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탈의 아픔을 딛고 지역의 자산이 된 역사
근대 유산이 곳곳에 남아있는 군산의 거리를 거닐다 보면 마치 시간 여행을 떠난 듯한 느낌이다.
그러나 여행의 들뜬 마음으로 고풍스러운 건축물들에 감탄하며 실내에 들어서면, 마주하게 되는 것은 어두웠던 근대 한국의 역사가 거기 있다.
근대 역사가 시작 되는 개항. 다른 나라의 문화를 받아들이고 새로운 지식과 기술을 통해 한 단계 발전할 수 있는 기회지만 결코 원치 않았던, 강제적이고 처절했던 수탈의 역사가 따라온다.
그 모습을 가장 잘 보여주는 곳인 군산이다. 금강하구와 서해안이 맞닿아있는 군산은 삼국시대부터 물류유통의 중심지였다. 그 역할을 일본은 호남지역의 풍부한 평야에서 생산되는 쌀을 수탈하는 창구로 삼았다. 수탈에 앞장섰던 일본 은행, 그 은행을 통해 수익을 올린 일본 회사, 그 일본 회사에 다니는 상인들의 주택이 군산에 남아 있는 근대 건축물들은 그 흔적이다. 일제 강점기의 잔재의 관광자원화를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 군산은 수많은 질문과 고민 속에서 답을 찾아가고 있다. 물류유통의 거점이라는 군산의 정체성을 되살리고 건축물에 남아있는 역사 그대로를 보존해 다시 후대에 전하는 것.
수탈의 아픔을 극복하고 근대건축물을 군산의 빛나는 유산으로 받아들였다.
현대중공업 군산조선소 가동 중단과 한국GM 군산공장 폐쇄결정으로 위기를 겪고 있는 군산. 최근 군산조선소 재가동이라는 희망의 소식이 전해졌다. 모든 위기를 이겨내고 그것을 다시 자산으로 삼는 군산의 저력을 응원한다.
건축이 품은 시간을 만나다
군산은 금강하구와 중부 서해안과 맞닿아 있어 고려시대에는 진성창, 조선시대에는 칠읍해창이 위치한 물류유통의 중심지였다. 군산의 이러한 특징은 오히려 일제강점기 수탈에 적극 활용되는 비극을 낳았다. 수탈의 아픔을 간직한 공간, 해방 이후에는 어떻게 활용되어야 할까. 군산시의 고민이 녹아난 근대역사벨트 지역을 돌아본다.
군산 내항 뜬다리 부두(부잔교)
전라북도 군산시 내항2길 32
군산 내항의 뜬다리 부두는 간조와 만조의 수위 변화와 무관하게 대형선박을 접안시키기 위해 조성한 시설로 일제강점기 쌀 수탈항으로서 군산항의 성격과 기능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육상에서 해상으로 연결되는 다리 형태의 구조물 2개를 해상에서 콘크리트 부유체로 서로 연결하여 1기의 뜬다리를 구성하는 형식이다. 물 수위에 따라 다리가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여 뜬다리 부두라 한다.
군산내항은 고려시대부터 물류유통의 중심지였다. 이러한 해상교통로로서의 역할 때문에 1899년 개항이후 근대적인 항구로서의 축항공사가 추진됐다. 군산항 제3차 축항 공사(1926~1933년) 때 뜬다리 부두 3기를 설치하여 3천 톤급 기선 세 척이 동시에 접안할 수 있게 됐다. 이후 제4차 축항 공사(1936년~1938년)에서 1기를 추가 설치하여 3천 톤급 기선 여섯 척이 동시에 접안할 수 있도록 했다. 현재는 제3차 축항 공사 과정에서 설치됐던 3기의 뜬다리만 존재하며, 뜬다리 각각에서 다리 형태의 구조물 한 개씩이 소실되어 현재는 각 뜬다리의 일부인 세 개의 다리 형태 구조물이 남아있다.
뜬다리 부두 건설 작업은 다른 일에 비해 삯이 높았는데, 그 이유는 공사 자체가 위험했기 때문. 완성된 대형 부잔교의 입수식 때 한국인 노동자 10여 명이 사망하는 사고도 있었다고 전해진다. 수탈을 목적으로 하는 부두의 건설에조차 한국인 노동자들이 희생되는 사건은 일제강점기 우리나라의 가슴 아픈 역사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군산세관
전라북도 군산시 해망로 244-7
구 군산세관 본관은 1908년에 건립되어 1993년까지 85년간 세관 건물로서 사용됐다. 붉은 벽돌로 지어진 군산세관은 지붕은 고딕양식, 창문은 로마네스크 양식이며, 현관의 처마를 끄집어 낸 것은 영국의 건축 양식으로 전체적으로 유럽의 건축을 융합한 특징을 지니고 있다. 많은 부속건물이 있었으나 현재는 모두 헐리고 본관건물만이 남아 있으며, 한국은행 본점, 서울역사에 이은 국내에 현존하는 서양고전주의 3대 건축물 중 하나로 꼽힌다.
군산세관이 새롭게 신축된 이후로는 호남관세전시관으로 활용되고 있다. 전시실에서는 당시 무역항으로서의 군산의 모습을 상세히 살필 수 있다.
군산근대건축관(구 조선은행 군산지점)
전라북도 군산시 해망로 214
구 조선은행은 1876년 조선의 개항 이후 1879년 부산에 처음 진출한 일본의 사립은행인 국립 제일은행이 그 전신이다. 이것을 1909년 대한제국의 국책은행으로 설립된 구 한국은행이 인계 받았으나, 일제강점 이후 총독부에 의해 조선은행으로 개칭되었고 조선총독부의 직속 금융기관 역할을 했다. 당시 이곳의 주요 업무는 군산항을 통해서 반출되는 쌀 수익금을 예치하고 농지 매입을 위한 자금을 융자해주는 일이었다. 일본상인들에게 특혜를 제공하며 일본의 경제적 침략에 앞장섰다. 해방 이후 한일은행이 인수했으며, 이후 개인이 매입해 예식장, 유흥주점 등으로 사용되다 화재 후 방치 됐다. 군산시에서 2008년 매입하고 등록문화재로 지정, 새롭게 단장하여 군산 근대건축관으로 활용하고 있다.
붉은 벽돌로 지어진 구 조선은행 군산지점은 일본인 건축가 나카무라 요시헤이가 설계했다. 채만식의 소설 ‘탁류’에서 고태수가 다니던 은행이기도 하다. 건물의 부분별 벽체, 기둥, 천장의 일부를 과거 그대로 보존 및 노출하여 하나의 전시물로 활용하고 있다.
로비에는 ‘나라를 잃었던 자들아 그날을 기억하라’라는 문구를 적은 현수막을 걸어 경술국치의 치욕과 아픔을 잊지 않고자 하는 노력을 보인다. 로비 바닥에는 대형 스크린을 설치해 근대 군산의 역사를 친숙하게 접할 수 있도록 했다. 모형 전시를 통해 군산의 근대 건축물을 한눈에 살펴볼 수 있으며, 일제강점기 군산사람들의 삶을 엿볼 수 있는 다양한 시청각 자료가 전시되어 있다. 금고실에서는 일제강점기 조선은행에서 발행한 화폐 등 유물을 통해 당시 조선은행이 어떠한 역할을 했는지 살펴볼 수 있다. 지점장실은 잊지 말아야할 역사적인 경술국치를 기억하기 위한 전시공간으로 일본제국주의 침략의 역사를 증언하는 공간으로 조성했다. 응접실에서는 근대 군산의 다양한 모습을 사진과 영상으로 살펴볼 수 있다.
미즈커피(구 미즈상사)
전라북도 군산시 해망로 232
1930년대 건립되어 식료품과 잡화를 수입, 판매하던 무역회사로 사용되었던 건물이다. 장미동일대는 쌀 수탈의 거점이었으며 이 과정에서 일본인들의 무역회사와 상업시설이 많이 자리 잡고 있었다. 해방이후 검역소로 사용했으며, 2012년도에 근대역사박물관 정면에서 현재의 위치로 이전 및 보수, 복원하여 카페로 활용하고 있다.
군산근대미술관 (구 일본 제18은행 군산지점)
전라북도 군산시 해망로 230
18은행은 1870년 일본 나가사키에 있던 대규모 상인들이 중심이 되어 출발했다. 18은 은행 설립인가 순서를 의미한다. 18은행은 나가사키가 무역항으로써의 기능을 잃자 1878년 국립 18은행으로 변경, 무역과 상업을 통한 이익을 얻기 위해 조선에 진출했다. 인천에 1890년 문을 연 것으로 시작해 전국에 지점을 개설했는데, 군산 지점은 1907년 일곱 번째로 개설됐다. 조선에서 18은행의 주 업무는 무역에 따른 대부업으로 우리 농민들의 농토를 갈취하는 일에 앞장섰다. 해방 이후에는 대한통운 지점 건물로 사용 됐으며, 2008년 등록문화재로 지정됐다. 이후 보수, 복원을 통해 군산 근대미술관으로 활용하고 있다.
본관은 군산 및 전라북도 출신 예술가들의 작품을 전시하는 공간으로 분기별 다양한 주제로 기획전이 개최된다. 금고동은 근대기 대표적 독립운동가 안중근 의사 기념전시관으로 구성되어 있다. 또한 일제강점기 사용되었던 대형금고가 전시되어 있다. 대형금고에는 ‘이 금고가 채워지기 까지 우리 민족은 헐벗고 굶주려야만 했다’ 라는 문구를 써 넣어 일제강점기 당시 이 건축물이 어떤 역할을 했는지 상기시킨다. 관리동은 근대역사경관지구 조성사업을 통해 수집한 근대기 군산의 다양한 근대건축부재들이 전시되어 있다.
장식적 요소가 두드러지지는 않지만 반원창과 모서리 디테일 등에서 서양고전주의 건축의 요소가 나타난다. 평벽 목조와 쌍대공 트러스 구조의 단순하고 경제적인 구조형식으로 넓은 영업장을 확보해야 했던 중소규모 업무시설, 특히 은행 건축물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동국사
전라북도 군산시 동국사길 16
우리나라에 남아있는 유일한 일본식 사찰이다. 일본 조동종 승려 우치다가 1909년 군산의 외국인 거주지 일조통(一條通)에 금강선사라는 이름으로 포교소를 개창했으며, 1913년 금광동 현재의 위치로 옮겨 대웅전과 요사를 신축했다. 우리나라를 일본에 동화시키는 의도로 들어온 일본불교 사찰 중 하나로 일제 강점기 36년 동안 일본인 승려에 의해 운영되다가 해방 이후 대한민국 정부로 이관, 1955년 불교전북교당에서 인수하고 당시 전북종무원장 김남곡 스님이 동국사로 개명했다. 1970년 대한불교조계종 24교구 선운사에 증여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동국사는 화려한 우리나라 사찰과 달리 소박한 느낌을 준다. 정면 5칸, 측면 5칸의 정방형 단층팔자지붕 홑처마 형식은 에도시대 건축 양식이다. 장식이 없는 처마와 대웅전 외벽의 많은 창문에서도 일본식 사찰의 특징을 엿볼 수 있다. 사용된 목재는 일본산 스기목(삼나무)이다. 범종은 1919년 일본 경도에서 주조했다.
소녀상이 자리하고 있는 동국사는 식민지배의 아픔을 품고 있으며, 한국 불교의 역사를 알 수 있는 가치를 인정받아 2003년 등록문화재로 지정됐다.
군산 신흥동 일본식 가옥(히로쓰 가옥)
전라북도 군산시 구영1길 17
군산부협의회 의원이며 포목점을 운영하던 히로쓰 게이사브로가 지은 주택이다. 이 주택이 위치한 신흥동 일대는 일제 강점기 군산시내 유지들이 거주하던 부유층 거주 지역이었다. 장군의 아들, 바람의 파이터, 타짜 등 많은 영화와 드라마의 배경이 되는 이곳은 일본식 주택의 특성이 잘 나타난다. 목조 2층 건물로 본채 옆에 단층의 객실이 비스듬히 붙어있으며, 두 건물 사이에는 일본식 정원이 꾸며져 있다. 건립 당시의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어 건축사적 의의가 크다. 히로쓰 가옥은 해방 후 적산가옥으로 구 호남제분의 이용구 사장 명의로 넘어갔으며 현재 한국제분의 소유로 되어 있다. 2005년 국가 등록 문화재로 지정된 이후로는 군산시에서 관리하며 관람객을 위해 개방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