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의 역사,
다시
천년의 미래
사진 문화재청
익산의 상징과 같은 미륵사지 석탑. 학교 교과서에 미륵사지 석탑이 나오면 내심 자랑스러웠다. 우리나라 최대 규모의 탑이 같은 지역에 있다니... 미륵사지 석탑이 선화공주 설화와 연관이 있다는 사실은 한참 뒤에 알았다. 설화가 실제 역사와 이어지는 과정에서 역사라는 학문에 재미를 느꼈다. 역사가, 문화재가 고리타분한 것이 아니라 이렇게 재미있을 수도 있구나! 그 이후로 문화재를 보면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의 모습을 상상해보곤 한다.
과거와 현재가 맞닿는 순간 과거의 유산들이 현재에 의미를 갖게 된다. 익산 곳곳에 남아있는 백제 후기의 문화재에는 다양한 이야기가 담겨있다. 그 이야기들이 다시 현재와 맞닿을 때 문화재와 함께하는 즐거움이 익산의 새로운 원동력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이야기를 찾아 익산으로 떠나본다.
설화로 보는 익산의 역사
선화공주님은
남 몰래 사귀어
맛둥[薯童]도련님을
밤에 몰래 안고 간다 (서동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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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화공주를 찾아서 Ⅰ 미륵사와 미륵사지 석탑
미륵사와 무왕 금마 천도설
익산시의 로고이기도 한 미륵사지 석탑. 우리나라 최고, 최대 석탑이며, 동아시아 최대 규모로 1962년 국보로 지정됐다. 미륵사지석탑이 위치한 미륵사는 현재 절터만 남아 있으며 동서로 172m, 남북으로 148m, 2만 5천 평에 달해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절터이며, 백제 최대 사찰이다. 이러한 사찰이 왜 백제의 수도였던 위례성, 웅진, 사비가 아닌 익산에 위치해 있을까. 창건에 관한 기록이 적혀있는 삼국유사에서 그 이유를 유추해볼 수 있다.
제30대 무왕의 이름은 장이다. 어렸을 때 이름을 서동이라고 하였고 도량이 커서 헤아리기 어려웠다. 늘 마를 캐다 팔아서 생업을 삼았으므로 나라 사람이 그로 인해 이름을 지었다. 신라 진평왕의 셋째 공주 선화(善花)[혹은 선화(善化)]가 더없이 아름답다고 듣고, 머리를 깎고 (신라의) 서울로 왔다. 마로써 마을의 뭇아이들을 먹이니 아이들이 그를 가까이 따랐다. 이에 노래를 지어 뭇아이들을 꼬여 부르게 하니, 선화공주님은 남 몰래 정을 통해 두고 서동방을 밤에 몰래 안고 간다. 동요가 서울에 두루 퍼져 대궐에까지 달하니 백관이 임금께 극간하여 공주를 먼 곳으로 귀양 보내게 되었다. 떠나려고 할 때 왕후는 순금 한 말을 주고 가게 하였다. 공주가 귀양 살 곳으로 가는데 서동이 도중에 나와 절하고 장차 시위하여 가고자 하였다. 공주는 그가 어떻게 오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었으나 우연히 믿고 기뻐하였고 이로 인해 따라가다가 몰래 정을 통하였다. 그 뒤에 서동의 이름을 알고 동요의 영험함을 믿었다. ••• 서동은 인심을 얻어 왕위에 올랐다. 하루는 왕이 부인과 함께 사자사로 가려고 용화산 아래 큰 못가에 이르자 미륵삼존이 못 가운데서 나타나므로 수레를 멈추고 경배하였다. 부인이 왕께 이르기를, “이 곳에 큰 가람을 세우는 것이 진실로 바라는 바입니다”라고 하니 왕이 이를 허락하였다. 이에 미륵 삼회를 법상으로 삼아 전•탑•낭무를 각각 세 곳에 세우고 절 이름을 미륵사[『국사』에는 왕흥사라고 하였다]라고 하였다. 진평왕은 여러 장인을 보내 이를 도왔다. 지금도 그 절이 남아있다.
삼국유사 2권 기이2에 나오는 무왕조를 요약한 내용이다. 삼국유사는 삼국사기와 더불어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역사책이다. 승려 일연 혼자 기록한 야사이나 삼국사기에서는 볼 수 없는 신화나 전설, 시가 등 많은 고대 사료들을 수록하고 있어 우리나라의 고대 문화를 밝히는데 중요한 사료적 가치를 가지고 있다. 내용을 살펴보면 용화산 아래 큰 못에 미륵삼존이 출현하자 왕의 부인이 무왕에게 청해 미륵사를 창건했다고 한다.
미륵삼존은 미래에 오기로 내정되어 있는 미래불, 미륵을 숭배하는 미륵신앙을 배경으로 한다. 미륵삼존은 세 차례의 설법을 통해 석가모니가 구제할 수 없었던 중생을 남김없이 교화한다. 백제 말기, 나라가 기울어지고, 백성들이 살기 어려워 지면서 자신들을 구원해줄 미륵에 대해 고대하는 미륵신앙이 널리 유포됐다. 미륵신앙의 미륵삼존불이 세 번의 설법을 하기 위한 장소가 바로 미륵사다. 백제인들의 구원을 염원하는 소망이 집결된 곳으로 이해할 수 있다.
미륵사 창건에 있어 무왕의 정치적 의도도 살펴볼 수 있다. 백제는 성왕대(26대 왕, 523-554년) 부흥을 꿈꿨으나 신라 진흥왕과의 전쟁에서 패배, 국가 중흥의 기회를 상실했다. 신라 뿐만 아니라 고구려의 공격까지 받고 있는 백제. 무왕은 금마를 중심으로 국가 중흥을 이루려는 시도로서 대규모 사찰을 금마에 지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는 백제시대 대가람 경영이 수도를 중심으로 이뤄졌으며, 미륵사는 백제뿐만 아니라 당대 최대의 가람으로서 그 위상이 높았던 것을 통해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여기에 백제 후기 궁궐의 구조와 기능, 축조과정을 그대로 보여주는 왕궁리 유적을 더해 무왕의 금마 천도설을 주장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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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륵사를 세운 무왕의 왕비는 누구인가
삼국유사를 바탕으로 미륵사를 무왕이 창건했다고 추정하나, 어디까지나 설화이고 야사이기 때문에 신빙성 있는 자료로는 인정받지 못했다. ‘설’ 뿐인 주장을 뒷받침할 근거가 나타났으니, 바로 미륵사지 조사•발굴 과정을 통해 밝혀진 절터와 사리장엄이다.
발굴조사 결과 미륵사가 3원 1가람의 독특한 가람구조를 가진 사실이 밝혀졌다. 대부분의 백제 사찰은 [탑1 금당1 강당1]의 1원 1가람의 가람구조를 가졌으나 미륵사는 [탑3 금당3 강당1]으로 마치 세 개의 절이 합쳐진 듯한 형태를 가졌다. “미륵삼회를 법상으로 삼아 전•탑•낭무를 각각 세 곳에 세우고 절 이름을 미륵사라고 하였다”는 삼국유사의 내용이 사실과 일치함을 밝혀낸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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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보다 결정적인 증거는 미륵사 세 개의 탑 중 유일하게 남아있는 ‘서탑’(미륵사지 석탑)에서 나왔다. 절은 부처의 말씀이 전해지는 곳으로 절의 탑에는 부처의 몸에서 나온 불사리를 모시기 위한 그릇 ‘사리장엄구’가 있다. 2009년 미륵사지 석탑 해체조사 중 1층 심주석 중간에서 발견된 사리장엄구는 건립 당시 봉안된 모습 그대로 확인돼 많은 주목을 받았다. 가로 25㎝, 세로 25㎝, 깊이 27㎝의 방형 사리공 안에서 발견된 유물이 무려 9,900여 점에 이른다. 이중 미륵사의 발원자, 건립 배경, 건립 시기 등을 알리는 발원문 「금제사리봉영기(金製舍利奉迎記)」는 학계에 큰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좌평(佐平) 사택적덕(沙宅積德)의 딸인 백제 왕후가 재물을 희사해 사찰을 창건하고 기해년(己亥年, 639)에 사리를 봉안해 왕실의 안녕을 기원한다는 내용이다. 창건 연도가 639년. 백제 무왕이 맞다. 그런데 삼국유사에 따라 미륵사 창건을 청한 무왕의 왕비가 ‘선화공주’라고 추정했는데, ‘사택적덕의 딸’이라고 나온다. 동심이 깨지는 듯한 느낌이 난다. 그러면 선화공주 설화는 어떻게 되는 것일까.
선화공주를 찾아서 Ⅱ 쌍릉
익산에는 선화공주 설화를 배경으로 하는 유적이 한 곳 더 있다. 바로 쌍릉이다. 2기의 무덤이 남북으로 약 180m를 사이에 두고 나란히 자리하고 있기 때문에 쌍릉이라고 부른다. 백제 후기 굴식돌방무덤으로 부여 능산리의 백제왕릉과 유사하다. 크기가 조금 더 크고 북쪽에 있는 능을 대왕릉, 규모가 약간 작은 능을 소왕릉라고 부른다. 1963년 1월 21일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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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왕릉급 무덤의 주인은 오래도록 밝혀지지 않았는데, 삼국유사에 따라 이곳에 미륵사지를 지은 무왕과 선화공주의 무덤이라고 전해져 내려왔다. 금마를 중심으로 백제 부흥을 꿈꾼 무왕이 사랑하는 아내이자 왕후 선화공주와 나란히 묻혔다는 것. 최근 이 추정뿐인 주장에 과학적 근거가 더해졌다.
쌍릉 역시 미륵사지 석탑과 마찬가지로 일제강점기 때 일본에 의해 발굴, 조사된 기록이 있다. 이때 남긴 ‘야쓰이 비망록’에서 쌍릉이 백제 말기 왕족, 또는 그에 준하는 자의 능묘임을 밝혔으나 그 이상의 기록은 없었다. 애초에 일본은 백제를 일본의 역사에 편입하기 위해 발굴조사를 진행했다. 화려한 부장품은 오히려 백제의 독자적인 문화의 근거가 될 뿐이었기에 그들에게는 유의미한 발굴결과가 아니었을 것이다. 해방 이후로도 무관심 속에 방치되어 있던 쌍릉이 다시 주목을 받게 된 것은 최근의 일이다.
2017년 백제왕도 핵심유적 보존관리 사업의 일환으로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 원광대학교 마한백제문화연구소, 익산시가 함께 쌍릉 발굴 조사를 진행했으며, 대왕릉 석실 끝부분에서 그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나무상자를 발견하게 된다. 나무상자 속에는 무려 102개의 인골 조각이 담겨있었다. 무덤의 주인을 밝힐 수 있는 중요한 유물이 발견된 것이다. 고고학, 유전학, 법의인류학, 생화학, 암석학, 임산공학, 물리학 등 관련 전문가들이 참여해 인골의 성별, 키, 식습관, 질환, 사망시점, 석실 석재의 산지, 목관재의 수종 등을 철저히 조사했다.
결과, 7세기 초중반 숨진 키 161cm에서 최대 170cm 정도의 60-70대 이상 노년층 남성의 것임이 밝혀졌다. 이런 정황에 따라 600년에 즉위해 641년 사망한 백제 무왕의 무덤일 가능성이 높다고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는 발표했다.
새로운 증거에 학계는 흥분했다. 그리고 자연스레 소왕릉의 주인이 누구인지에 대해서도 관심이 쏠렸다. 미륵사지석탑에서 발견하지 못했던 선화공주의 흔적을 혹시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도 더해졌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소왕묘는 도굴이 심해 어떤 부장품도 남아있지 않아 무덤의 주인이 누구인지 전혀 알아낼 수 없었다. 소왕릉에서도 선화공주의 흔적을 발견하지 못한 것. 그렇지만 반대로 생각해보면 무덤의 주인이 선화공주가 아니라는 증거 역시 발견되지 않았다고도 할 수 있다.
이야기 가득한 익산
길고 긴 이야기 끝에 도달한 결론은 ‘알 수 없다’는 것. 익산의 역사를 둘러싼 두 개의 의문, ‘무왕은 정말 금마를 왕도로 경영했을까’와 ‘선화공주 설화는 사실일까’는 여전히 풀리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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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륵사지와 왕궁리 유적, 백제 왕실 사찰로 추정되는 제석사지, 중국 육조시대 관세음신앙을 기록한 고서로 일본 교토 청련원에서 발견된 <관세음응험기>에 나오는 익산 천도 기사 등을 근거로 무왕이 익산(금마)으로 천도했다는 주장이 무왕 천도설이다. 그러나 삼국사기 등의 기사에는 금마 천도의 기사가 전혀 없으며, 무왕대 사비가 여전히 수도로 경영됐음을 알 수 있다(삼국사기 632년(무왕34) 사비의 궁전 중수, 634년(무왕35) 궁남지 축조 등). 여러 정황에 따라 미루어 짐작해보면, 금마에 별도에 행궁을 설치했을 수도 있으며, 두 개의 수도로 운영했거나, 천도를 계획만 했을 뿐 실행하지 않았거나, 또는 좌절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아직 명확히 밝혀진 부분은 없으며 앞으로 더 연구가 필요한 부분이다.
선화공주 설화 역시 동일하다. 삼국유사에서 선화공주 이야기에 이어 ‘왕비’가 등장하기 때문에 대부분 왕비를 선화공주라 해석했지만, 그 왕비가 선화공주가 아닐 수도 있다. 선화공주가 이른 나이에 죽었을 수도 있고, 미륵사 창건이 무왕 말년에 이루어졌으니 그사이에 선화공주가 권력다툼에서 밀려났을 수도 있다. 무왕이 금마를 중심으로 백제를 중흥하려 했다면 그 지역 유지인 사택적덕의 여식을 왕비로 맞이해 미륵사를 창건했을 수도 있다.
이 모든 것은 어디까지나 가설일 뿐이다. 어쩌면 이 모든 가설을 뛰어 넘는 새로운 기록•유물이 발견될지도 모른다. 누군가에게는 명확히 밝혀내야 할 가설일 수도 있지만, 누군가에게는 그 자체로 의미 있는 이야기일 수도 있다. 명확하지 않다는 것은 그만큼 다양한 상상을 가능하게 하기 때문이다. 중심이 되는 서동과 선화공주 설화를 두고 많은 이야기들이 쏟아져 나온다. 유적을 둘러보며 나눌 수 있는 대화가 더욱 풍성해진다. 이렇게 재미있는 이야기를 가진 도시가 또 있을까. 익산만이 가진 콘텐츠이며 익산에서만 맛볼 수 있는 즐거움일 것이다.
비대칭 미륵사지로 돌아보는 ‘복원’의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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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19년 4월 무너진 미륵사지 석탑(서탑)이 해체•수리를 마치고 17년 만에 그 모습을 드러냈다. 현존하는 우리나라 최고(最古), 최대(最大)의 석탑의 위용을 다시 만날 수 있을까 하는 관심이 모였지만, 그 모습은 완성된 탑의 형태가 아닌 한쪽 몸체가 허물어져 있는 형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륵사지 석탑 보수 공사는 우리나라 석조문화재 수리 역사에 의미 있는 발자취를 남겼다는 평을 받는다. 이에 반해 1992년 복원된 동탑은 20세기 문화재 복원 최악의 사례로 꼽히기도 한다. 양극의 평가를 받는 미륵사지 동탑과 서탑은 문화재 복원이 어떠해야 하는지 질문을 던진다.
무엇을 위한 복원이었나
무너진 미륵사지 석탑(서탑)에 콘크리트를 바른 일본의 비미학적이고 비역사적인 보존은 익히 알려진 사례다. 일본은 한반도의 역사를 일본 역사에 편입하기 위해 식민통치 이전부터 한반도 내 문화유산을 조사했으며, 강제 병합 이후로는 조선총독부의 주도로 실시했다. 미륵사지에 대한 조사는 1910년부터 1932년 사이 네 차례에 걸쳐 진행됐으며, 당시 조사 자료를 살펴보면 미륵사지 석탑의 남쪽과 서쪽이 무너져있으며, 석탑과 당간지주를 제외한 대부분에 논밭과 민가가 들어와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석탑에 콘크리트를 바른 것은 1915년이다. 콘크리트 보수가 석조문화재 보존관리 측면에서 부정적이지만 이마저도 없었다면 6층까지의 모습조차 남아있지 못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에 입 안이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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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 가치로서 어느 문화재보다도 뛰어난 미륵사지 석탑은 100여 년간 콘크리트에 뒤덮여있었다. 미관상의 문제뿐만 아니라 콘크리트가 문화재를 손상시키고 있었기 때문에 1999년 문화재위원회에서 해체보수가 결정됐다. 문제는 보수 방법이었다.
당시는 물론, 지금까지도 미륵사지 석탑의 원래 형태에 대해서 정확히 밝혀진 사실이 없다. 1992년 복원된 동탑은 동탑지에서 발견된 노반석과(받침돌) 옥개석(지붕돌)을 바탕으로 탑의 비례를 추산해봤을 때 9층이었다는 결론을 내리고 복원을 강행했다. 근거가 될 만한 유물은 있으나, 원형에 대해 명확히 밝혀지지 않은 상황이었다. 석재에 대한 연구 없이 일반적인 화강암을 사용했으며, 전통적인 방식이 아닌 현대적인 방식으로 돌을 다듬어 만든 그야말로 모조품 제작에 가깝다는 혹평을 받았다.
미륵사지 석탑 보수 기본원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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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탑은 동탑과 달리 부재가 남아있었기 때문에 전혀 다른 상황이다. 복원에 착수한 국립문화재연구소는 동탑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 복원 방법에 심혈을 기울였다. 문화재위원회는 1999년 해체 수리 결정하고 해체조사를 진행하면서 보수의 구체적 방법을 정하기로 했다. 2001년부터 2010년까지 해체를 완료한 후 문화재위원회는 국제적인 문화재 보존 이념에 기초하여 ‘미륵사지 석탑 보수 기본원칙’을 정했다.
첫째, 미륵사지 석탑은 7층 이상의 부재가 거의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에 추론에 의한 복원이 되지 않도록 남아있던 6층까지 보수•정비하여 역사성과 진정성을 보존한다.
둘째, 원형 보존을 위하여 훼손된 부재는 과학적 방법을 통해 보강 후 재사용 비율을 높이고 원형이 잘 남아있는 것은 최대한 보존, 활용한다.
셋째, 구조적 안정석 확보 등 원래의 기법만으로 유지가 어려운 경우 실험 연구 등을 통해 검증된 현대적 기법을 최소한으로 보완, 보강토록 한다.
넷째, 조사, 연구, 보수 과정은 정밀하게 기록하고 자료화 및 공개하여 활용되도록 한다.
결론은 아는 만큼, 보존을 위한 복원을 진행하겠다는 것이다. 미륵사지 석탑 보수 기본원칙에 따라 2013년부터 보수 정비 공사에 착수했다. 81%까지 석탑 원부재 재사용 비율을 올리고, 불가피하게 신석재를 사용할 경우 원부재와 가장 유사한 석재를 사용했다. 미륵사지 석탑에 사용된 석재는 미륵산에서 채석한 것으로, 동일한 곳에서의 채석이 어려웠기 때문에 익산 지역 채석산지에서 가장 유사한 화강암(황등석)을 선정했다. 신부재 가공방식 역시 혹두기, 정다듬, 도드락다듬 등 전통적인 수작업 방식을 택해 원부재와 최대한 조화를 이루도록 했다.
문화재 복원, 역사를 기록하는 마음으로
서탑은 해체를 통한 수리를 결정한 지 20년, 실제 해체 수리 작업을 해온 지 17년 만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 모습이 과거의 영광을 재현했느냐 하면 긍정하기는 어렵다. 원형을 되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화재 자체의 가치를 살리고 해석의 여지를 둔 복원의 선도적인 사례라는 점에서 큰 시사점이 있다.
선화공주 설화와 마찬가지로 밝혀지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앞으로 연구 가능성을 열어두어야 한다. 우리의 현재 행적이 미래의 역사가 된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섣부른 복원은 잘못된 역사를 기록하는 것과 같은 선상에 있다. 1992년 미륵사 동쪽 석탑이 9층으로 복원된 뒤 벌써 20년이 흘렀다. 그 이후로 아직 미륵사지 석탑의 원형이 밝혀지지 않았음에도 층수가 9층이었음을 기정사실화해서 작성한 기사들이 있다. 동쪽의 9층 석탑을 온전한 상태로 판단하고, 동탑을 기준으로 6층까지만 보수한 서탑을 불완전하다고 평가하기도 한다. 엄밀히 말하면 동탑 역시 층수와 형태가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은 상태에서 복원됐기 때문에 온전하다고 말할 수 없다. 이러한 기사나 자료들이 쌓이면 후대에 잘못 해석할 근거를 남겨두는 것이 된다. 동탑은 그 웅장한 모습으로 백제 후기 문화를 상상하는 데 도움을 주는 긍정적인 면도 있다. 하지만 원형에 대해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음도 생각해야 한다. 중요한 것은 그 모든 과정과 밝혀진 사실에 대해 명시하는 것이다.
역사유적은 포토 스팟이 아니다. 과거의 놀라운 기술성과 예술성에 감탄하지만, 무엇보다 타임머신을 탄 듯 과거의 한 장면을 보여주는 역사성에 감격하기도 한다. 수백, 수천 년의 세월을 지내온 석재 하나하나가 역사의 흔적이다. 백제의 멸망도, 일제강점기의 역사도 모두 품고 있는 것이 무너진 미륵사지 석탑이다. 복원된 미륵사지 석탑 앞에서 우리는 백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1,400년의 시간을 만나는 특별한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익산, 과거에서 미래를 보다
백제는 멸망 이후 다른 나라의 역사가 덧입혀지는 과정 가운데 많은 유물이 소실됐다. 신라의 수도였던 경주와 같이 일정한 도시에 과거의 풍경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곳은 드물다. 그렇지만 최근에 이루어진 쌍릉 조사와 미륵사지 석탑 복원 사례는 백제문화를 재조명하는 계기가 되었고, 그 과정에서 익산이 더욱 주목받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규모의 사찰인 미륵사지에 들어서면 백제 후기 석조 기술의 우수성을 보여주는 미륵사지 석탑을 만날 수 있다. 궁궐의 구조를 상상하며 걸을 수 있는 왕궁리 유적은 잘 정돈되어 산책하기에 좋다. 무엇보다 왕궁리 오층 석탑의 고즈넉한 낙조 풍경이 일품이다. 익산시는 문화재를 알리기 위해 문화재야행, 시티버스투어 등 적극적으로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으며, 국립익산박물관 등 다양한 관광자원 인프라를 구축하고 있다. 또한 공주, 부여와 함께 세계유산에 등재된 유적지(8개소, 익산 미륵사지 유적, 왕궁리 유적 포함)를 중심으로 26개 핵심 유적에서 해마다 ‘백제문화유산주간’을 개최해 문화재 활용에 앞장서고 있다.
익산의 백제문화유산은 오래전부터 익산의 정체성과 원동력이 되어왔으며, 그 힘은 여전히 지속되고 있다. 발굴과 조사, 복원과 보수는 가장 기초적인 작업이다. 이제는 앞으로 더 발전시켜나가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할지에 대한 고민이 필요할 때다. 꾸준한 연구와 노력으로 백제문화유산이 익산의 유산으로 더욱 빛나기를 기대한다.
김하람 기자•사진 문화재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