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금자리 우리집
1986년 7월에 우리는 4년 넘게 살았던 아파트를 떠나 독일 국경에서 가까운 작은바젤의 조용한 지역으로 삶터를 옮겼다. 우리가 정착한 새집은 1926년에 지어진 3층의 커다란 개인 주택으로 시할아버지 가족들이 처음부터 계속 살았던 집이다. 시할아버지 사망 이후에는 둘째 시할머니가 이십 년 혼자 사시다 여든이 되면서 너무 힘겨워 아파트로 이사하고 우리가 집을 넘겨받았다. 집값은 그때 시장 가격으로 70만 프랑을 넘을 정도로 비쌌으나 소유자인 시아버지와 시고모가 “가족 가격”으로 싸게 줘서 50만 프랑만 냈다. 그럼에도 남편이 개업한 지 겨우 4년밖에 되지 않아 그의 수입만으로는 어림없었기에 시아버지가 빌려준 40만 프랑과 은행에서 빚낸 10만 프랑으로 집을 샀다. 우리 형편으로는 좀 벅찼지만 그럼에도 남편은 ‘그렇지 않으면 할아버지 가족이 60년이 넘게 살아온 집을 보존할 수 있는 다른 방법이 없다’며 빚더미 속에서도 어릴 적부터 수없이 드나들던 할아버지의 집으로 이사 온 데에 아주 만족스러워했다. 나 역시 딸처럼 사랑해주던 시할머니가 살던 곳이라서 포근한 느낌이었고 사시사철 아름다운 주변의 풍치가 마음을 끌었다. 집에서 몇 발만 나가면 라인강에 닿는 데다 바젤 양쪽을 이어주는 나룻배가 물 위로 떠다녀 언제 보아도 산뜻하고 낭만적인 풍경을 자아냈다. 라인강 하면 흔히 독일을 떠올리지만 실은 스위스 그라우뷘덴 알프스 산속에 있는 토마호수(Thomasee)가 원천이며 거기서 솟아나는 물은 다른 지역의 호수물과 섞인 다음 바젤을 거쳐 독일 쪽으로 흐른다. 라인강 말고도 집에서 5분쯤 걸어가면 솔리튜드(Solitude)라는 이름의 공원에 이른다. 20세기 초기에 바젤의 대형 제약회사 호프만 라 로쉬(Hofmann-La Roche)가 바젤 지역을 위해 만든 기증품이다. 라인강과 제약회사 사이에 들어있는 숲속 진디밭의 공원은 주로 애들의 놀이터로 또는 산책길로 쓰이다가 1996년에 스위스 출신으로 키네틱 예술(Kinetik Art) 분야의 세계적인 권위자인 장 팅겔리(Jean Tinguely,1925-1991)를 기리는 “팅겔리 박물관”이 세워지면서 변화가 생겼다. 키네틱 예술품이 세계에서 가장 많이 보관돼 있는 팅겔리 박물관은 스위스의 유명한 건축가 마리오 보타(Mario Botta, 1943-)의 특이한 작품이다.
결혼한 뒤로 나는 손으로 뭘 만들고 요리하는 걸 좋아했다. 한동안은 심지어 남편과 애들의 머리도 다 내가 잘라줬다. 돈을 아끼기 위해서라기 보다 그저 재미로 했던 것인데 어느날 친구가 내가 애들 머리를 자른 걸 보고 ‘엉터리 미용사가 애들의 예쁜 얼굴을 망쳐버렸다’고 나무라서 그만뒀다. 나는 새집으로 온 뒤에도 일곱 개의 방을 정돈하는 데 많은 시간을 보냈다. 랑나우 시절에 배운 바느질 솜씨를 되살려 창문마다 커튼을 새로 만들어 달고 양탄자 뜨는 걸 배워 딸의 방에 파란색의 작은 양탄자도 깔아주었다. 하지만 정원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몰랐는데 시험 삼아 시할머니가 남긴 장미꽃밭에다 우리가 이사 온 해를 기념하기 위해 목련 대나무 단풍나무 진달래를 이식하고 나중에는 스위스에 거의 알려지지 않은 배롱나무도 한 그루 심었다. 남편이 한국 휴가 중에 금산사(전북)의 뜰에 핀 백일홍을 보고 너무 좋아하길래 프랑스에서 가까스로 구한 것인데 신기하게도 내가 심은 나무들은 모두 무럭무럭 자랐다. 그 밖에도 나는 꽃밭 한쪽에다 한국 요리에 필요한 참깨 부추 가지 고추 단호박을 키워 호박죽 가지나물 부추전 깻잎김치를 만들어 먹었으며 우리 애들은 특히 부추전을 아주 좋아했다. 꽃밭이 끝난 뒤에 연못도 하나 만들고 싶어졌다. 그러나 경제적 사정으로 20년이 지난 2007년에서야 드디어 정원사의 도움으로 제법 큰 연못을 파게 되었다. 그런데 물속에서 물고기들이 떠돌아다니고 연꽃들이 피어나자 정원의 분위기는 눈에 띄게 달라졌다. 전에 볼 수 없었던 잠자리들이 갑자기 연못 위로 나는가 하면 참새 종달새 까마귀 비둘기 또는 라인강의 갈매기들이 날아와 연못가에서 목을 축이는가 하면 물고기를 노리는 옆집 고양이들이 수시로 드나들었다. 그리고 해마다 봄이 되면 십여 마리의 개구리와 두꺼비들이 짝을 지어 연못 안으로 들어와 알을 낳고 여름에는 이루 셀 수 없는 올챙이들이 연못을 새까맣게 채웠다. 그리고 여름철에는 개구리 소리도 심심찮게 들렸는데 개구리 소리를 들으며 연못가에서 저녁을 먹는 재미도 그럴듯했다.
남편은 시할아버지 가족으로부터 상당수의 고급 가구들과 예술품들 그리고 별별 종류의 가정용품들을 물려받아서 그것만으로도 넓은 집안을 채우기에 충분했다. 지하실의 포도주 저장소도 그중의 하나로 섭씨 10-15도밖에 되지 않은 지하의 서늘한 공간에는 맛 좋은 술들이 담긴 병들이 철제 선반 위에 줄줄이 쌓여있었다.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후손들을 위해 남겨놓은 술들이었는데 거기는 완전히 남편의 영역이었다. 어른들이 그랬듯 그는 가을철이면 스위스 이탈리아 프랑스 스페인에서 막 새로 나온 포도주를 사다가 지하실 선반을 채웠다. 그리고 집에서 잔치나 음악회가 열리던지 친구(들)의 저녁 식사 초청이 있는 날이면 몇 년 동안 지하실에서 맛이 제대로 든 술들을 대접했다. 나는 남편을 사귈 때만 해도 술을 전혀 못했지만 애주가와 몇십 년을 같이 살다 보니 이제는 포도주를 즐길 줄도 알고 술의 품질과 맛의 차이점을 구별할 만큼 이곳 술 문화에 길들게 되었다.
새집의 집안 정리가 거의 끝다가던 어느 날 남편은 난데없이 나에게 커다란 책상을 선물했다. 사실 전에는 나만 쓸 수 있는 책상이 따로 없어 글을 쓰려면 식탁이나 남편의 책상을 사용했는데 그게 마음에 걸렸던 모양이었다. 남편은 커다란 나무 책상을 자신의 책상 옆에다 나란히 놓고는 ‘이제부터 편하게 글을 쓰라’고 했다. 그런데 그 말은 네게 집안일에 너무 치중하지 말고 이제 글쓰는 데도 시간을 보내라는 충고로 들렸다.
어쨌든 그의 실용적인 선물은 나에게 시기적절했다. 왜냐면 남편이 개업을 했을 때만도 나는 포배르즈 주간지에 영화평을 쓰면서 틈틈이 신문학 졸업 논문을 새로 준비하던 참이었다. 학생 시절에 썼던 논문은 남편을 사귀고 결혼하느라 끝을 내지 못했는데 런던에 살면서 일본 영화감독 아키라 쿠로사와(1901-1998)의 회고전을 보고 그의 영화에 대한 논문을 새로 쓰기로 맘먹고 신문학 영화교수의 허락까지 받아놓았다. 그리고 논문을 쓰기 위하여 1983-1985년 사이에 런던 국립영화 보관소와 독일 쾰른의 일본 문화원 그리고 오스트리아의 비엔나 영화박물관을 돌아다니며 쿠로사와 감독의 첫 작품에서 60년대 중반까지의 15편 영화를 보았으며 취리히 대학 일본학과 도서관에서 일본 역사와 문화에 대한 상당수 책을 빌려 읽었다. 그런데 새집으로 이사온 뒤로는 새집을 꾸미는데 정신이 팔려 일 년 가까이 기사도 논문도 손을 대지 않고 있었으니 남편이 신경 쓸 만도 했다. 아무튼 남편의 재촉(?)으로 나는 곧바로 논문에 다시 관심을 돌리고 2차대전 시절에 만든 쿠로사와 감독 초기의 세 작품을 뼈대로 2년 반에 논문을 썼다. 논문에 인용된 영화는 “유도 영웅담1” (Sansiro Saga 1, 1934), "가장 아름다운" (The Most Beautiful, 1944), ”유도 영웅담 2" (Sansiro Saga 2, 1945)였다. 쿠로사와 영화를 논문 주제로 삼았던 데는 학생 시절 강의 시간에 본 명작 “라쇼몽”과 런던에서 발견한 두세 편의 대작에서 받은 감동이 한몫했다. 그러나 그의 초기 세 작품은 일본 군국주의에 전적으로 따르려는 성향이 짙어 전후의 진보주의적 작품들과 큰 차이점을 드러냈다.
글 임안자 영화평론가
7월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