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지성’주의보
최근 선배에게 경고를 가장한 농담을 들었다. 한 선배의 말을 도통 믿지 못하겠다고 했더니 선배는 “너 그거 반지성주의야. 경고!” 라고 으스대며 으름장을 놓았다. 어이가 없어서 지금이 어느 때인데 뜬금없이 ‘반지성주의’ 타령이냐고 했더니 오히려 선배가 혀를 끌끌 찼다. “넌 요새 뉴스도 안 보냐? 요즘 핫한 키워드잖아.”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 이야기를 듣고 속으로 뜨끔했다. 요즘 뉴스를 외면하고 살았던 것도 사실이었다. ‘반지성주의’가 회자되기 시작한 건 새로운 대통령의 취임식부터라고 했다. 뉴스와 SNS에서는 이미 ‘반지성주의’라는 단어가 넘쳐나고 있었다.
반지성주의
반지성주의라는 미국의 매카시즘 광풍을 고발하기 위해 사용한 단어였다. 반지성주의라는 개념이 처음 등장한 것은 1963년 출간한 리처드 호프스태터의 저서 <미국의 반지성주의>였다. 반지성주의는 극단적인 반공주의에 사로잡혀 자신과 견해가 다른 이들을 탄압했던 매카시즘에 대한 비판으로 반공이라는 가치 앞에 일말의 의심이나 질문이 죄악시되었던 상황, 의심하고 질문하는 사람들인 ‘지성인’에 대한 비난과 혐오를 일컫는다. 이후 극우를 비판하는 맥락에서 주로 사용돼왔으나 ‘이성적•합리적 소통이 불가능한 태도’, ‘집단적 갈등으로 인한 편파주의’ 등을 뜻하는 개념으로도 통용되어 왔다.
얼마 전 발표된 대통령의 취임식 연설문에서는 ‘통합’이 사라지고 ‘반지성주의’가 등장했다. 대체 새 대통령은 왜 ‘반지성주의’를 이야기한 것일까? 그런데 새 정부가 들어서면서 이슈가 된 사건들을 보면 아이러니하게도 ‘반지성주의’와 닿아있다. 위안부 피해배상금을 ‘밀린 화대’라고 발언하거나 ‘동성애는 정신병의 일종’이라고 SNS에 공공연하게 게재한 전 종교다문화비서관부터 이주여성과 다문화가족에 대한 혐오 발언을 일삼는 은평구의 9급 공무원도 있었다.
존중의 종말
전 종교다문화비서관은 사퇴하면서 “정치인들은 국민을 분열시키지만 언론인들은 국민의 생각을 왜곡시키고 저능아로 만든다. 그렇기에 대한민국 언론인들이 국가를 망치는 제1주범이고 정치인들이 제2주범이라고 생각한다”는 글을 SNS에 남겼다. 사퇴에 대한 해명이라고 하기엔 상당히 공격적이다. 사실 이런 뉴스를 들을 때 기가 차긴 하지만 이제 크게 놀랍지 않다는 건 정말 슬픈 일이다. 우리 사회에는 이런 이야기들을 하는 사람들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SNS에서도 마찬가지다. 반지성주의라고 비판받는 사람이 반지성주의를 비판하고, 페미니스트와 그 비판자들, 진보와 보수 너나 할 것 없이 서로를 반지성주의라고 몰아붙였다.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보다는 ‘누가 적인가’를 먼저 구분 짓고 규정한다. 그리고 그 귀결은 ‘혐오’다.
더 우려스러운 점은 이런 논란으로 인해 ‘혐오’가 확대•재생산된다는 것이다. 아무리 사회의 다양성과 포용성이 중요함을 갖가지 근거와 논리로 설득하려 해도 듣지 않는다. 귀를 기울이는 순간, 그들의 신념과 믿음에 위해가 가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들은 열광적인 믿음과 신념을 주장하기 위해 사실을 취사선택하며, SNS에 떠도는 가짜뉴스를 받아들인다. 그리고 지식과 지성이 아니라 자신이 ‘믿어야’하는 내용을 전달하는 사람에게만 열광한다. 이것도 지성에 대한 불신의 결과일까? 존경을 잃은 지성은 권위를 잃는다. 현재 우리 사회에서 어떤 맥락에서 ‘반지성주의’가 회자되어야 하는지 다시금 돌아봐야 할 지점이다.
글 오민정 편집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