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의 개인 병원
남편은 1982년 6월 초에 개인 병원을 열었다. 바젤시는 라인강을 중심으로 남북으로 갈라져 있는데 그는 북쪽 “작은바젤”에서 주로 노동자와 이민 가족들이 모여 사는 구역에 내과 전문 진료소를 마련했다. 그가 굳이 비좁고 보잘것없는 곳에 자리를 잡은 데는 경비 부족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의 정치 사회적 앙가즈망과도 일맥상통했다. 인턴 시절부터 바젤 지역의 노동조합 회원으로 활동하던 그는 연대감에서 노동자층의 현실에 걸맞은 진료소를 만들 생각이었다. 하지만 런던에서 불과 반년 전에 거의 빈손으로 돌아왔던 터라 건축 비용은 친아버지한테 빌린 4만 프랑으로 충당했다. 그 당시 개인병원 설립에 들어가는 평균 비용의 1/5밖에 되지 않는 적은 금액이었다. 그러기에 그는 경비를 줄이려고 퇴직한 동료의 사무실 가구를 싸게 사서 실내를 꾸미고 의료기구들도 주로 중고품을 썼다. 그리고 개업 의사들이 의례 이용하는 매체 광고도 내지 않고 굴지의 약 회사들이 공짜로 제공하는 선전용 약품 또는 음악회나 해외여행의 초청에도 참여하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그의 초라한 진료소는 별로 주목받지 못했다. 그런데다 설상가상으로 젊은 여보조원은 일에 서툴고 성격이 거칠어 환자들의 불평이 잦았고 그 때문에 다시 오지 않는 환자들도 적지 않아 남편에게 심적으로 경제적으로 부담을 줬다. 그런 상황에서 그는 앞에서도 말했듯이 개업을 하자마자 용담 어머니의 거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매부한테 또 2만 프랑을 빌려야 했다. 그래서 처음 이삼 년은 어렵고 어수선했으나 그럼에도 진료소는 꾸준히 그가 원하는 방향으로 나갔다. 그러다 개업 5주년을 맞으면서 남편은 의대 시절 친구와 의기투합하여 근처 큰길 옆의 건물 안에 제법 큰 진료소를 새로이 열었다. 독일 출신 친구는 젊은 시절에 연극배우로 활동하다가 늦게 바젤 의대에서 내과와 심리학을 전공하고 한동안 대학병원에서 인턴으로 있다 1987년에 남편과 합쳤다. 그리고 또다시 2년 뒤에 남편보다 열 살 낮은 젊은 의사가 그들과 어울리면서 셋의 공동 작업이 성공하게 되고 후에 차츰 작은바젤의 주요 진료소로 확장했다.
남편 진료실에는 처음부터 외국인 환자가 많았다. 그런 경향은 시간이 갈수록 더욱 심하여 나중에는 전체 환자의 반절이 외국 사람이었는데, 그래서 그는 바젤에서 외국인 환자가 제일 많은 의사로 알려졌다. 외국 환자들의 출신국 기록을 보면 개업서부터 퇴직할 때까지 30년 동안 그는 유럽 남미 아프리카 발칸 등 4대륙의 100여 나라의 환자들을 치료했다. 처음에는 70년대 경제난으로 일자리를 찾아 스위스로 이민 온 이탈리아 환자들이었다. 그러다 1980년에 군부 쿠데타로 터키 정부가 몰락하면서 1만 명이 스위스로 망명했는데 그중에 몇백 명이 남편의 환자가 되면서 다수가 됐다. 대부분은 민주화 운동에 참여했던 젊은이들로 그중에 고문으로 병든 환자만도 스무 명에 달했다. 역시 터키의 망명자로 남편의 치료를 받다 우리와 친구가 된 부부의 경우를 말하면, 그들도 군정에 항의하는 데모에 참여했다가 경찰에 쫓겨 갓난 딸을 데리고 스위스로 도망 온 망명자들이었다. 그러나 언어 문제로 지리학 전공의 남편 메멧은 음식점의 부엌에서, 문학 전문인 부인 누턴은 약품 회사의 배달 운전사로 돈을 벌었다. 그러다가 독어에 익숙해지면서 좀 더 나은 직장에서 퇴직할 때까지 머물다 90년대 말쯤에 귀국했다. 이스탄불로 돌아간 그들은 육칠 년 지나서 우리를 집으로 초청하고는 3주간 이스탄불에서부터 메멧의 고향인 안티오키아까지 차로 돌아다니며 터키의 명승고적지와 고전의 예술품 박물관으로 우리를 안내했다. 소아시아 지역에 가본 적이 없었던 우리는 예스러운 터키 문화의 다양성에 놀라움과 감탄을 연속했다. 게다가 나는 누턴이 사 준 터키 문학의 대가 오르한 파묵(Orhan Pamuk,1952-)의 독어판 “내 이름은 빨강”을 읽고 그의 작품들에 거듭 열광했다. 문학 못지않게 터키 영화도 관심을 끌었다. 특히 외메르 카브르, 누리 빌게 셀란 감독들의 작품을 좋아했다. 그러던 차에 2002년 체코의 카를로비 영화제에서 “터키영화 회고전”을 보고 영감을 받아 나는 2007년에 “앙카라 영화협회”의 협조를 받으며 “터키영화 회고전”을 전주영화제의 특별 프로그램으로 시사했다.
말이 옆으로 나갔는데, 남편은 외국인 환자를 숱하게 만나면서 자연히 언어 문제에 민감했다. 그는 외국 환자의 병을 정확히 파악하기 위해서는 그들의 언어를 똑바로 이해해야 한다는 생각이었고 그러려면 전문 통역사가 필요했다. 하지만 80년대 스위스 의료계는 이민 환자의 통역 문제에 대해 무관심으로 일관함으로 그에 대한 출판물도 거의 없었다. 그래도 남편은 그 방면에 앞서가는 스칸디나비아와 영어권 나라 전문가들의 글을 찾아 읽고 그들의 강의나 세미나에 몇 번 참석하며 연결선을 만들었다. 그와 동시에 그는 스위스의 의학 전문지와 지역 신문에 같은 주제의 글을 쓰고 이민 문제와 관련된 사회단체들 모임에서 강의했다. 그리고 자신의 진료소에 외국인 환자 중에 언어 문제가 가장 심각했던 터키 말의 전문 통역사를 먼저 고용하고 다른 언어 문제는 필요에 따라 특별 처리했다. 그 일로 남편은 나중에 “개인 병원에 자신의 비용으로 통역사를 고용한 첫 의사”로 스위스 의학계의 기록에 남게 되었고 그가 쓴 글들은 의학계와 바젤 통역 전문학교에서 참고 재료로 쓰이고 있다.
남편은 의사들의 왕진이 거의 없던 80년대에 가정 방문을 계속했다. 그런데 그것이 밖으로 알려지면서 “구세군 요양원”으로부터 그들의 환자를 맡아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흥미롭게도 구세군 쪽에서는 남편이 무신자인 줄을 알면서도 그를 선택한 것인데 그에 남편은 기꺼이 찬성하고 25년 동안 그들과 협조했다. 구세군 요양원에는 밑바닥 생활로 인한 별별 트라우마를 입은 남녀 20여 명이 살고 있었다. 대부분 약 중독, 정신 이상, 조현병 또는 알코올과 담배 중독자들이었고 그중에는 외국인도 있었다. 구세군 요양소 말고도 남편은 2000년대 초에 “여성의 집”의 담당 의사로 임명받았다. 바젤시와 여성단체들이 지원하는 그곳은 남편의 폭력을 피해 도망친 수무 명 정도의 여인들이 숨어 사는 피난처로서 서너 명 외국 출신 여자들도 있었다. 남자 방문이 금지된 “여성의 집”에서 남편은 퇴직할 때까지 10년 동안 남성 폭력의 피해자들을 치료했다. 남편은 의학뿐 아니라 정치에도 관심이 많았다 예를 들어 1985년 바젤의 지역사회가 관리하는 공공용의 재활원 “크리소나크리닉”이 투자업자들에 의해 일등환자를 위한 고급휴양소로 바뀔 위기에 처했을 때 그는 그에 반대하는 조직체를 만들었고 국민투표에서 성공함으로 재활원을 구출시켰다. 그리고 1987년에 건강보험사들의 경쟁으로 환자들의 부담이 커지는 걸 막기 위해 그는 칸톤 바젤에서 건강보험 제도의 단일화 운동을 펼쳤다. 프로젝트는 상당한 주목을 받았지만 결국 실패로 끝났다.
남편은 2012년 66세에 퇴직했다. 스위스에서 법적으로 노동 시간은 일주일에 평균 42시간이다. 그럼에도 대부분 의사들이 그렇듯 그는 어느 곳에서 작업을 하든 보통 50-60시간을 일했다. 그러던 그가 갑자기 일을 그만뒀다. 그래서 내가 병원 일을 빨리 잊을 수 있게끔 멀리 한국으로 가서 한동안 쉬자고 했더니 그도 금방 찬성했다. 그리하여 우리는 그해 가을 한국으로 가서 두 달 동안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결혼 후 처음으로 긴 여행을 즐겼다. 지리산의 화엄사에서 템플스테이를 하고 안동 하회마을에서 안동 탈춤을 보고 대전의 이응노 화가 미술관에서 그의 작품 전시회를 구경하는 등 여유롭게 돌아다니다 집으로 돌아왔다.
임안자 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