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이라는 미지의 영역을 탐험하는 서투른 여정
글 김경태 영화평론가
폴 토마스 앤더슨 감독이 <펀치 드렁크 러브>(2002) 이후 근 20년 만에 따뜻한 러브스토리로 돌아왔다. <리코리쉬 피자>는 1973년의 캘리포니아 샌 페르난도 밸리를 배경으로, 아역배우로 활동하는 10대 소년 ‘개리(쿠퍼 호프만)’가 졸업 사진 촬영 보조로 일하며 이제 막 20대에 접어든 ‘알라나(알라나 하임)’에게 무턱대고 데이트 신청을 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알라나는 개리를 어린애 취급하며 무시하면서도 호기심에 그가 기다리는 레스토랑을 찾아간다. 유쾌한 대화를 나누고 돌아오는 길에 알라나는 개리의 여자친구가 될 생각이 없다며 단호하게 선을 긋는다. 반면에 개리는 언젠가 그녀와 결혼할 거라며 동생에게 들러리를 서달라며 설레발을 친다. 그들은 아직 사랑을 잘 모른다. 쉽게 사랑을 선언하는 것과 쉽게 사랑을 부정하는 것은 사랑에 대한 무지를 드러내는 서로 다른 방식일 뿐이다. 사랑이라는 미지의 영역에 이제 막 발을 들인 그들은 서로의 주변을 맴돌며 사랑을 탐험한다.
감독은 사랑의 탐구를 위한 시대로 70년대를 택했다. 그것은 감독 자신이 지나왔기에 뚜렷이 기억하고 감각하는 젊은 날에 대한 향수일 것이다. 그 향수의 지점은 명확하다. 스마트폰도 없고 SNS도 없던 시절의 젊은이들은 서툰 눈빛과 몸짓에만 의지한 채 서로의 속내를 겨우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만큼 함께 있는 동안 온몸의 감각을 보다 예리하게 곤두세우고 서로에게 집중을 해야 한다. 개리와 알라나는 연인이 아니라 물침대 사업의 동업자로서 함께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고 일을 해나가면서도, 그 저의를 파악하기 위해 애써야 한다. 나란히 앉은 테이블에서 서로의 맨살이 슬쩍 닿는 찰나의 감각을 기억해야 하고, 수화기 너머에서 들려오는 아주 옅은 숨소리에서 단서를 찾아야 한다.
영화는 첫눈에 반하는 운명적 사랑을 갈망하거나 미화하지 않는다. 사랑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사랑을 단언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서로 무심한 척하다가도, 개리가 살인범으로 오해를 받고 경찰관들에게 붙잡혀 가자, 알라나는 그의 결백을 항변하며 필사적으로 경찰차를 뒤쫓아 뛴다. 개리 역시 알라나가 유명 할리우드 배우의 스턴트 연기에 동참하는 모습을 멀찍이 보다가 그녀가 오토바이에서 떨어졌을 때, 홀로 절박하게 그녀에게 달려간다. 그들의 마음은 여전히 머뭇거리지만 몸이 본능적으로 먼저 반응을 한다. 하지만 그들의 관계가 자꾸만 어긋나면서 관객을 애태운다. 관객에게 당연해 보이는 사랑이 그들에게는 모호할 뿐이다.
당연하게도, 사랑은 선언하는 것이 아니라 행동하는 것이다. 그들이 함께 겪어낸 그 모든 우여곡절은 그들이 뒤늦게 깨닫는 사랑의 자양분이 된다. 사랑과 우정 사이에서 표류하며 규정할 수 없는 관계는 이름에 앞서는 행위들로 조금씩 의미를 찾아간다. 서로를 힘차게 끌어안았다가도, 서로에게 악담을 퍼붓기도 하면서 조금씩 관계의 방향을 조정한다.
알라나는 선거 캠프에서 자원봉사를 하면서 시장 후보의 인정을 받는다. 정치적 신념 때문이라고 말하지만 후보가 자신에게 보여주는 관심에 가슴 설레기도 한다. 저녁 식사 자리에 자신을 초대하자 한달음에 달려가지만, 그것은 자신이 게이라는 사실을 감추려고, 같이 있던 남자 친구의 애인 연기를 해달라는 부탁을 하기 위해서였다. 사랑을 떳떳이 밝힐 수 없는 그들의 모습을 통해 비로소 알라나는 자신의 마음을 확신하며 개리를 황급히 찾아간다. 억압받는 사랑임에도 불구하고 그 사랑을 의심하지 않는 그들로부터 사랑을 배운 것이다. 어쩌면, 사랑은 확신이 아니라 용기의 문제일지 모른다. 사랑과 우정 사이에서 부유하던 관계가 마침내 제 자리를 찾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