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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6 | 연재 [이휘현의 숨은 책 좋은 책]
마종기, 루시드 폴 -아주 사적인, 긴 만남
이휘현(2022-06-10 13:34:42)


마종기•루시드 폴 「아주 사적인, 긴 만남」

글 이휘현 KBS전주 PD


새치가 늘어난다고 나이 듦을 한탄하지 않았다. 주름이 선명해진다고 늙음을 주저하지 않았다.
음악을 듣는 게 심드렁해졌을 때, 비로소 나는 나이 먹는다는 게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시집을 더 이상 펼쳐보지 않는다는 걸 자각했을 때, 나는 내 청춘이 가뭇없이 흘러가 버렸음을 실감했다.
시와 음악이 나를 떠났다. 아니, 내가 시와 음악을 떠나버렸는지도 모른다.
하나 그 사실이 두렵지 않다. 그 두렵지 않음이 내 진정한 슬픔의 실체일 것이다.
내 한 시절은 그렇게 끝나 버렸다…
라고 실토할 즈음, 책 한 권이 슬며시 다가왔다. 그리고 꽉 닫힌 내 청춘의 문을 두드렸다.
“잠깐 문 좀 열어 봐…” 책이 말했다. 하지만 나는 고개를 갸웃하기만 했다.
“일단 날 믿고, 페이지를 조심스레 펼쳐봐.” 시키는 대로 해보았다.
그러자 서서히 귀가 열리고 오랫동안 잊고 지냈던 선율이 내 몸속으로 흘러들어왔다. 심장이 뛰고 피가 돌았다. 살 끝 어디에선가 시심(詩心)이 돋았다. 말라가던 고목의 끝자락에 연둣빛 청춘이 피어났다.
“시야! 노래야! 너희들 아직 내 곁에 있었구나!”
가슴에 눈물이 차올랐다.
“애초에 떠날 마음이 아예 없었는데?” 책이 나에게 말했다.
비로소 나는 안도했다.


시인 마종기와 가수 루시드 폴(조윤석)의 서간집 <아주 사적인, 긴 만남>은 내가 10여 년 전부터 그 존재를 알고 있던 책이다.


서점가를 빈둥거리다가 내 눈에 확 들어왔는데, 사서 읽지는 않았다. 나는 당시 루시드 폴의 음악을 즐겨 들었고 앨범도 여러 개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책에 대한 호기심보다는 ‘노래 말고 굳이 그의 글까지 챙겨 읽어야 하나?’라는 심드렁한 기분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저 나중에 마음에 여유가 생기면 한 번 읽어 볼까… 정도의 마음?


그렇게 10여 년의 세월이 무심하게 흘러갔으니, 그사이 내 삶에 도대체 여유란 없었던 것일까. 여하튼 이 책과 나는 도통 인연이 닿지 않았다. 그러다가 어느 날 평소 즐겨 찾는 중고 서점에서 이 책이 내 눈에 들어왔다. 일단 사두기는 하자!


정가의 반값 정도에 인계한 이 물건을 집안 서재 한구석에 고이 모셔두기는 했는데, 희한하게도 손이 잘 가지 않았다. 결국 1년 반 정도의 시간이 또 흘러갔다.


지난달 이 책을 집어 들었을 때의 내 심정은 어떤 것이었을까. 여유는커녕 어떤 절박함에 사로잡혀 있었던 것 같다. 좀체 줄지 않는 직장의 격무에 시달리며, 일단은 살아야겠다는 절실함이 마음에 사무쳤다. 일상이 내 주위를 겉돌았다. 잘 읽히던 책들이 언제부턴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나마 시야에 잡힌 문장들도 몸 밖으로 튕겨 나갔다. 이런 걸 난독증이라고 하는 걸까? 지난 30년간 부지런히, 즐겁게 이어온 나의 독서 행보가 이제 종말을 맞이한 것일까?


섬뜩한 공포가 엄습할 즈음 <아주 사적인, 긴 만남>이 눈에 들어왔다. 논리적 근거 없이 본능적으로 나는 이 책을 읽어야겠다는 느낌에 사로잡혔다. 곧바로 책을 집어 들고 이불속으로 폭 들어가 페이지를 펼쳤다. ‘난독증은 아닌가 보네….’
잘 읽혔다. 문장들이 혈관 따라 온몸을 돌았다. 살 것 같았다. 비로소 나는 안도했다.


루시드 폴은 음악을 잘 만든다(찐팬들이 정말 많다!). 공부도 잘해서 서울대 졸업 후 스위스 유학을 통해 공학박사라는 타이틀까지 거머쥐었다(잘났어 정말!!).


마종기는 오랜 시간 한국 문단에 문명(文名)을 떨친 원로 시인이다(죄송스럽게도 그의 시를 많이 접하지는 않았다). 미국에서는 수십 년간 훌륭한 의사로 대접받아왔다고 한다(존경합니다!).



이 두 명의 잘난 사람들이 편지를 주고받는다. 말은 편지지만 사실 이메일이다. 전자우편이 스위스와(루시드 폴) 미국을(마종기) 부지런히 오간다. 2007년부터 2009년까지 약 2년 남짓 진행된 프로젝트. 아하~ 이거 출판 기획의 승리로구나! 라며 빈정거릴 마음의 준비가 다 되어 있었는데….


한 페이지를 채 넘기기도 전에 그들의 진심이 내 마음에 스며들었다. 젠장 잘난 사람들이 이렇게 진정성까지 넘쳐나면 어쩌자는 것인가.


머나먼 이국의 땅에서 외로움의 한복판에 서 있는 한 청년이 수십 년 전 또 다른 이국의 땅에서 청춘의 고독을 경험했던 시인에게 타향살이의 고단함을 토로한다. 시인은 훈수를 두지 않는다. 대신 공감한다. 그 옛날 나의 청춘도 당신의 청춘과 다르지 않았음을 고백한다.


가수 청년은 오래전부터 시인의 시를 흠모해왔다. 가사가 이 시인의 작품에서 수많은 모티프가 되어주었음을 숨기지 않는다.
시인인 의사는 청년의 노래가 낯설다. “요즘 젊은이들의 음악이 이런 거군요….”
가수 청년은 실망하지 않는다. 대신 시인에게 자신이 작업 중인 음악을 들려준다.
여느 때처럼 춥던 오후
전화기 너머 들리던 서울의 밤
내가 보고 싶다는 친구들
너무 고마워
올해 달력 위 붉은 글씨
추석이 와도 약해지지 않으려 해
나는 좀 더 강해지고 싶어
지금보다 더 (…)

- 루시드 폴, 노래 <마음은 노을이 되어>(2007) 중에서 -


녹록찮은 일상, 고단한 공부, 여전히 낯선 이국의 언어들.
중첩되는 두 청춘의 기억이 수십 년 시차를 좁히면서 하나로 수렴된다. 남들 눈에는 성공한 인생처럼 보이지만 두 사람의 고독 또한 타인들의 그것과 다르지 않다. 삶에 외로움이 사무친다.


그래서 서로 주고받는 편지는 공감의 언어이자 위로의 언어가 된다. 그리고 이 둘 사이의 내밀한 소통은 책이라는 매개체를 통해 불특정 다수에게 확장된다. 사적인 만남이 만인의 공감으로 퍼져나가는 순간이다.
책 속에 특별한 사건은 없다. 토로는 있어도 토론은 없다. 삶에 대한 충고도 없다. 하지만 충분하다. 글이 맑으니까. 글에 스며든 마음도 맑으니까. 그래서 좋다.


오랜만에 루시드 폴의 음악을 듣는다. 알고 보니 내 서재 어딘가에 마종기의 시집도 하나 숨어있었다. 오늘 밤 잠들기 전에 시집을 펼쳐야겠다. 그리고 누구에게든 편지 한 장 보내야겠다. “그럭저럭 잘 살아내고 있습니다…” 나는 또 한 번 안도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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