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 평화는 유지될 수 있는가?
글 윤성욱 충북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한반도 평화친선대사
지난 2년 여 간 우리의 삶은 코로나19라는 전염병에 의해 지배되어 왔다. 조만간 종식될 것이라는 기대도 수차례 있었으나 코로나19는 여전히 우리의 삶 중심에 있다. 이제는 코로나19라는 전염병을 정복하려는 목표를 수정하여 코로나19와 공존을 준비하는 방향으로 정책의 전환이 이루어지고 있다. 다시금 코로나19 이전의 상태로 복귀할 수 있을지에 대한 의문은 있지만 조심스럽게 일상으로의 회복을 기대하고 있는 시점이다.
전 세계를 강타한 코로나19는 우리에게 중요한 숙제를 남겨 주었다. 수백만 명의 목숨을 앗아간 전염병의 확산은 비전통적 안보가 우리 사회의 화두임을 증명해 주었다. 세계화(Globalisation)에 따른 국가 간 상호의존의 증대와 인적, 물적 교류의 확산은 현 시대를 살아가는 중요한 방법이지만, 코로나19 팬데믹의 원인이기도 하다. 국가들은 경쟁적으로 국경을 봉쇄했고 이로 인한 교역의 위축과 경제의 침체, 수출과 노동인력의 유입 차단은 또 다른 문제를 야기했다. 식량 원조가 필요한 국가들이 코로나 사태로 인한 식량수급 부족으로 목숨을 잃는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또한 선진국과 저소득 국가들 간에 코로나19 백신이 얼마나 불평등하게 분배되고 있는지도 우리는 똑똑히 목격했다. 코로나 사태는 전쟁만이 엄청난 인명 피해를 야기할 수 있다는 기존의 사고방식에서 벗어나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음은 분명하다. 군사안보 중심의 전통적 안보 개념에서 전염병을 비롯하여 환경, 자원, 경제 등에 이르기까지 이전에는 크게 부각되지 않았던 다양한 분야들에 우리의 안보를 위협받을 수 있음을 코로나 사태는 명확히 인식시켜 주었다. 그리고 이러한 문제들은 더 이상 어느 한 국가가 해결할 수 없고 전 지구적 협력을 위한 체계 구축이 필요하다는 점도 우리가 떠안은 숙제이다.
이러한 코로나 시국에서 벗어나려고 몸부림 치고 있던 2022년 초, 우리는 또 다시 상상도 하지 못한 현실을 맞이하게 된다. 모든 이들의 예상을 뒤엎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에 대한 군사적 침공이다. 2차 세계대전 이후 다양한 지역에서 무력 충돌이 있었지만 우크라이나 사태에 전 세계적 관심과 우려가 집중되는 이유는 행여나 두 국가 간 무력 충돌이 확전되어 소위 3차 세계대전이 일어나는 것은 아닌지에 대한 불안감 때문이다. 그동안 잊고 지냈던 군사안보 중심의 전통적 안보 문제가 다시 불거진 것이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양측은 모두 결사 항전 의지를 천명하고 있다. 이에 우리는 원치 않는 수많은 잔혹한 장면들–인명 피해, 피난민 행렬, 어린 아이들이나 여성들의 절규 등–을 매일 실시간으로 목격하고 있다.
우크라이나 사태를 보면서 ‘이 지구상에 전쟁의 종식과 영구적인 평화정착은 결코 불가능한 것인가?’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무력 충돌이 양측 모두에게 피해를 줄 것임은 명백한데 과연 이 국가들은 왜 전쟁이라는 최후의 옵션을 선택해야만 했을까? 이러한 질문에 답을 구하기 위해서는 국가라는 행위자와 그 역할에서부터 논의를 시작해야 할 것 같다.
지구상에는 수많은 국가들이 있다. UN 가입 기준으로는 참관 회원국(Observer State)인 바티칸 시티와 팔레스타인을 포함하여 193개국이며, 일부 국가들로부터만 국가로 인정받는 대만이나 코소보 등을 포함하면 200개국 이상이다. 이 많은 국가들 중 가장 불행한 국가는 어떤 국가일까? 경제적으로 빈곤하여 국민 대다수가 기아에 허덕이거나 권위주의 정권 하에서 국민들의 자유가 보장되지 않는 국가들, 또는 기후 변화의 영향으로 소멸 위기에 처한 국가들 등을 우선적으로 생각해볼 수 있다. 그러나 최근의 우크라이나 사태를 보면서 국가 스스로 자국의 운명을 결정할 수 없는 국가도 가장 불행한 국가 중 하나일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자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는 국가의 가장 기본적인 역할을 하지도 못하고, 더욱이 국가의 생존과 운명을 다른 국가의 손에 맡겨야 한다면 진정한 의미의 주권국가라고 칭할 수 없을 것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지금의 우크라이나는 불행한 국가라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주권국가로서 우크라이나가 NATO와 EU 회원국 가입 여부를 결정하는 것은 우크라이나의 몫이다. 주변 강대국인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의 결정을 반대할 명분이 없다. 그러다 보니 이를 빌미로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러시아에 대한 전 세계적 비난이 집중되고 있다.
우크라이나가 이런 상황에까지 이르는 데에는 분명 우크라이나 자체의 문제도 있다. 1991년 소련 붕괴 이후 우크라이나는 내부적으로 친러시아와 친서방 세력 간의 대립과 갈등이 지속되었다. 주변 강대국들 사이에서 영토를 보존하고 주권을 지키기 위해서는 균열이 아닌 내부적 통합과 결속이 필요했음은 자명하다. 이러한 우크라이나의 국내 상황도 러시아에게 우크라이나 침공의 빌미를 제공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우크라이나 사태의 근원은 냉전 종식 이후 진행된 NATO의 동진에서 찾을 수 있다. 1999년 3월 폴란드, 체코, 헝가리를 시작으로 옛 소련에 속했거나 영향력 하에 있던 국가들이 속속 NATO 회원국이 되었다. 독일 통일과 냉전 해체 이후 NATO가 동유럽으로 확장을 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했는지에 대해 미국과 러시아가 서로 다른 해석을 하고 있지만 동진해 오는 NATO 확장은 러시아를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러시아의 2008년 조지아 전쟁과 2014년 크림반도 합병, 그리고 지금의 우크라이나 사태는 NATO의 동진에 맞서기 위한 러시아의 대응이라고 볼 수 있다.
앞서도 언급한 대로 우크라이나든 어떤 국가든 NATO 회원국으로 가입하는 것은 그 국가가 결정할 문제이다. 그러나 우크라이나를 포함한 동유럽 국가들의 NATO 가입, 즉 NATO 동진이 러시아에 대한 위협이나 공격을 목적으로 결정된 것은 분명 아닐 것이다. 오히려 러시아와 근접한 국가들이 안보불안을 느껴 NATO에 가입했다고 이해하는 것이 적절하다. 그러나 문제는 NATO가 러시아 쪽으로 다가 오면서 러시아는 이를 위기로 받아들인다는 점이다. 우리는 이러한 현상을 안보 딜레마(Security Dilemma)라고 부르며, 이는 국가들이 서로를 신뢰하지 못하기 때문에 발생한다. NATO의 동진을 안보 위협으로 인식했던 러시아에게는 우크라이나의 NATO 가입이 일종의 마지노선이었다. 우크라이나의 NATO 가입으로 러시아가 NATO와 국경을 맞대는 상황은 러시아의 안보를 위협하는 최악의 시나리오라는 의미이다.
물론 국경을 접하고도 평화롭게 살아가는 국가들이 대다수이다. 유럽만 놓고 보더라도 수많은 국가들이 서로 국경을 맞대고 있다. 이 국가들은 유럽 대륙에서 전쟁을 종식시키고 영구적인 평화를 정착시키기 위해 통합의 길을 선택했다. 그리고 통합의 과정에서 서로의 국경을 아무런 제약 없이 개방하는 단일시장을 완성했다. 단순히 정치적, 경제적 체제가 동일하고 같은 종교를 믿고 교류가 활발하기 때문에 서로에 대한 위협이 없다고 믿고 국경을 개방한 것일까? 절대 그렇지 않다. 무엇보다도 상대국에 대한 신뢰가 있기 때문이다. 신뢰를 바탕으로 제도를 만들었고, 그 틀에서 협력과 통합이 진행되었던 것이다.
정치 및 경제 체제부터 민족, 종교, 문화, 언어, 역사 등 수많은 분야에서 서로 다르더라도 서로가 서로에게 위협이 되지 않을 것이라는 신뢰를 가지고 살아갈 수 있다고 믿는 것은 어쩌면 지나치게 이상적인 사고라고 비난받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특별한 갈등 없이 상호의존 관계를 맺고 나름 평화롭게 살고 있는 국가들을 상대로 어떤 기준을 설정하여 이들을 갈라치기 하고 자기편에 줄 세우기 하려는 시도가 종종 목격된다. 이러한 시도는 소위 국제무대에서 강대국이라고 평가받는 일부 국가들의 전유물이다. 우크라이나 사태 이전 국제관계 상황을 대표하던 미중 세력 경쟁도, 그리고 지금의 우크라이나 사태에서도 그 갈등의 당사국들은 다른 국가들이 자기편에 서서 똘똘 뭉쳐야 함을 강조하고 강요하고 있다. 그러면서 그들은 상대국을 비난하고 각자의 방식이 정당하다고 주장한다. 서로 상대국이 세계평화를 위협하는 원흉이라고 몰아세운다. 강대국들의 갈등에 대다수의 국가들은 고민에 빠질 수밖에 없다. 어느 쪽에도 편향되고 싶지 않지만 강대국들의 압박은 계속될 것이고, 어느 한쪽의 선택에 따른 경제적 비용과 예상치 않은 안보 위기가 초래될 수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어제까지 친구 같았던 국가가 서로 다른 선택으로 뜻하지 않은 적으로 맞닥뜨릴 수도 있다. 국가들 간 신뢰가 사라짐을 의미한다.
설령 신뢰는 상실했더라도 우크라이나 사태에 직간접적으로 관여된 국가들이 얻을 수 있는 것은 있을까? 러시아가 원하던 대로 우크라이나의 NATO 가입은 어려워졌고 NATO의 동진도 중단이 불가피해 보인다. 지역 패권국으로서 러시아의 존재도 어느 정도 증명했다. 반면 러시아도 전쟁으로 인한 피해가 막심하다. 국제 사회의 전 방위적 제재에 직면하게 되었고 러시아 내 반전 여론도 만만치 않은 상황이다. 우크라이나가 영토를 온전히 보존할 수 있는지는 여전히 불투명하며 국가의 정체성과 방향성은 러시아와의 협상 결과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미국은 러시아에 대한 강력한 제재와 지원에 앞장서고 있다. 그러나 우크라이나 사태를 계기로 미국은 NATO와 유럽, 그리고 러시아의 침공에 반대하는 국가들과의 동맹관계 강화라는 분명한 이익을 얻었다. 국제사회에서 실추되었던 이미지 회복과 함께 패권국의 지위를 지속시킬 수 있는 계기가 만들어진 것이다. 종합해 보면 최대의 피해자는 우크라이나뿐이다.
설령 전쟁이 종식되더라도 미국을 중심으로 한 동맹국과 러시아의 관계 회복은 쉽지 않을 것이다. 강화된 동맹관계를 바탕으로 미국의 대중국 견제도 한층 강화될 수 있다. 대다수 국가들은 강대국들이 조성한 갈등 상황을 그대로 따르는 것 이외에 다른 대안은 없다. 중국이나 러시아가 경제나 에너지 공급 등에서 차지하는 비중을 생각하면 이 국가들과의 관계 악화로 인한 피해도 고스란히 받아들여야 한다. 강대국들이 나서서 긴장 완화와 화해의 국면을 조성하기 전까지 서로를 적으로 규정해야만 할 수도 있다.
우크라이나 사태의 근본적인 원인을 파헤쳐 보면 결국 강대국들이 만들어 놓은 시스템과 그들의 정치적 목적에 의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어쩌면 이것이 국제사회의 현실이라고 우리는 인정할 수밖에 없을지도 모른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강대국들은 세계평화를 항상 주장한다. 그리고 서로의 방식만이 옳다고 주장하며 상대는 신뢰할 수 없는 국가라고 단정한다. 결국 이들이 상호 신뢰를 구축하지 않고 서로를 비난하고 짓밟으려고만 하는 한 평화는 먼 얘기일 수밖에 없다.
2022년은 전 세계가 코로나19 퇴치를 위해 협력하지 못했던 경험을 발판으로 코로나19로 인한 피해를 극복하는데 지혜와 힘을 모을 시기였다. 그러나 우크라이나 사태가 협력이 아닌 갈등 심화의 양상으로 방향을 전환시키고 있다. 또 다시 우리는 평화와 번영이 아닌 생존의 문제에 고민하는 시대를 맞이할 수도 있다. 가장 큰 문제는 위기의 시대가 얼마나 지속될 것인지, 언제 다시 평화의 시대로 전환될지 알 수 없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