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학철, 「20세기의 신화」창작과비평사, 1996

글 이휘현 KBS전주 PD

지난 달 나는 루쉰(魯迅)에 관한 글을 썼다. 그 루쉰은 우상파괴자로서의 면모를 가진 위대한 인물이었다. 봉건의 미몽에 허덕이는 중국대륙을 깨우고자 했던 진심 어린 계몽가로서의 루쉰 말이다.

이번 호에 다룰 책을 언급하기에 앞서, 나는 그 루쉰을 다시 꺼내 들고자 한다. 다만 오늘 이야기할 루쉰은 우상파괴자가 아니다. 대신, 우상 그 자체로서의 루쉰을 말해 볼 생각이다. 

아니! 우상파괴자에게 우상의 혐의를 씌운다고? ‘설마’라고 생각하시는 독자들도 계시리라. 하지만 사실이다. 나는 이 불편한 진실을 증명하기 위해 유명작가의 권위를 빌려오고자 한다. <허삼관 매혈기>의 작가 위화다.

중국 현대소설을 이야기할 때 중요하게 다뤄야 할 소설가 중 한 명인 위화는 10여 년 전 쓴 에세이를 통해 중국 문화대혁명 시절 ‘루쉰’이라는 단어가 어떻게 우상으로 소비되었는지를 적나라하게 회고한 바 있다. 

“문화대혁명은 문학이 없는 시대였다. …… 우리가 사용했던 초등학교에서 고등학교까지의 교과서에는 단 두 사람의 문학작품만 수록되어 있었다. …… 나는 초등학교 1학년 때 너무나 순진하게도 전 세계를 통틀어 작가는 루쉰 하나뿐이고 시인은 마오쩌뚱 하나뿐이라고 믿었다.” -위화, <사람의 목소리는 빛보다 멀리 간다>(165쪽)-

중국 문화대혁명은 1960년대 중반 이후 약 10년 간 벌어진 일이다. 반면 루쉰은 1930년대 중반에 세상을 떠났다. 그렇다면 루쉰의 죽음이 문화대혁명을 30년 정도 앞선다. 사실이 이러하니 루쉰 우상화는 정작 그 자신의 의지와는 아무 상관도 없다. 오로지 저 위대한 ‘마오 주석’의 간택을 받았을 뿐! 그리하여 혁명이라는 이름으로 수많은 사람들의 생명과 자유를 앗아간 그 무시무시한 시절에, 죽은 지 30년이 된 루쉰은 우상으로 박제되는 비극을 맞이한 것이다.

다른 모든 친구들이 그러했듯 오로지 마오 주석과 루쉰 선생을 흠모해왔던 소년 위화는 청년으로 성장한 후부터 루쉰을 외면했다. 머리가 굵어 돌이켜보니 “나의 루쉰 선생은 자신의 삶을 억압한 허상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던 것”이다. 그러다가 운명처럼 작가의 길에 들어서고 또 유명세를 탈 즈음 우연히 루쉰의 작품을 다시 읽어보게 된 위화는 드디어 그의 문학이 지닌 진가를 제대로 알게 되었음을 고백했다. “서른여섯 살이 되던 해의 그날 저녁 나에게 루쉰은 마침내 하나의 단어에서 하나의 작가로 돌아왔다.”(위의 책, 182쪽)

그렇게 우상파괴자로서의 작가와 또 한 명의 우상파괴 작가가 만났다. 그 머나먼 해후의 세월을 양쯔강처럼 드넓게 펼쳐놓은 건 모두 마오쩌뚱, 아니 ‘우리의 위대한 마오 주석’의 공으로 돌려야 할 것이다. 한 명의 망상가가 무한한 권력을 소유하게 되었을 때 얼마나 큰 비극이 벌어질 수 있는지를 우리는 지난 세기 중국의 마오쩌뚱을 통해 똑똑히 확인하게 되는 것이다. 김학철(1916-2001)의 장편소설 <20세기의 신화>는 이 암울했던 중국현대사를 관통해 살아온 한 인간의 고독한 생존기를 담고 있다.

제2차 세계대전의 소용돌이 속 중국 태항산에 근거해 조선의용대 분대장을 지낸 김학철은 생사고비의 전투 끝에 일본군에 체포되어 몇 년의 옥살이를 견뎌야 했다. 그리고 나가사끼 형무소에서 한쪽 다리를 절단하는 비극도 겪었다. 그러면서도 조국이 해방될 때까지 꿋꿋하게 버틸 만큼 지사적 면모가 강했다. 광복을 맞아 귀국한 그는 일가친척이 있는 서울 대신 북녘땅 연길을 삶의 터전으로 택했다. 그리고 본격적인 작가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대장정으로 사회주의 혁명을 달성한 마오쩌뚱은 김학철에게는 영웅이었다. 하지만 마오쩌뚱의 실체는 그리 긴 세월이 지나지 않아 드러났다. 인민의 영웅은 알고 보니 정적들과 암투를 벌이는 권력의 화신이었던 것이다. 마오 주석에게 실망한 김학철의 글에 날이 서기 시작했다. 

그 후 1950년대 중반 시작된 중국 대약진운동이 1차 쓰나미처럼 김학철의 삶을 쓸어갔다. 사상이 불량한 작가로 낙인찍혀 공동농장에서 몇 년 간 강제노역에 시달렸던 그는 5년간의 대약진운동이 끝난 후 귀향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문화대혁명이라는 2차 쓰나미가 몰려오기 전에 맞이한 아주 잠깐의 휴지기일 뿐이었다.

이 시기에 김학철은 공동농장에서의 비참했던 삶을 기록하며 마오쩌뚱 체제하 사회주의 중국의 민낯을 고스란히 고발한 소설을 한 권 탈고했다. 하지만 출간도 되기 전 혁명‘꾼’들의 손에 이 원고가 들어가고 말았다. ‘불온한 소설’을 쓴 혐의로 중국의 인민민주주의공화국 법정은 김학철에게 징역 10년형을 선고했다. 루쉰을 우상으로 추앙했던 마오쩌뚱은 역시 ‘펜의 힘’이 대단하다는 것만큼은 알고 있었던 것일까.

1977년에 10년 만기로 출소한 후 지난한 법정투쟁을 통해 1980년 복권된 김학철은 이후에도 자신에게 필화를 안긴 이 작품을 출간하지 못했다. 그러다가 1987년에 가서야 온전한 책의 형태로 선보일 수 있었다. 1965년에 탈고했다는 이 소설이 20년 이상을 표류하다가 드디어 독자들을 만나게 된 것이다. 그 작품이 바로 <20세기의 신화>다. 그의 다른 작품 <격정시대> <최후의 분대장> 등이 먼저 소개된 한국에서는 1996년에 출간되었다. 

에드거 스노우의 <중국의 붉은 별>이나 리우스(멕시코 출신 정치만화가)의 <모택동 생애와 사상>, 심지어 유시민의 <거꾸로 읽는 세계사>를 통해 왜곡된 거울로 마오쩌뚱을 흠모해왔던 한국의 그 누군가들에게는 <20세기의 신화>가 매운 처방전이었을 것이다. 나도 그렇게 치료받은 사람 중 하나다. 그 후 내 마음속 우상 하나가 와르르 무너졌다. 나는 그 사실에 오늘도 크게 안도한다.

<20세기의 신화>는 술술 읽히는 책이다. 공동농장에서의 암울한 시절을 생생히 기록하고 있지만 그 안에는 해학과 기지가 넘쳐난다. 기록으로서의 의미와 문학으로서의 재미가 양립한다. 일제하 그리고 마오쩌뚱 체제하에서 십수 년 수인의 삶을 살았으면서도(심지어 다리 하나까지 잃었잖은가!) 그는 ‘살아간다는 것’을 비관적으로 바라보지 않았던 듯싶다. 이 소설에는 비극 속에서도 피어나는 특유의 유머가 있다. 

다만 작품의 역사적 배경이 살벌하니 술술 읽고 나서 남는 잔상은 폭력의 시대에 관한 잔인한 회고일 것이라는 점 염두에 두자. 다 읽고 나면 간담이 서늘해지면서 독자들은 이런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게 될 것이다.

“우리의 삶에서 억압과 폭력의 시대는 진정 종식되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