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집 다락방과 영화계 친구들 3
유현목 감독, 박정자 화백_
2000년에 한국의 국보 문화재 전시 “한국-고대 왕국들”(Korea-Die Alten Koenigsreiche)이 스위스에서 처음으로 취리히 리트베르크 박물관(Rietberg Museum)에서 3월에서 6월까지 열렸다. 전시품은 금동미륵반가사유상(국보 제83호)과 천마총 금관(국보 제188호)을 포함하여 200개의 최고급 국보들이었는데 “무속, 불교, 유교”의 종교적 주제로 나뉘어 진열됐다. 그리고 한국 대사관에서는 국보전 준비위원을 특별히 만들어 음악회, 영화 순회상영, 문학의 밤, 미술 세미나, 도자기 전시, 김덕수 사물놀이, 태권도 시범 등을 조직하고 두 달 동안 여러 곳에서 한국의 전통 문화를 알리는데 전력을 기울렸다. 나는 국보전 준비위원의 하나로 대사관의 협조를 받으며 국보 전시 주제에 맞춰 무속 불교 유교 내용의 “한국영화 특별전”을 마련했다. 프로그램의 13편 영화는 내가 일 년에 걸쳐 파리 한국 문화원, 베를린 키네마테크 우호협회, 스위스 트리곤 필름, 한국 영화진흥위원과 영상자료원에서 모은 것들로 취리히의 필름포디움 영화관을 중심으로 두 달 동안 바젤 베른 로잔 제네바의 아트영화관에서 순회 상영을 했는데 국보 전시의 성공에 힘입어 관객수가 6년 전의 첫 회고전에 비해 훨씬 높았다. 그에다 무속 주제의 “장마”를 연출하신 유현목 감독님과 부인 박정자 화백님이 특별 손님으로 바젤과 베른의 상영장에 참석하셔서 영화 행사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했다. 베른 상영시에는 대사 부부도 참석하여 분위를 돋구웠고 감독님 부부를 대사의 집으로 초청하여 저녁 식사를 같이 했다. 박정자 화백님은 사실 같은 시기에 여자친구들과 인도여행을 하실 참이었는데 나의 간청에 못 이겨 유 감독님과 스위스로 오셨다.
민병훈 감독_
2000년 11월에 나는 이탈리아의 토리노 영화제 (Torino Fim Festvial)에 씨네21 주간지의 기자로 참석하여 경쟁부문에 들었던 “벌이 날다”를 보다가 전혀 모르던 젊은 세대의 민 감독님과 인사를 했다. “벌이 날다”는 러시아 국립영화대학 출신 민 감독이 타지키스탄의 동기 잠세드 우스마노프와 공동 감독한 졸업 작품으로 토리노 영화제에서 대상, 비평가상, 감독상 3개 부문을 휩쓸었는데 감독님은 수상식 무대에서 통역 없이 러시아어로 수상 소감을 발표했다.
오멸 감독_
2013년은 한-서 수교 50주년의 해로 정부 차원의 특별 문화행사들이 스위스 여러 도시에서 다양하게 치러졌다. 나는 일년 전에 대사관으로부터 '한서 수교 기념 행사에 프로젝트가 있으면 대사관에 보고하라‘는 전갈을 받고 하겠다고 대답했다. 하지만 그 뒤에 대사가 새로 바뀐데다 한국 정부의 영화 프로젝트에 대한 후원과 영상 재료의 제공 문제 등으로 어려움이 겹쳤다. 그래도 나는 한국 평론계 친지들의 조언을 받으며 가까스로 10편 영화를 모집하고 “새로운 한국의 작가영화” 이름으로 프로그램을 짜서 대사관에 보내면서 프로그램에 들은 작품 “지슬”의 연출자 오멸 감독을 초청자로 추천했다. 그런데 새로 부임한 대사는 몇 달 동안 아무 말도 없다가 어느날 갑자기 전화에다 다짜고짜로 지슬(제주도 말 감자)을 프로그램에서 빼라고 하면서 ’한국 문화를 알려야 할 자리에서 4,3문제를 보여주면 우리의 치부를 드러내는 짓으로 스위스 사람들이 우리를 어떻게 보겠냐. 오멸 감독도 더 인기 좋은 감독으로 바꿔라. 그렇지 않으면 비행기 값을 줄 수 없다‘고 어름장을 놓았다. 그러나 사실을 말하면 지슬은 바로 그 전에 미국 선댄스 영화제서 기립 박수를 받으며 심사위원상을 받았을 뿐 아니라 국내 평론가들의 호평을 받으며 대중 매체의 주목을 받고 있었다. 나는 대사의 무지막지한 태도에 어안이 벙벙했지만 그의 말에 짓눌려 지슬을 뺄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감독 초청 문제도 취리히 필름포디움 대표의 도움으로 스위스의 “영화 후원단체 루미에르”의 지원을 받아 취리히와 바젤 베른 행사에 오멸 감독을 초청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내 프로그램은 대사관의 도움 없이도 스위스 영화계 친구들의 협조를 받으며 취리히 바젤 베른 로산 제네브의 아트영화관에서 한 달 동안 순회 상영을 가졌는데 가는 곳마다 인기를 끌었고 특히 평론계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았다. 영상 재료는 영화진흥위에서 제공했는데 디지털 시대에 들면서 과거의 무겁고 비싼 35mm 프린트 대신에 처음으로 DCP BD HDCAM를 쓸 수 있어 운반도 수월했고 사용비도 쌌다.
김지석 수석 프로그래머_
페사로 영화제를 준비할 때부터 알고 지내던 영화 평론가 김 선생님을 나는 1996년 2월에 베를린 영화제서 뜻밖에 만났다. 그는 나를 보자 그 자리에서 ’9월에 부산영화제가 시작하는데 영화제의 컨설턴트로 동참해달라‘고 부탁했다. 그리하여 8년간 부산영화제서 일을 했는데 김 선생님은 내가 기획한 여러 종류의 해외 한국 영화 회고전에 누구보다 많은 관심을 가지고 뒤에서 열심히 도와준 좋은 친구였다. 2002년 그는 아들을 데리고 일주일 동안 여름 휴가를 우리집에서 보냈는데 가슴 아프게 2017년 칸느 영화제의 출장중에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김소희 편집장_
씨네21의 김소희 네 번째 편집장은 2001년 내가 기획한 체코의 칼로비 바리 국제영화제의 장단편 한국영화 회고전에 특별히 참가하고 2002년에 나와 같이 로카로 영화제를 방문하면서 친구로 가까워 지면서 우리집 손님으로 다락방에서 며칠 머물었다. 끝으로, 나는 1991년에 “영화 예술” 월간지에 글을 쓰기 시작한 뒤에 1992년부터 영화진흥공사의 격월간지 “영화"에도 한동안 글을 썼다. 그리고 1993년에 국제평론협회의 회원이 됐으며 1995년부터 2003년까지 씨네21 해외 특별 기고가로 글을 썼다.
10월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