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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2 | 연재 [임안자의 꿈꾸는 인생]
스위스에서 50년, 스위스에서 산다는 것 (26)
런던 이후
임안자 영화평론가(2022-02-09 14:32:56)


런던 이후



1982 11 초에 우리는 남편의 병원 계약이 끝남으로 사이에 꽤나 정들었던 런던을 떠나야 했다. 사실 그곳에서 머물고 싶었어도 남편의 다음 직장 때문에 아쉬움을 남기고 스위스로 돌아왔는데 바젤에 오니까 미자의 대모인 여자친구가 우리의 부탁으로 미리 예약해놓은 아담한 아파트가 귀향을 환영하듯 우리의 입주를 기다리고 있어 위로가 됐다. 친구가 달에 걸쳐 찾아낸 우리의 삶터는 전에 살던 아파트들에 비해 비싸긴 했지만 훨씬 컸고 위치도 라인강에서 아주 가까워 마음에 들었다. 거기다가 우리 애들도 아파트 여러 뒤에 만들어진 널따란 잔디밭의 놀이터에서 옆집 꼬마들과 쉽게 만나고 친해지면서 빠르게 새로운 환경에 길들었다. 우리가 새집으로 이사 다섯 뒤에 현은 초등학교에 그리고 미자는 유치원에 들어갔다. 다행히 초등학교는 걸어서 20분쯤 걸렸고 유치원은 우리 아파트 맞은편에 있어서 애들은 도움 없이도 혼자서 제법 길을 찾아다녀 편했다.   


남편은 귀국하자 곧바로 바젤 대학병원으로 되돌아가 일했다. 그것으로 그는 10년간의 인턴쉽을 드디어 끝마쳤으며 병원을 떠나자마자 틈도 없이 개인병원 설계에 몰두했다. 개업은 남편이 런던의 바르트 병원에서 일할 적에 이미 결정된 일이었다. 그럼에도 막상 일을 시작하려니까 어디에 장소를 잡을지를 몰라 얼마쯤 고민하다가 1982 6 초에작은바젤”(Kleinbasel)에서 주로 가난한 노동자들과 이민자들이 살고 있는 구역에 자그마한 내과 진료소를 열었다(남편의 개인병원에 대해서는 뒤에서 계속된다). 남편이 개업 준비에 온통 마음이 쏠려있는 동안 나는 나대로 8 동안 계속해 주부의 고정된 일상에서 벗어나려고 나름 힘썼다. 우선 런던에서 움튼 영화에 대한 열정을 되살려 (예술)영화관에 자주 들르고 독어 영화 전문지필름 뷜탕”(Film Bulletin) 챙겨 읽었다. 그러다 어느 가까스로 스위스의 독일어 주간 신문포베르즈”(Vorwaertz) 프리랜서 영화 기자로 글을 기회를 얻었다. 하지만 독어 실력이 충분치 못하여 전에 고등학교 독일어 선생이었던 영화평론가 친구의 어머니 밑에서 3년간 일주일에 번씩 시간 개인 수업을 받았다. 그런데 선생님은 수업료를 거절했을 아니라 자진해서 주간지에 보내는 글들을 일일이 고쳐주곤 했는데 나는 그녀의 열성적인 가르침 덕분에 쉽지 않았던 영화기자로서의 초기 과정을 무난히 마칠 있었다.     


어머니의 건강과 거처 문제 

1978 12월에 나는 용담 의붓오빠로부터 갑자기 어머니가 위독하다는 편지를 받고 너무 걱정되어 남편에게 애들을 맡기고 한국으로 서둘러 갔다. 그러나 시기에는 취리히에서 인천으로 직행하는 비행기가 없어서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대한항공을 타고 필리핀 마닐라에서 하룻밤을 다음 아침에야 김포 공항에 내릴 있었다. 어머니는 용담에서 오래전부터 사이가 좋지 않은 둘째 아들의 가족과 계속 같이 살고 있었는데 어머니를 직접 만나보니 다행히도 생명이 위독할 정도로 상태가 나쁘지는 않았다. 다만 오랜 화병으로 심한 우울증에 걸려 모든 귀찮은 식사도 제대로 하지 않고 몸져누워 있었고 몹시 야윈 얼굴에서 세월을 버텨 외로움의 고통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내가 나타나자 너무 기뻐서 눈물을 흘리는 어머니 앞에서 나는 진즉 찾아뵙지 못한 죄책감에 눌려 아무 말도 하고 바짝 마른 어머니 가슴에 얼굴을 묻고 눈물을 흘렸다. 어머니를 마지막으로 1975 11 결혼 직후였다. 시기에 아버지 오빠의 위장 수술 문제로 남편이 나를 급히 한국으로 보내는 바람에 그때 어머니도 잠깐 만났다. 그러나 그때만 해도 어머니는 집안일 아니라 농작도 거들 정도로 기운이 왕성했고 나를 위해 맛있는 음식도 만들어줬는데 3 사이에 어머니의 건강이 그토록 쇠약해져 너무 놀랐다.     


어쨌든 용담에 뒤에 나는 3 동안 어머니 곁에 머물면서 그동안 못했던 이런저런 말을 나누며 오랜만에 정다운 날들을 보냈다. 그런 사이에 어머니는 차츰 기운을 얻고 식사도 조금씩 있을 만큼 몸이 나아졌으나 그럼에도 나는 어머니의 앞날이 걱정스러웠고 무엇보다 어머니의 거처 문제가 절실하여 고민이 많았다. 하지만 선뜻 어머니에게 스위스에서 같이 살자는 말을 하지 못했다. 왜냐면 당시 우리 형편이 어머니와 같이 만큼 여유롭지 못했거니와 시어머니의 정신 질환 때문에 몹시 시달리던 때라서 내가 겪고 있는 심적 고통을 어머니에게 보이고 싶지 않아서였다. 사실 그때까지 나는 어머니가 너무 충격을 받을까 시어머니와의 관계에 대해 일절 입을 다물고 있었다. 그런데 어머니는 속도 모르고 결혼한 지가 년인데 시부모님을 모시지 않느냐며 꾸짖었다. 어찌 됐든 어머니를 이상 용담에 혼자 남겨둘 없음을 깨닫고 나는 전화로 남편에게 어머니가 처해있는 상황을 알려주고 그의 의견을 물었다. 남편은 그럼 어머니를 스위스에 데려오자고 했다가 내가 주춤거리자 그렇다면 가족 가운데 어머니를 돌볼 있는 사람을 찾아서 경제적으로라도 도와주자고 했다. 말에 나는 용담 의붓오빠의 첫아들인 조카를 적격자로 꼽았다. 어머니가 다른 손자들을 제치고 어릴 때부터 유난히 애지중지 키운 조카였는데 어머니의 딱한 처지를 이해하고 돌봐 사람은 집안에서 그뿐이었기 때문이었다. 30 중반의 조카는 무렵에 서울의 어느 은행에서 평범한 직원으로 일하면서 결혼하여 아들과 전세방에서 그럭저럭 살고 있었다. 나는 조카와 그의 아내를 서울에서 만나 남편의 뜻을 전달했다. 그러자 조카는실은 진즉부터 할머니를 모시고 싶었지만 경제적 여유가 없어서 고민하고 있었는데 부끄럽지만 그렇게 해주시면 할머니를 모시겠다 당연한 일인 것처럼 자리에서 확답을 했다. 그리고 옆의 조카며느리도 조카의 말에 적극 찬성하면서 너무 걱정하지 말라며 나를 안심시키려고 힘썼다. 조카 부부의 협력에 새로이 용기와 희망을 얻은 나는 마음 놓고 어머니를 그들에게 부탁한 다음 스위스로 돌아왔다.   


내가 한국으로 갑자기 가게 되면서 남편은 다급하게 휴가를 받아 집안일을 맡아 하면서 애들을 돌봤다. 한데 다섯 달의 미자는 엄마가 갑자기 사라지자 3 내내 어떻게 많이 먹었는지 얼굴이 퉁퉁 부었고 밤중에 자주 울고 보채서 남편을 애태웠다. 그런 한편 살의 현은 별문제 없이 지내다가 취리히 공항에서 나와 만나는 순간에 그동안 쌓였던 엄마에 대한 원망을 한꺼번에 터트렸다. 아빠를 따라 공항에 마중 나온 현은 내가 안아주려고 하면 팔을 뒤로 젖히고 곁으로 오지 않았다. 그리고 전에 나와 조금씩 하던 한국말도 잊어버렸는지 내가 현아 이리와 엄마하고 뽀뽀해, 해도 대답 않고 멀뚱멀뚱하다가 갑자기 얼마나 서럽게 우는지 안쓰럽다 못해 슬펐다. 아무튼 미자의 둥근 얼굴이 다시 정상으로 돌아오고 현이가 스스로 품에 파고들어 뽀뽀를 하기까지는 며칠이 걸렸다. 한국말은 그러나 아쉽게도 현이 응하지 않아 그냥 놔뒀다가 나중에 다시 시작했고 그에 미자도 끼어들었다. 


그런 사이에 남편은 조카 부부가 어머니를 부양할 준비가 되었다는 말을 듣자 며칠 안으로 2 (스위스)프랑을 조카에게 보냈다. 실은 우리한테 당장 그만한 돈이 없어서 시누 남편의 도움을 받았다. 글의 초기에 한번 소개한 있는 시누 남편은 당시 스위스 사회민주당의 국회의원으로 경제적으로 넉넉한 편이었는데 남편의 부탁을 받자 그는 지체 없이 큰돈을 이자 없이 빌려줌으로 빨리 송금할 있었다. 조카는 돈으로 반년쯤 지나서 정부과천청사의 맞은편에 새로 지어진 건물 안에 칸짜리 아파트를 마련하고 그의 말대로드디어 할머니를 모시게 됐다’. 그러므로 어머니는 지겨워하던 오빠 가족을 마침내 떠날 있었으며 사랑하는 손자 집에서 어린 증손자 둘을 돌봐주면서 외롭지 않게 편히 살았다. 나는 어머니를 직접 집에 모시지 못해 속이 언짢았지만 조카 부부가 보살필 거라고 굳게 믿었다. 그리고 어머니가 용담에 때는 집에 전화가 없어서 통화가 불가능했는데 과천으로 옮긴 뒤로 가끔씩 어머니와 전화로 직접 말을 있어 답답함이 한결 적어졌다.  


임안자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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