넣었습니다. 글자가 깨알같이 작더군요. 육안으로는 도저히 식별할 없을 정도로! 황사영은 시력이 무척 좋았던 같습니다. 백서의 내용은 차치하고, 황사영은 이렇게 많은 한자를 어떻게 오탈자 하나 없이 내려갔을까. 경이로울 뿐이었습니다. 자칫 글자라도 실수하면 전체를 다시 써야 하는데 말입니다. 신앙의 힘이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황사영 백서는 황사영이 1801 충북 제천 배론의 토굴에서 조선 정부의 천주교 탄압(신유박해) 실상을 비단에 적어 중국 베이징의 구베아 주교에게 보내려고 비밀문서입니다. 기본적으로 신앙의 자유를 찾기 위한 신앙 고백문입니다. 황사영은 조선 정부의 폭정을 막아달라고 청나라와 프랑스에 구조를 요청하는 내용도 담았습니다. 불가항력의 상황에서 보낸 자위적 차원의 SOS(긴급구조요청)였습니다. 위협을 느낀 조선의 조정은 황사영이 외세를 끌어들이려는 반역행위를 했다며 대역 죄인으로 몰아 극형(거열형) 처했습니다. 음력 11 바람이 부는 서소문 형장에서!   


2019 홍콩 시민들은 중국 정부를 대상으로 민주화 운동을 격렬하게 전개하였습니다. 반정부 시위가 최악으로 치닫던 2019 9 AP통신은 특별한 사진 장을 보도했습니다. 홍콩 시위대가 미국 총영사관 앞에서 미국 의회에홍콩 인권민주주의법안 통과를 촉구하는 모습입니다. 여기에는트럼프 대통령, 홍콩을 해방 시켜주세요라고 깃발도 있었습니다. 시위대가 미국에 SOS 보낸 것입니다. 중국은 민족반역행위라며 시위대를 강력히 처벌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았습니다. 황사영 사건과 같은 구도 아닙니까? 황사영은 혈혈단신 심산유곡에서 ‘1 저항 했고, 홍콩 시위대는 세계인이 지켜보고 있는 가운데집단 저항 것이 다를 뿐입니다. 황사영은 신앙의 자유를, 홍콩 시민들은 정치적 자유(민주주의) 얻고자 했습니다.  


황사영에 대한 평가가 아직도 엇갈립니다. 시대는 바뀌고 달라졌지만 평가의 잣대는 변하지 않은 같아서 안타깝습니다. 황사영은 권력을 탐하지도 정권을 찬탈하려 들지도 않았습니다. 오로지 신앙의 자유를 추구했을 뿐입니다. 과거 조선 시대에는 신앙의 자유가 없었지만 현재 대한민국은 신앙의 자유를 완전 보장하고 있습니다. 영국의 역사학자 E. H 카는역사란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라고 말했습니다. 현재의 시각에서 황사영을 재평가해야 합니다. 황사영은 천주교를 보편적 진리로 여겼기 때문에 요즘으로 치면 UN 탄원한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황사영은 단지 조선의 실정법을 위반했을 뿐입니다. 국가폭력의 희생자입니다. 민주화운동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실정법(국가보안법 ) 위반하여 고통을 겪었던 분들이 모두 복권되었듯이 황사영도 역사의 법정에서 복권되어야 합니다. 철학자이자 역사학자인 박노자 교수(오슬로대학) 말이 가슴에 와닿습니다. “일각의 민족주의 사학자들은 황사영을 외세 숭배자로 부르지만, 그가 진정으로 숭배한 것은 모든 지구인이 공동으로 섬길 있는 보편적인 신이었습니다. 종교인을 정치사적 기준으로 심판하는 것은 무리가 아닐까요?”(「우리 역사 최전선」 , 박노자 하동현 공저, 푸른역사) 


황사영은 백서를 쓰며 이탈리아에 있는 교황(비오11)에게까지 전해지리라 생각이나 했을까. 그분의 혼이 깃들어 있는 백서를 한번 안아 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습니다. 마펠리 신부가 저의 간절한 마음을 눈치챘는지, 백서의 모퉁이만 살짝 만져 보라고 특별 허락을 해주셨습니다. 황사영 알렉시오와 이백만 요셉, 실로 219 만의 만남이었습니다. 뜨거운 전율이 감돌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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