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휘현의 숨은 책 좋은 책 8 김훈의 '빗살무늬 토기의 추억'
불 앞에 선 인간, 그 처절함에 대하여
글 이휘현 KBS전주 PD
<칼의 노래>를 김훈의 첫 소설로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사실이 아니다. <칼의 노래>는 김훈이 ‘작가’라는 이름으로 명성을 떨치게 된 첫 작품일 뿐이다. ‘기자’라는 직함으로 행세하던 시절 김훈은 중편이라 하기엔 길고 장편이라 하기엔 짧은 소설 하나를 세상에 내놓은 바 있다. <빗살무늬토기의 추억>이 그것인데, 이 작품이 작가 김훈의 첫 소설이다.
서해 페리호가 바다에서 뒤집히고 성수대교가 끊기는 대형 재난이 해를 거듭하며 터진 그 이듬해, 그러니까 삼풍백화점이 무너져 이 나라 국민들의 마음까지 붕괴시켰던 1995년의 잔인한 여름에 이 책은 출간되었다. 소설 속 주인공은 소방관이다. 무너져 내린 성수대교나 삼풍백화점을 카메라가 비출 때 가장 흔하게 노출되던 이들이 바로 그들이었을 것이다. 당시 김훈은 서문을 이렇게 써내려갔다.
애초에 내가 도모했던 것은 언어와 삶 사이의 全面戰이었다. 나는 그 全面戰의 전리품으로써, 그 양쪽을 모두 무장해제시킴으로써 순결한 始原의 平和에 도달할 수 있기를 기원하였다. 그리고 나는 그 始原의 언덕으로부터 새로운 말과 삶이 돋아나기를 기원했다…….
- 김훈, <빗살무늬토기의 추억>, 自序 중에서-
불씨는 도시 구석구석을 떠도는 바람과 만나 화마(火魔)가 된다. 그리고 인간과 건물, 때로는 도시 그 자체를 덮친다. 생명과 재산뿐만 아니라 마음 속 희망도 앗아간다. 그 옛날 프로메테우스는 불을 가져다줌으로써 인간에게 문명을 선물하였다는데, 이제 그 불은 문명파괴자가 되어 혀를 날름거리는 것이다.
불 속에서 타들어가는 모든 것들은 잿더미가 되어 각자의 계급성을 상실한다. 그리하여 불 앞에서는 모두 평등해진다. 그 때마다 무거운 장비를 메고 소방관들이 출동한다. 그들이 맞설 때 사용하는 도구는 물이다. 물과 불의 전면전. 그 사이에서 문명의 수호자라도 되는 양 소방관들이 앙버티고 서있는 것이다.
김훈의 모든 작품들이 그러하듯, 이 소설 속 인물들에게는 치기어린 감상주의가 배제되어 있다. 누군가의 남편이자 아버지이고 또 자식이지만, 소방관이라는 특별한 직업을 밥벌이로 삼고 있을 뿐 그 외 별다를 것 없는 생활인들. 무자비한 화재로부터 공동체를 구한다는 원대한 이상 보다는 가족 부양을 위해 그리고 내가 먹고 살기 위해 기꺼이 불구덩이 속으로 뛰어드는 직장인의 초상. 오로지 먹고 사는 문제에 전력을 다했던 저 수천 년 전 신석기인들의 DNA는 우리 현대인들의 핏속에서도 여전히 뜨겁게 흐르고 있는 것이다.
……‘너는 왜 소방관이 되었는가?’ …(중략)… 나는 단지 불을 꺼서 밥을 먹어왔고 자식을 길렀으며, 그리고 그것은 자랑일 리도 비애일 리도 없는, 필연일 수도 운명일 수도 없는 그저 그런 견딤의 세월이었다고 말하는 편이 옳았고 편했다.
- 위의 책, 27쪽 -_
소설은 1인칭 주인공 시점으로 서술된다. 주인공인 ‘나’는 소방대장이다. 불 끄는 일로 밥벌이를 한 지 대략 15년 이상이 되었다. 전업주부인 아내가 있고 아직 어린 딸과 아들 두 남매를 거느리고 산다.
어느 날 장철민이라는 이름의 신입 소방대원이 전출 온다. 포크레인과 택시 기사를 업으로 삼았던 그는 서른 살이 되어서야 소방서에 자신의 밥 뿌리를 내릴 수 있었다. 3교대로 운용되는 이 소방서에서 장철민을 자신의 팀에 배속시킨 주인공(소방대장)의 판단에는 뚜렷한 이유가 존재하지 않았다. 그리고 장철민은 서른두 살에 화재 현장에서 죽었다. 순직으로 처리되었지만, 그의 죽음에는 여러 의문부호들이 붙어 다녔다. 하지만 죽은 장철민은 말이 없다. 소설은 이 미스터리한 죽음을 마지막까지 제대로 설명하지 않는다. 그 모호함이 도리어 깊은 여운을 남긴다.
약 2년의 시공간을 교차하며 진행되는 이야기 속에서 총 네 번의 화재(火災)가 발생한다(짐작컨대 1990년대 초중반의 서울 경기 지역이 아닐까 싶다). 각각의 화재는 각자의 개별적인 이야기와 계급성을 드러낸다. 3층짜리 오래된 상가건물의 화재는 소상공인의 눈물과 한숨으로 치환된다. 퇴폐 마사지 업소로 활용되던 알함브라호텔의 화재는 성욕에 굶주린 수컷들의 욕망과 이를 이용하는 도시 문명의 음험한 속내를 드러낸다. 비닐하우스에서 타죽은 어린 소년과 강아지들을 향한 시선에서는 얼핏 연민의 감정이 스쳐가지만 그뿐, 작가는 신파의 영역에 발 들일 생각이 아예 없다. 마지막 화재는 한 대기업의 15층짜리 복합문화관에서 발생한다. 그곳에서 장철민이 죽었다. 내려앉은 대들보에 깔려 사지가 짓눌리고 뇌수가 터졌다. 장철민이 죽은 곳은 우연찮게도 그가 중장비기사로 밥벌이하던 시절의 일터였다. 그 건물의 건설에 동원되었던 장철민은 그 건물의 폐허에 깔려 죽음을 맞이한 것이다.
화재 현장에 출동해 사투를 벌이는 소방관들의 모습은 김훈의 소설 속에서 지독할 정도로 사실적이다. 한국 문학 속에서 물과 불의 전면전을 이렇듯 제대로 다룬 소설이 있었던가. 대륙과 바다를 건너고 또 한반도의 산맥을 넘어 도시에 게릴라처럼 퍼져있던 바람이 불씨와 만나 일으키는 화마의 현장은, 작가의 꼼꼼한 고증을 등에 업고 책 속에서 화기(火氣)를 뿜어낸다. 그 열기가 실로 대단하다.
반면 이에 맞서는 소방관들의 고군분투는 일체의 수사(修辭) 없이도 독자의 마음을 경건하게 만든다. 소방관을 영웅으로 묘사할 생각이 작가에게는 추호도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의 연필 끝에서 살아난 불기둥 속 소방관들의 모습은 어쩔 수 없이 영웅적으로 보인다. 김훈은 이 사실에 절망했을 것이다.
<빗살무늬토기의 추억>은 밀도 높은 문장들로 채워져 있다. 그래서 진입장벽이 높다. 나는 이 책을 세 번째 읽었을 때에야 비로소 김훈이 선사한 문학의 진경을 하나의 화폭처럼 감상할 수 있었다.
나는 문학 전공자가 아니다. 그래서 이 소설이 걸작이다 혹은 졸작이다, 라고 감히 말할 자신이 없다. 다만 30년 넘게 부지런히 문학을 접해온 독자의 깜냥으로 말하건대, 김훈의 첫 소설 <빗살무늬토기의 추억>은 좋은 작품이다. 적어도 내 기준으로는 그렇다.
이빨이 여섯 개나 빠지는 스트레스를 견디며 썼다는 <칼의 노래>가 대중들로부터 큰 호응을 얻은 것은 김훈에게 다행스런 일이었을 테지만, 그 이전 그가 한국문단을 향해 야심차게 던진 문학 출사표 <빗살무늬토기의 추억>이 대중들의 관심 밖 멀리 내팽개쳐 있다는 사실은, 그의 문장을 좋아하는 팬으로서 나의 마음을 당혹스럽게 한다. 그리하여 나는 이렇듯 조심스럽게 말을 꺼내본다.
“벗들이여 무엇을 망설이는가. 저 어둠 속 단단하게 웅크린 김훈 문학의 시원(始原)으로 뛰어들라. 그 매혹적인 야만성을 목격하라. 그리고 처절하게 부서지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