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3회 전주국제영화제가 열흘간의 영화 대축제를 마무리했다. 엔데믹 시대의 가능성을 선언하고 영화제의 축제성을 회복하는 것을 목표로 화려하게 개막한 제23회 전주국제영화제는 영화제 자체 방역 자문단을 신설하여 방역에 노력을 기울이는 한편, 오프라인 GV, 다양한 클래스 프로그램들, VR특별상영을 마련해 축제와 방역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았다.
국제경쟁의 대상은 환경 보호 활동가인 조이 루커스가 캐나다의 세이블 섬에서 지내며 일어나는 일을 잔잔한 시선으로 바라본 제클린 밀스 감독의 <고독의 지리학>이, 한국경쟁의 대상은 오랜 기간 식품공장에서 일한 정순이 동료 영수와 연인 사이로 발전하게 되고 영수가 정순의 동영상을 촬영한 직후 생기는 일을 다룬 정지혜 감독의 <정순>이 수상했다.
시릴 쇼이블린 감독의 <시계공장의 아나키스트>가 작품상을, 휴가 후미아리 감독의 <도쿄의 쿠르드족>과 아나이스 타라세나 감독의 <스파이의 침묵>은 심사위원특별상을 받았다. 배우상은 <윤시내가 사라졌다>의 오민애 배우와 <사랑의 고고학>의 옥자연 배우가 수상했다. 김정은 감독의 <경아의 딸>은 왓챠가 주목한 장편상을 수상한 데 이어, CGV아트하우스상 배급지원상까지 받았다.
전주국제영화제는 전주프로젝트 ‘전주숏’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전주영화인상을 신설하여 시상하는 등 전북 지역을 기반으로 창작 활동을 벌이는 창작자를 집중적으로 지원하고 육성하기 위한 여러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특히 올해 6회째를 맞는 전주국제영화제 지역공모 부문의 선정작은 총 5편으로, 장편 1편과 단편 32편 가운데 단편 5편이 선정돼 ‘코리안시네마’ 섹션에 소개되었다. 공모의 양적 측면과 질적 측면에서 모두 성장이 돋보였고, 그 가운데 고경수 감독의 <문제없어요♪>가 전북 지역 영화인에게 시상하는 ‘J 비전상’의 올해 수상작으로 선정됐다.
또한 온라인 축제에서는 즐길 수 없던 다양한 오프라인 행사들이 마련되었다. 개막전야제 <전주영화제와 함께하는 나래코리아 콘서트>, 뮤직 페스티벌 , 거리 공연 프로그램 <버스킹 인 전주> 등의 공연 프로그램이 외부 단체와의 협력을 통해 진행되었고, 많은 사람들에게 호평을 받았다. 특히 공연 첫날인 5월 5일에는 1,800여 명의 관객이, 이튿날에는 1,100여 명의 관객이 동원되었다. 팔복예술공장에서 진행된 100 Film 100 Posters는 제23회 전주국제영화제 상영작 101편의 포스터를 101명의 디자이너가 제작하는 특별전시로, 올해 8회째를 맞아 전주국제영화제의 간판 행사 중 하나로 자리 잡았다.
전주 시민들만을 위한 여러 가지 행사도 준비되었다. 올해 역시도 전주 시민을 대상으로 사전 매표소를 운영했으며, 전주시네마타운에서 특별상영회를 열어 전주 시민은 별도의 티케팅 없이 <리틀 포레스트>(2018), <낫아웃>(2021), <마리 이야기>(2001) 등의 작품을 관람할 수 있었다. 지역의 명소에서 전주국제영화제 상영작을 관람하는 ‘골목상영•야외상영’ 프로그램의 경우 260석 11회차 상영을 진행하여 225명의 관객을 맞았고, 야외상영 프로그램은 700여 명의 관객이 다녀갔다.
올해 전주국제영화제 오프라인 극장 관객은 폐막일 전일 기준으로 47,171명으로 집계되었다. 전체 상영 회차 472회 중 244회가 매진되어 51.7%의 매진율을 기록하기도 했다. 이에 집계가 되지 않은 특별상영과 공연의 관객을 포함하면 열흘 사이 5만여 명이 넘는 관객이 영화의거리를 찾았다고 전했다.
한편 전주국제영화제는 5월 6일(금)부터 12일(목)까지 7일간 제페토의 CGV 월드맵에서 지난 회 한국단편경쟁 부문 수상작을 상영하기도 했다. 제페토는 네이버에서 운영하는 증강현실 아바타 서비스로, 국내 대표적인 메타버스 플랫폼이다. 축제의 영역이 메타버스로까지 확장된 것이다. ‘디지털’과 ‘대안’ 그리고 ‘독립을 모토로 출발한 전주국제영화제인 만큼 메타버스에 관한 새로운 실험적 도전은 의미가 있다. 관람을 희망하는 전 세계 영화팬들은 제페토 앱을 통해 본인만의 3D 아바타를 생성한 후, CGV 월드맵에 접속하여 최민영 감독의 <오토바이와 햄버거>, 박재현 감독의 <나랑 아니면>, 노경무 감독의 <파란거인>, 송예찬 감독의 <마리아와 비욘세>, 김창범 감독의 <역량향상교육> 등을 만나볼 수 있었다.
전주국제영화제에서만 만날 수 있는 특별기획전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 이창동: 보이지 않는 것의 진실
전주국제영화제는 특별전 <이창동:보이지 않는 것의 진실>을 통해 이창동 감독의 첫 단편영화 <심장소리>를 최초로 상영했다. <심장소리>는 우울증을 앓는 어머니를 둔 아이가 죽어가는 엄마를 살려야 한다는 욕망을 가지고 모험을 떠나는 이야기다. 소년은 교실에서 화장실을 가겠다고 일어나서 살아있는 엄마에게 안기기까지 여러 사건을 겪으면서도 끊임없이 달린다.
이창동 감독 단편영화_심장소리
이 장면은 모두 하나의 테이크로 촬영되었다. 기술적으로 과시하기보다는 아이가 엄마를 생각하는 순수하고 단순한 욕망을 보여주는 데에 초점을 맞춘 것이다. 일생에 단 한 번 경험하는 느낌을 관객에게 전달하는 것이 영화 매체의 특징이라고 생각하여 아이가 처음 느끼는 감정을 찍기 위해 특히 노력을 기울였다.
"영화 속 인물이 경험하는 감정을 같이 경험하는, 바로 옆에서 그 심장 소리를 나누어 갖는듯한 느낌을 <심장소리>를 통해 전달하고 싶었어요. 엄마를 안는 아이의 포옹은 아마 세상의 그 어떤 것보다 원초적이고 강렬하고 어떤 의미에서는 우리에게 가장 큰 행복과 안정을 선사하는 것이니까요. 인물이 도대체 어떤 생각과 고통과 감정에 시달리고 있는지, 얼굴 자체로 전달되는 감정을 관객이 느끼길 바랐어요. "
특별전의 제목인 '보이지 않는 것의 진실'은 장 프랑수아 로제가 이 감독에 관해 쓴 책의 머리말이다.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사이의 충돌. 이 감독은 이를 영화에 담기 위해 노력해왔다. 이 감독은 눈에 보이는 것 외의 것이 있단 사실을 잊기 쉽다고 말했다. 그러나 우리 삶의 경우를 떠올려 보면 보이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고, 영화는 보여주는 매체이기 때문에 오히려 보이지 않는 것을 환기할 수 있다고 믿었다.
특히 전도연, 송강호 주연의 영화 <밀양>은 이러한 신념 하에 제작되었다. 영남루와 같은 멋진 곳을 찍어 화려한 전통 공간으로서의 밀양을 주목할 수도 있었지만, 이 감독은 그러지 않았다. 그는 오히려 이렇다 할 특징이 없는 밀양의 길에 주목했다. 그 속에서 그는 보잘것없는 삶에서도 구원과 의미를 찾아가는 한 여인의 이야기를 그렸다.
"이야기도 아주 잘 짜인 플롯을 보면 감동이 없어요. 그 인과를 그대로 따라가기 때문이에요. 우연적인 게 들어가면서도 필연이어야 삶의 의외성이 있고, 영화가 재미있으면서도 진짜 같이 느껴져요. 영화의 관객들은 필연적인 것이 아니라 의외 적인 것, 일회적인 것, 우연적인 것, 일생에 한 번만 보여줄 것 같은 연기를 볼 때 감동해요.“
코리안 뉴웨이브 - ‘충무로 전설의 명가 태흥영화사’
제23회 전주국제영화제에서는 <충무로 전설의 명가 태흥영화사>라는 제목의 특별전이 열렸다. 지난해 안타깝게 세상을 떠난 이태원 태흥영화사 대표를 추모하고, 태흥영화사가 한국영화사에 남긴 발자취를 돌아보기 위함이다.
태흥영화사_기쁜 우리 젊은날
전주국제영화제는 개막식에서 한국영화사에 기여하고 세계에 한국 영화를 알린 영화인에게 주는 공로상을 故 이태원 대표에게 돌리기도 했다. 대리 수상을 위해 방문한 고인의 아들 이지승 감독은 오랜 기간 동안 태흥영화사 회고전을 준비한 김승수 위원장과 이준동 위원장에게 감사를 표하며, 태흥영화사의 작품들은 어떤 개인 혹은 한 영화사의 작품이 아니라 한국 영화계의 소산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또한 태흥영화사 작품에 참여해준 모든 분에게 아버님을 대신하여 진심으로 감사하다고 전했다.
<위대한 유산, 태흥영화 1984-2004>라는 제목으로 출판물 또한 간행되었다. <위대한 유산, 태흥영화 1984-2004>는 전주국제영화제와 한국영상자료원(원장 김홍준)이 공동 기획한 태흥영화사 자료집이자 故 이태원 태흥영화사 전 대표의 추모집이다. 책은 19890년대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한국영화의 부흥기를 이끈 태흥영화사의 빛나는 성취를 생생한 인터뷰와 기고문 및 올컬러 시각 자료와 통계를 활용하여 다각도로 조명했다. 책은 총 3부로 구성되었으며, 1부는 ‘태흥영화사가 걸어온 길’을, 2부는 ‘태흥영화사가 남긴 것’을, 3부는 ‘영화인들이 말하는 태흥과 이태원의 시대’를 다뤘다.
한국 여성 감독의 삶을 만나다 ‘오마주 : 신수원, 그리고 한국여성감독’
<오마주 : 신수원, 그리고 한국여성감독>은 신수원 감독의 최신작, <오마주>를 중심으로 한국 여성 감독의 삶을 보여주는 소규모 특별전이다. 여성 창작자의 약진이 돋보이는 전주국제영화제의 경향이 드러난 특별전이었다. 특별전에서 선보인 영화는 신수원 감독의 데뷔작 <레인보우>, MBC 창사 50주년 기념 다큐멘터리 시리즈 ‘타임’의 한 챕터로 만든 다큐멘터리 <여자만세>, 최신작 <오마주>와 오마주 내용의 중심이 되는 홍은원 감독의 <여판사> 네 편이다.
신수원 감독_오마주
<오마주>는 여성 감독 지완의 이야기다. 힘들게 만든 신작 영화가 대중으로부터 외면받자 낙담하는 지완. 그러던 어느 날 영상자료원으로부터 1960년대 활동한 여성 감독의 영화 <여판사> 사운드 복원 작업을 맡게 되고, 부족한 자료를 메우기 위해 직접 길을 나서 영화의 흔적을 따라가다 여성 감독의 삶을 만나게 된다.
홍은원 감독은 한국 영화사에서 두 번째 여성 감독이다. 그의 작품 <여판사>는 1961년 의문의 죽음을 맞은 한국 최초의 여성 판사, 황윤석 이야기에서 영감을 얻어 제작됐다. 남성의 사회적 지배재력이 압도적이던 1960년대 초반에 ‘한국 두 번째 여성 감독이 그린 한국 최초 여성 판사 이야기’라는 점만으로도 큰 의의를 가진다.
홍은원 감독의 영화는 오늘날 한국 여성 감독과 여성 영화의 밑거름이 되었다. 꼬리를 물듯 이어져 있는 네 편의 이야기를 통해 한국 여성 감독의 삶을 만날 수 있었다.
연상호 감독과 함께하는 장르영화 탐험, ‘J 스페셜 : 올해의 프로그래머’
동시대 영화 예술의 대안적 흐름과 독립, 실험영화의 최전선에 있는 작품을 소개하는 전주국제영화제의 노력은 지난해 처음 선을 보였던
글 김하람 기자•신동하 인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