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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7 | 연재 [임안자의 꿈꾸는 인생]
스위스에서 50년, 스위스에서 산다는 것 (31)
우리집 다락방과 영화계 친구들 1
임안자 영화평론가(2022-07-11 17:23:58)




우리집 다락방과 영화계 친구들 1



우리집에는 “한국 영화인 방”으로 불리는 자그만 공간이 하나 있다. 원래는 허드레방으로 쓰다가 우리를 방문하는 한국 영화계의 친지들을 위해 고치고 다듬은 지붕 밑의 목조 다락방이다. 내가 한국의 영화계와 접촉한 시기는 80년대 말쯤이었는데 90년대 초부터 이십여 년 동안에 열여섯 명에 해당하는 영화인들이 우리집을 방문했다. 그중에 다섯 명을 빼면 모두 유럽의 여러 영화제에 처음으로 참가했던 감독과 배우들이었다. 90년대는 한국 영화가 유럽에 조금씩 알려지기 시작한 시기로 주로 나는 기자로 영화제에 대한 글을 쓰거나 감독들의 통역을 맡아 했으며 몇 번은 직접 기획한 스위스 한국영화 회고전의 시행자로 동참했다. 통역은 나의 전문 분야가 아니어서 완벽하진 못했지만 평소 영어 독일어 불어를 쓰던 터라 편리한 점도 있었으며 감독들이 외국어를 잘하여 통역이 필요 없을 때도 더러 있었다. 우리집을 다녀간 영화인들 가운데 네다섯은 지금도 서로 연락하고 코로나 팬데믹이 시작하기 전까지 스위스나 한국에서 가끔씩 만나기도 했는데 사적인 이야기는 지면상 생략하고 여기에서는 주로 내가 어떻게 영화인들과 만났으며 또한 그들과 어떤 일을 했는지에 초점을 두고 연대순으로 글을 써볼까 한다.   





우리집 다락방의 첫 손님은 임권택 감독, 태흥영화사 대표, 영화 월간지 “영화 예술”의 이영일 편집장이었다. 모두 1990년 6월에 뮌헨 영화제(Munich Film Festival)의 “임권택 회고전”에 참가한 뒤 우리집에서 며칠 머물렀다. 임 감독님과의 첫 만남은 1989년 11월에 프랑스의 "3대륙 낭트 영화제"(Three Continents Festival-Nantes)에서였다. 그 시절 유럽에서 첫 “임권택 회고전”이 낭트에서 진행 중이었는데, 스위스의 비상업 배급사 “트리곤 필름”의 대표가 감독님 작품 “씨받이”를 스위스에 수입할 목적으로 진행하는 감독과의 인터뷰를 위해 나를 그리로 초청을 해주었다. 그 기회에 임 감독님의 영화를 처음으로 몇 편 보게 됐는데 얼마 후 뮌헨 영화제에 감독님의 통역자로 참가하여 한꺼번에 12편을 보면서 그의 작품 세계에 부쩍 관심이 쏠렸다. 이영일 편집장님은 처음 만났는데도 서슴없이 나에게 “영화 예술”에 글을 써달라고 부탁하여 처음으로 1991년부터 몇 년간 한국의 영화 전문지에 글을 썼다. 


이장호 감독_ 이장호 감독님과의 만남은 다음과 같다. 1991년 초겨울에 나는 페사로 영화제 집행위원장의 조수로 영화진흥공사(영화진흥위원회 전신)에서 5주간 일하면서 집행위원장의 통역을 맡음과 동시에 이탈리아의 “페사로 뉴 시네마 영화제”(Pesaro New Cinema Festival)에서 다음 해에 열릴 “한국영화 회고전”을 위한 영화의 선정 작업에 협조했다. 그리고 페사로 회고전의 책자를 만들기 위하여 틈틈이 여러 감독들을 인터뷰했는데 이장호 감독님을 그때 알게 됐다. 그런 뒤 1992년 6월에 페사로 영화제에 참석하면서 이 감독님과 배창호 박광수 감독님들 그리고 안성기 배우님을 다시 만나게 되었는데, 전통적으로 배우를 초청하지 않는 행사임에도 안성기 배우님이 예외로 초청되었다. 통역은 영화제의 공식 통역자로 선택된 베니스 대학 한국어 전공의 여대생이 전적으로 맡아 했다. 이탈리아 출신인 그녀는 과거 서울의 “외국인 한국어 경연대회”에서 대상을 받을 만큼 한국말을 뛰어나게 잘했다. 세계 최초로 열린 페사로의 한국 영화 회고전은 유럽의 영화평론계뿐만 아니라 영화제의 새로운 관심거리가 되었다. 1993년 3월 스위스 프리브룩 영화제서 처음으로 열린 ”이장호 회고전”도 그랬는데 영화제 측의 요청으로 나는 통역뿐만 아니라 영화 선정에 직접 참여하면서 이 감독님과 친해졌다. 





안성기 배우_ 1991년 말경에 앞에서 말했듯 영화진흥공사에서 페사로 영화제 준비 작업을 하던 중에 페사로 영화제 집행위원장이 정지영 감독의 “하얀 전쟁”의 촬영 현장을 방문하고 싶다고 하여 서울 어느 빈촌에서 촬영 중이던 안 배우님을 처음 대면했다. 그리고 페사로에서 만난 뒤에 1992년 11월에 프랑스의 아미앵 영화제(Amiens Film Festival)에서 열린 국내외 최초의 “안성기 회고전”에서는 통역을 맡아 했다. 아미엥 영화제 집행위원장은 개막식 인사말에서 ‘페사로에서 안성기 배우 주역의 영화들을 보고 그의 뛰어난 연기에 깊이 감동되어 회고전을 열게 됐다’며 안 배우님의 다재다능한 연기력을 높이 평가했다. 영화제 이후에 안 배우님은 부인 오소영 여사와 두 아들을 데리고 우리집 다락방에서 며칠을 재미나게 지내기도 했다. 





박종원 감독_ 1993년 3월에 박 감독님의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이 프리브룩 영화제의 경쟁부문에 선정되어 통역자로 감독님을 사귀었다. 그의 작품은 프리브룩 영화제의 비경쟁 부문에서 국제필름클럽상을 받았는데 5년이 지나서 나는 뜻밖에 예술종합학교로부터 영상연출과의 초빙교수로 초청을 받아 깜짝 놀랐다. 알고 보니 박 감독님이 그사이에 예술종합학교의 영상연출과 조교수로 일하시면서 나를 학교에 추천하여 이뤄진 일이었다. 그리하여 1998년 봄학기에 나는 스위스 영화사에 관한 강의를 하면서 그 기회에 스위스 영화사의 주요 작품 다섯 편 영화를 덧붙여 보여줬는데 ‘강의 시간에 영화 상영은 그게 처음이라’며 학생들이 매우 열성적이었다. 내가 강의 시간에 사용한 영상 재료는 스위스 정부의 영화부에서 한국 스위스 대사관을 통하여 학교로 보내준 다섯 개 영어 자막의 35mm 프린트였다. 


8월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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