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내 선생님!
그야말로 설을 다시 쇠어야 할 정도로 추운 날씨입니다. 계속해서 추웠던 날씨면 조금 견디기 수월하겠는데 봄인 듯 풀어졌다가 방심한 사이 바짝 조이듯 한 추위로 봄이 오그라들고 마음이 안으로만 향합니다. 보내주신 글월과 선물은 잘 받았습니다. 편지는 뜯어 읽었으되 선물만은 눈에 띄지 않는 곳에 숨겨두고 얼마간 지난 다음에 식구들 앞에 ‘짜잔!’ 하고 드러내 볼 심산입니다. 혼자서만, 남모르는 마음이 많이 유쾌합니다. 나이 들수록 내가 생각해도 어린아이 같아지는군요.
올 설에도, 대보름에도 굿은 치지 못하였습니다. 역시 코로나 때문이지요. 우리 마을은 초 하룻날 당산제를 모시기 위해서 그믐 무렵에 마을 총회를 하고 그 자리에서 인두권의 액수와 제주를 뽑습니다. 올해도 예외는 아니었죠. 하지만 저는 무슨 볼일이 있어 회의에 참석하지 못하였습니다. 나중에 이장한테 전화해서 밑도 끝도 없이 물었습니다.
“어찌 되얏는가?”
“예, 코로나 때문에 하지 못한다는 건 그런다쳐도 ‘작년에 한 번 그만둔 것을 무어 헐라고 또 잇어서 허냐’고 몇 사람들이 들고 반대를 허는 바람에.....” 말꼬리를 흐렸습니다.
저는 순간 어이가 없었죠. 작년에 안 한 것이 외부에서 강제로 주어진 사정 때문인데 그것을 내부의 자발적인 결정인 냥 말하는 것도 그렇고 몇 백 년 이어온 것을 무슨 적폐처럼 그만두자는 것도 실소가 나오는 것이었습니다. 마을 일을 결정함에 있어 어느 것 하나라도 늘 이해관계나 뿌리 깊은 파벌이 작동한다는 것을 모르는 바 아니지마는 그동안 이렇다 할 명분이나 이유 없이 줄기차게 중단을 요구해오던 몇몇의 요구가 코로나를 등에 업고 이번에는 관철된 모양새 하며, 경제적인 문제와 효율, 그리고 끊임없이 미신의 이름을 들씌운 결과이기도 한데 당산제라는 게 이런 범주의 논의 대상이 되었다는 게 서글픈 거지요. 선생님의 동네엔 어떻습니까?
이번 일로 저는 설 전부터 기분이 몹시 언짢았습니다. 당산제가 생긴 이래 단 한 번도 거르지 않은 것에 대한 조상적부터 쌓여온 자긍심에도 커다란 상처요, 이런 문화적 전통 하나도 지켜내지 못하는 것에 따른 자괴감도 스스로 감당하기 어려운 것이었습니다. 자다가 벌떡벌떡 몇 번을 일어나고 나중에는 결국 술에 취하지도 않은 채 혼자 당산나무에 가서 서성거리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제가 상쇠로서 굿을 치고 안치고의 문제와는 차원이 다른 것입니다. 고령화와 이농, 그리고 도시 투기 자본의 농촌 유입, 스마트화한 세상은 농촌 마을의 전통에 기반한 공동체적인 정체성을 소멸시키는데 그런 가운데서도 실낱처럼 이어져 왔던 당산제의 중단은 어쩌면 예견된 불길한 상징이기도 할 것입니다. 붕괴가 눈앞에 닥친......
배 고프시겠다
배꼽에 가만히 귀를 대보면
깊디깊은 동굴 한 삼백년 쯤에서 부터
떡시루 술동이
희디흰 쌀밥 사발을
일구고 씨뿌려왔던 농악소리
그 훈김나는 소리 들리지 않아 언짢으시겠다
심심하시겠다
어깨에 가만히 기대어보면
그네매고 날아오르던 아이들
사뿐히 등허리 내려앉아 미끄럼을 타고
별빛 어우러진 가을
연인되어 손잡고 거닐던 모습들
보이지 않아 안타까우시겠다
끊이지 말아야 할 것들이 끊어진 자리
잊지 말아야 할 것들이 잊혀진 자리
별빛마저 가려 칠흑인데
차마 돌아서지 못하는 사람에게
괜찮다 괜찮다 등다독여 주고
돌아서 기어이 우시나보다
-당산 할매-
저는 마을의 몇 젊은이들에게 제안을 했습니다. 시대에 맞게 당산제를 바꿔보자고요. ‘우선 인두세를 걷지 말고 제주도 뽑지 말고 마음 내키는 사람들이 깨끗한 음식 한 가지씩 해가지고 당산제를 지내며 소원을 빌고 그 음식으로 축제를 벌이자, 당산나무는 소원의 나무라고 이름을 붙이고 이웃마을 사람들도 참여하게 하자’ 대강 이런 내용이었고 좀 더 구체적인 것은 일 년의 시간을 두고 계획해보자고요. 말 그대로 정말 일 년여 시간 동안 많은 생각을 해야 될 것 같고 그 바탕 위에서 실현 가능하고 바람직한 방향의 ‘제안서’ 하나 만들어볼 소임을 스스로 졌습니다. 그리고는 간단하게나마 주과포와 떨을 준비해서 초하룻날 저녁 저 혼자 당산제를 지냈습니다. 선생님 편지에 답이 조금 무거워졌습니다. 내내 평안하소서.
2022.2.19.
박형진 드림
모항 박형진 시인께
오늘도 여전히 날이 깨어나지 못하고 구름도 있고, 눈발도 있고, 바람도 있는. 그렇지만 해도 있는 그렇고 그런 날입니다.
해가 있어 장을 담근다고 재를 넘고 물을 건너 계남마을에 가서 물을 길러다 두고 잠깐 읍내에 다녀왔는데 그 사이에 윤주사(집배원 아저씨)가 다녀갔나 봅니다. 선생님의 편지에서 당산제 이야기를 들으며 그렇잖아도 요즘 선거국면에서 많이 이야기되는 무속이 어쩌고저쩌고 해쌓는 것이 불편했기에 저도 속상했습니다. 그런 속된 욕망의 무속과 천지만물에 정령이 깃들어 있다는 생태적 사고의 무속은 엄연히 다른 것인데 외래 종교관으로 비뚤어진 자기비하의 미신화가 안타깝습니다.
삶의 연속성이란 게 죽음을 살아 담보하는 것이고 제례와 의례로 맥락화 하는 것인데 그저 사는 것만 사는 것이라면 죽음 또한 그대로 죽음인 것이 되어 사는 삶이 무의미해질 것입니다. 물론 의미만을 추구하는 삶의 무의미가 있지만 의미 없는 삶을 어찌 살아내려고들 살았던 삶을 부정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이 삶이 그대로 살았던 삶인바 자기부정인데 말입니다.
아버지의 첫 기일을 보내고 곧 어머니의 첫 기일을 맞이하게 되면서 당신들의 삶을 [창작과비평] 창간 50주년 기념으로 출간(2016)된 [한국현대생활문화사]에서 봤습니다. 당신들(1923년, 1931년생)께서 살았다 할 20세기 후반기를 십 년 단위로 한 네 권(1950년, 1960년, 1970년, 1980년)이었습니다. 현대를 살고 있기에 굳이 볼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또 당신들의 막내인 저(1962년생)의 삶이기도 했습니다. 당신들의 삶 위에 이 삶이 있고, 이 삶 위에 또 다른 삶이 있겠지요. 십 년 단위 당신들의 삶도 숨이 가픈데 그저 생각을 생각으로 덮고, 일을 일로 덮는 촉박한 이 삶에서 과연 그 어떤 삶의 의미와 보람을 찾을 수 있을까요.
네 권 모두 기획의 말 “역사는 인간이 만들어 나간다”가 들어 있습니다. 매번 봐도 새롭습니다. ‘현재의 우리 모습은 극단의 20세기 한반도에 거주한 사람들이 마을 주민에서 대도시민까지 다양한 층위의 지역사회 공동체 구성원으로서, 농민 노동자 자본가 같은 계급적 존재로서, 가정주부 학생 회사원 군인 같은 사회적 직분의 존재로서, 그리고 국민국가의 국민으로서 삶을 영위하며 각각의 정체성을 형성해간 결과물이다’ ‘생활문화에 적극 개입해 대중의 행위와 의식을 철저히 통제한 유신체제가 신화화되는 현실을 마주하고 있기에 한국사회의 변화에 대한 갈구가 더욱 큰 것인지도 모른다. 변화가 어느 순간에 어떠한 방식으로 또 올지는 예견할 수 없으나 구시대의 유제를 털어버리기 위한 정치투쟁을 일상의 영역에서부터 벌이며 조그마한 변화를 만들어갈 때 거대한 변화가 이루어진다는 점은 분명하다’
마을이야기를 하자면 이 옹기장이 팔자 만큼이나 팍팍합니다. 저희 마을은 참 묘합니다. 세 개의 뜸(양지뜸, 음지뜸, 아래뜸)이 모여 이루어진 자연마을로 손내(정천鼎川)인데 윗마을인 송림松林과 행정리로 합쳐져 정송鼎松입니다. 저희 아래뜸은 순전히 옹기점으로 자리한 것이기에 농경문화의 눈으로 보면 오늘날의 산업도시처럼 막무가내로 형성된 마을입니다. 그 행태로 지금은 산업양계와 산업농으로 대형비닐하우스(스마트팜)가 들어서 있습니다. 태어나 자란 마을도 갱변이었다가 왜정 때 치수가 되면서 들어앉은 마을이라 깃대봉에 막혀 덕德유산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지금 살고 있는 아래뜸도 앞동산이 가려 덕德태산이 보이지 않는답니다. 그래 그 좋은 덕德을 못 보고(?) 사는 팍팍한 삶입니다. 이 자리에서는 팍팍하지만 떨어져서 뒤돌아보면 아름답기에 이 또한 묘합니다.
옹기점에서 보면 기막히게 좋은 자리가 있었습니다. 동이 트는 자리인데 부채살처럼 펼쳐진 산맥들이 모이는 자리입니다. 처음부터 눈으로 본 자리입니다. 옹기가마에 불을 지필 때였습니다. 새벽에 동이 트는데 그 햇살을 반기다가 그 햇살을 수렴하는 그 자리를 봤습니다. 그래 불을 이어 받으로 온 재호양반에게 저 자리에 뭐가 있냐고 여쭸더니 ‘안터’라고 했습니다. 그래 가마불을 마치고 가봤습니다. 그 자리는 밖에서는 안보이고 안에서 밖이 보이는 이름 그대로 안터였습니다. 마을을 이루었던 곳일 텐데 그때는 집 한 채가 있었습니다. 이층집이라고 하기에는 그렇고 다락방이 얹어져 있듯이 있었는데 큰짐승이 무서워 어린아이들을 재우느라 그리 지었다고 했습니다. 그 자리에서 망골재를 넘으면 또 좋은 마을이 있는데 지금은 빈집들뿐입니다.
이렇듯 이 자리에서 답답해하는 거, 농경으로의 마을 구성을 욕망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농사꾼 못된 옹기장이로 치러야 할 죄값이겠지요.
2022. 2. 22
옹기장이 이현배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