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도시의 사회적 의미와 문화민주주의의 실험
글 원도연 원광대 디지털콘텐츠학과 교수·익산문화도시 센터장
‘법정 문화도시’가 한국의 도시들을 뜨겁게 하고 있다. 지난 몇 년간 많은 지역들이 문화도시의 이름을 얻기 위해 투자를 아끼지 않고, 지역에서 활동하는 문화기획자들도 헌신과 열정을 쏟아붓고 있다. 전북에는 완주군이 2020년 12월 처음으로 문화도시에 선정되어 올해로 2년 차 사업을 맞이했고, 지난해 12월 익산이 새롭게 선정되면서 1년 차 사업을 시작했다.
정부가 표방한 문화도시는 ‘지역주민 스스로 지역의 문제를 진단하고 다양한 계층의 시민들과 소통하며 지역문화를 설계하고, 그 과정에서 자신이 살고 있는 지역의 문화적 가치를 재발견함으로써 삶의 질을 향상시키고 지역의 고유한 문화발전과 공동체의 회복에 기여’ 하는 것이다. 이 어려운 이야기를 한마디로 정리하면 ‘지역주민 스스로 문화를 통해 도시를 혁신’하라는 것이다. 2000년대 중반 노무현 정부가 표방했던 지역혁신체계(RIS)가 산업생태계의 변화를 통해 지역을 바꾸자고 했다면, 이번에는 문화를 통해 지역을 혁신한다는 문화혁신체계 정도의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문화도시가 궁극적으로 지향하고 있는 정책가치는 ‘문화민주주의’의 개념에 가깝다. 90년대 이후 문화정책의 방향이 차별 없는 문화향유권의 확대로 대표된 ‘문화민주화’로 설정되었다면, 2000년대 이후에는 ‘문화민주주의’라는 개념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문화민주주의는 단순한 문화예술의 향유라는 관점을 넘어서 국민들이 다양한 문화 활동을 주체적으로 수행할 수 있는 문화적 환경에 초점을 맞춘다. 문화민주화는 문화예술에 대한 시민들의 접근기회를 높이기 위해 전문가 중심의 기존 문화단체와 기구를 강화하면서 문화예술과 문화유산의 향유를 강조한다. 이에 반해 문화민주주의는 문화를 문화단체와 전문가들만의 영역에서 밖으로 확장하여 사회적 삶의 질을 높이는 방식으로 접근한다. 문화민주주의에서 주창하는 다양성은 문화를 예술 활동 중심으로 좁게 설정하는 단일성에 대비되는 개념이다. 그래서 문화민주주의의 중요한 키워드는 변화, 삶의 질, (사회)발전, 과정중심 등이다.
문화도시는 이처럼 문화민주주의의 가치를 구현하고자 하는 철학적 기반을 갖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문화를 통한 사회혁신’이라는 목표가 현장에서 실제로 구현되기란 결코 쉽지 않다. 정부는 법정 문화도시를 도시 간 경쟁공모를 통해 선정하고, 선정된 도시에는 5년간 매년 20억을 지원하고 지자체에서 20억을 매칭하는 방식으로 사업을 구성했다.
익산이 지난 2년간 문화도시를 향해 달려온 시간은 바로 이 문화도시의 개념을 도시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는가를 시험한 시간이었다. 당연히 ‘문화를 통한 사회혁신’이라는 목표가 이론이 아니라 현장에서 체화되는 과정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이는 익산은 ‘왜 문화도시를 하고자 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안을 만들고 이를 시민들과 함께 공감하는 ‘과정중심’의 문제였다. 익산이 2019년 처음 문화도시 예비도시에 도전했다가 실패했을 때 우리는 아마도 이 질문 자체를 이해하지 못했던 것 같다. 문화도시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에 대한 해답 찾기는 2020년 예비도시에 재도전한 1년간도 계속되었다. 그 결과로 2021년 익산이 예비도시에 턱걸이하며 선정되었던 것은 문화도시를 향한 시민들의 열망이 조직되기 시작한 덕분이었다. 기획의 승리라기보다는 문화도시를 향해 시민적 열망이 준비하는 과정에서 드러났고, 보석문화를 특성화하겠다는 전략이 심사자들에게 한번 기회를 부여할만하다는 결정으로 이어졌던 것 같다.
2021년 예비도시에 선정되었다는 작은 성공은 익산시와 시민들에게 커다란 자극제가 되었다. 하지만 문제는 여전히 남아있었다. 문화도시의 목표를 시민문화력이라는 개념으로 획정하고 구체적인 실천을 문화향유권의 확대라는 관점으로 놓고 보면 문화도시는 사실 기존의 문화재단 혹은 생활문화동호회 사업과 차별성을 가질 수 없었다. 익산의 도시 특성을 이해하여 문제를 드러내고, 시민들이 문화를 통해 스스로 그 문제를 해결해가는 과정을 조직하고 다른 도시들과 차별화된 문화적 특성을 구성하는 일은 정말 만만치 않은 일이었다. 그래서 2021년 예비도시 사업에서 가장 먼저 시작한 작업은 문화도시의 방향과 목표설정이었다. 여기에 문화도시 선정심사의 주요한 요건이었던 도시재생 및 관광산업과의 연계, 문화도시 사업의 성과가 관련 산업으로 확산할 수 있는 가능성을 만드는 일은 더더구나 풀기 어려운 숙제였다.
이 과정에서 익산문화도시가 택한 전략은 시민들이 스스로 묻고 답하게 하자는 것이었다. 문화도시의 목표를 ‘문화를 통한 사회혁신’으로 두고 우리 주위의 모든 문제들을 들고 와서 가능한 범위까지 스스로 제안하고 사업을 만들어서 실행하도록 하자는 것이었다. 핵심은 시민 누구든, 어떤 제안이든 자유롭게 하고 시민들 스스로 심사위원이 되어서 결정하는 구조를 얼마나 튼튼하게 만드느냐였다. 결국은 뻔한 결론이지만 결코 뻔하지 않은 시민공동체가 해답이 된 셈이었다. 문화도시의 목표를 사회혁신으로 놓고 나서야 도시재생과 협력하여 도시경관을 바꾸고, 문화를 도시의 산업으로 연결하는 프로젝트의 의미도 점점 명확하게 실체를 만들어 갈 수 있었다.
2021년 익산의 문화도시 준비과정이 이런 모든 일을 성공적으로 치러냈다고 말할 수는 없다. 다만 이 같은 방향성과 목표에 시민들이 공감하고 합의하면서 기존의 문화정책들과 어떻게 다른지, 문화도시를 통해 시민들이 무엇을 어떤 방식으로 해야 하는지 조금씩 방법을 알아가는 단계에 접어들었다고 보는 것이 맞다. 익산의 문화도시는 이제 시작되고 있고 진정한 성공 여부는 정부의 재정지원이 끝나는 5년 후에 드러나게 될 것이다. 그때 익산시민들이 문화도시 사업이 계속되어야 한다고 믿는다면 익산은 문화도시의 길에 한 걸음 더 가까이 가게 될 것이다.
문화도시 사업은 매우 지난하고 어려운 과정을 겪게 될 것이다. 정부와 이 사업의 기획자들은 문화도시에 사회혁신이라는 너무 큰 것을 기대하고 있다. 여기에 문화도시의 전문가들과 각 지역의 문화활동가들조차 문화도시에 대한 이해와 접근방법이 각자 다르다는 점은 문화도시 정책의 일관성을 의심스럽게 하는 징후들이다. 실제로 실행단위에 들어가 보면 도시재생이나 사회적경제, 청년센터 등의 연관 사업들과 차별성이 크지 않다는 점도 고민거리다. 현장은 좁고 사람은 늘 중복되는데 사업의 개수만 늘어나면서 벌써 도시는 어지럽다.
무엇보다 문화전문가들의 인력 부족이 심각해지고 있다. 문화현장의 일자리는 다양하게 늘어나는데 조건은 열악하고 활동가들은 훈련과 경험이 부족한 상태에서 시간이 갈수록 관료화, 관변화되는 악습이 재현될 가능성도 높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정부는 문화전문가들을 위한 체계적인 교육과정을 먼저 고민해야 한다. 현장에서 빈번하게 사용되는 문화매개자라는 개념은 좋은 용어가 아니다. 문화를 분야와 분야를 연결하는 매개로 보면 안된다. 문화는 그 자체로 독립적인 영역이고 그 속에서 전문성을 강화해야 한다. 문화도시의 성과를 지역의 관련 산업과 연계하고 확산하는 일은 더 어려운 일이다. 익산은 보석문화도시라는 접점을 선택했지만 그것이 얼마나 성공을 거둘지는 모를 일이다.
많은 도시들이 문화도시의 선정 자체에 사활을 걸면서 문체부의 이 프로젝트 자체는 흥행에 대성공을 거둔 것처럼 보이지만 남겨진 과제는 결코 적지 않다. 다만, 문화도시 프로젝트를 통해 확인한 것은 우리 사회가 문화에 대해 좀 더 뜨거워졌다는 사실이고, 정치인들과 공무원들과 시민들이 문화에 대해 한 번씩은 더 질문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어깨는 무겁지만 우선 지금은 이 질문들에 감사할 따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