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다섯 번째 개인전 가진 조각가 엄혁용
예술과 함께한 30년의 삶
글 김하람 기자
“작업은 유희이고 삶이에요”
30년, 지난한 세월을 작업과 함께 해온 조각가 엄혁용 교수를 그의 서른다섯 번째 개인전
첫 번째 개인전을 준비하면서 개인전 주기를 2년을 넘기지 않겠다는 다짐을 30년을 이어왔다. 35회 개인전이니 1년에 두 번 개인전을 연 적도 있다는 것. 물성을 다루는 작가로서 10회도 많이 했다는 평을 받을 정도니 그의 작업량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는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그는 1991년 중앙미술대전에서 알루미늄 물성 작업으로 종합대상을 수상했다. 지금은 기술이 발달해 쉽게 용접할 수 있지만, 당시에는 용접을 할 수 없는 상황. 그는 볼트와 너트를 조립해 작품을 만들어냈다. 이 작업으로 주목을 받은 그는 육삼갤러리의 전속작가로 선정되어 활동을 시작했다. 알루미늄 작업을 4회 정도 이어가던 그는 ‘훔쳐보기’라는 콘셉트로 여성의 다이어리를 20배 확대해 유리에 전사하는 작업을 했다. 2000년대 지하철 7호선이 개통 됐을 때 지하철 한 칸을 맡아 전시하기도 했다. 모방과 복제, 패러디와 차용이라는 포스트모더니즘 예술의 관점에서 화장실 낙서를 차용한 작업이었다. 이후 도자기 작업을 하다 다시 금속 작업으로 돌아왔다. 결혼을 하고 늦둥이를 얻었을 때다. 아이를 키우면서 책을 많이 읽어줬는데, 그때부터 작품에 책이 등장하게 된다. 책이라는 주제를 다루면서 물성도 나무로 바뀌었다. 책과 나무 작업을 하면서 자연스레 직지와 완판본에 관심을 가지게 됐다. 책 작업은 유일하게 10년 이상 지속해온 작업으로 여전히 이어오고 있다. 그는 작업에 ‘권태기’를 빨리 느낀다고 표현했다. 다양한 주제와 물성에 대한 연구는 그가 작업을 오래 이어올 수 있었던 원동력이 됐다.
“30년동안 스타일 하나만 고집했으면 이렇게 오래 작업하지 못했을 거예요. 작가는 항상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야 한다는 마음가짐이 있는데 똑같은 작업을 하다보면 작가로서 고민이 생기게 되죠. 매번 작품의 키워드를 바꾸고 물성을 바꾸니까 즐거움이 지속돼요.”
나무작업을 4년간 이어온 그는 이제 다시 초심으로 알루미늄을 사용해 책의 다양한 모습을 형상화한 작품을 선보인다. 목조각으로 이어오던 ‘책’이라는 주제를 금속으로 재해석한 것. 이번 35회 개인전은 그 과도기로 나무와 알루미늄으로 작업한 책을 주제로 하는 작품을 동시에 선보였다. 인위적인 공간인 실내에는 자연성을 상징하는 목조각 작품을, 자연의 공간인 미술관 뜰에는 인위성을 상징하는 알루미늄 작품을 배치하여 인공과 자연을 직접적으로 대비시켰다.
“나이가 들다보니 작품에 대한 군더더기를 줄이려고 해요”
로버트 모리스나 칼 안드레의 작품들처럼 책의 형상을 가장 미니멀한 형태로 환원시키고 책장의 흔적만 남겼다. 최근 기술의 발달로 알루미늄을 다루기 쉬워진 만큼 이전의 알루미늄 작업에서 시도하기 어려웠던 미니멀리즘을 콘셉트로 작업하고 있다. 알루미늄은 차가우면서도 광택으로 인해 표면에 주변 사물이 비치는 특성을 지녔다. 그는 사포질을 통해 광택을 죽이면서 오히려 따뜻한 느낌을 주어 주변 환경에 자연스럽게 녹아나도록 했다.
“작품에 ‘손대지 마시요’나 ‘만지지 마시요’가 붙어있는 경우가 많은데, 전시장에 가면 만져보고 싶잖아요. 페인팅 종류는 만지지 않는 것이 좋지만, 물성을 가지고 하는 작업들은 물성의 느낌을 만져보고 느껴야 한다고 생각해요. 예술은 삶이고 삶이라는 것은 호흡인데, 작품으로 호흡을 하려면 오감으로 느껴야 해요. 그런데 시각으로만 감상할 수 있게 하는 것은 부족한 면이 있죠.”
야외에 설치된 작품에 자연스럽게 앉은 그는 ‘스트리트 퍼니처’ 개념을 설명했다. 그는 대부분의 공공조형물을 벤치형으로 만든다. 작품과의 스킨쉽이 있어야 더 쉽게 접근할 수 있기 때문이다.
최근 전주의 도시 곳곳을 예술로 물들인 버스 정류장, 지붕없는 미술관, 야호 미술학교 등에는 그의 손길이 닿았다. 무엇보다 이 작업들이 의미 있는 이유는 제자들과 함께 했기 때문이다. 대학원의 학생들은 대부분 전업 작가의 길을 목표로 한다. 그들에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빵’이라고 얘기한다. 먹고 살 수 있는 것, 즉 돈이다. 현대미술은 돈이 많이 든다. 특히 물성 작업은 재료비, 운반비, 설치비만 해도 만만치 않다. 학생들이 작업하면서 빵을 충족할 수 있도록 그는 그의 작업들을 제자들에게 나눠주고 있다. 버스 정류장이 대표적이다. 뿐만 아니라 제자들의 작업 환경을 위해서도 노력하고 있다. 최근 오거리 광장에 설치된 거대한 총 구조물은 엄 교수 제자들의 작품이다. 세 여학생이 만든 이 작품이 철거되지 않고 전시되어 시민들과 함께 소통할 수 있도록 여건을 마련한 것이 엄 교수다. 그는 지역의 청년 예술가들에게 더욱 활발히 활동할 수 있는 환경이 갖춰지기를 바란다.
물성을 다루는 작업이 거친 만큼 이제는 몸이 많이 망가졌다. 고민이 늘었지만 작업이 곧 삶인 그는 여전히 일상처럼 끊임없이 창작의 길을 걸어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