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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10 | 칼럼·시평 [문화칼럼]
찬미 전주
김사인 시인(2022-10-12 11:50:19)


찬미 전주


글 김사인 시인






늘 그립던 벗들의 도시 전주에 스며들어 한 귀퉁이에 엎드려 지낸 지 벌써 한 해가 되었습니다. 얼마나 안온하고 고즈넉한 시간이었는지요. 무엇보다 옛 부성을 중심으로 한 원도심의 평화로운 공기가 나는 너무도 좋았습니다.


서울의 그 잡답에서 놓여나지 못하고 50년을 정신없이 쳇바퀴를 돌리다가, 퇴직이라는 이름으로 지난해에 나는 간신히 방면되었습니다. 젊은 날의 고혈을 저 거대도시에 제 손으로 다 갖다바치고 쥐어짜도 나올 것이 더는 없자 풀려난 것입니다. 뭐에 씌었던 것이지요. 허겁지겁 전주로 내려왔습니다. 전주의 마음 씀씀이와 말씨와 삶의 속도는 소시에 떠났던 고향의 그것 그대로입니다. 50년만에 나는 편한 잠을, 게으른 늦잠을 전주에서 자봅니다.


잘 어우러진 산과 들과 내, 그리고 넓게 열린 하늘 아래, 전주의 소탈하고 정갈한 골목길들 틈에서, 나는 비로소 부자가 됩니다. 이웃들은 또 얼마나 은근하고 조심스러운지요. 비어있던 집에 어느 날부터 못 보던 물건이 하나 들어 사는 줄 알면서도, 동네 어르신들은 다소 어색한 눈인사만 하는 듯 피하는 듯,  한번도 어디서 온 누구인가 묻는 분이 없었습니다. 1년이 다 된 요즘에야 한두 분 씩 조심스럽게 말을 붙여오십니다. 낯선 이를 불편케 하지 않으려는 배려가 느껴졌습니다. 이웃들의 속 깊고 세심함이 그와 같습니다. 가게나 식당도 다르지 않습니다.


한 해가 지나며 나는 제법 괜찮은 전주사람이 되어가는 기분입니다. 풍남문  둘레에는 눈을 맞춰둔 콩나물국밥 시래기국밥집이 두어 군데, 그 가격에 그저 흔감할 뿐인 밥집이 두어 군데, 식후에 한 숨 돌리기 마치맞은 쌍화차집도 시장 안에 있습니다. 동부시장 쪽에는 청국장집과 비빔국수집, 그리고 밤새워 문을 여는 야식집의 우동도 점찍어 두었습니다. 모래내시장에는 나같은 초짜 독거영감들에게 정성스럽게 동태나 고등어를 손질해주는 상냥한 생선가게가 있지요, 평화동 쪽에는 첫눈에도 관록이 느껴지는 반찬가게가 있어 단골 노인들로 북적입니다. 그 가게의 고추 된장무침과 무우절임은 나의 최애(?) 반찬입니다. 아이쿠, 풍남동의 닭곰탕집과 금암동 순대국집도 뺄 수 없지요. 먹는 것 얘기가 길어져 멋쩍습니다만, 다른 단골도 있습니다. 시장 안에는 손 야문 수선집 영감님이 있고, 집 가까이는 허리 굽은 할아버지가 혼자 하는 이발소가 하나 있어 즐거이 신세를 지고 있습니다. 의자가 두 개뿐인 이 이발소의 할아버지로 말씀드리자면, 흰 가운을 늘 깨끗하게 차려입고 얼마나 깐깐하게 구시는지, 어쩌다 미장원식 이발을 했다가 가면 누가 이렇게 이발을 잘못 해놨다고 혀를 차며 몹시 못마땅해 하십니다. 허리가 굽어 있어 손님들은 의자에 키를 좀 낮춰 앉아드려야 합니다. 이 할아버지는 40년 넘게 그 자리에서 이발을 하셨다고 합니다. 내 아내와 딸들은 그 집 이발이 안 이쁘다고 질색이[지만, 나는 기꺼이, 굳굳하게 할아버지 편입니다. 어린시절 뒷곁에서 아버지 손에  머리를 깎던(반은 뜯기던ㅠㅠ) 추억이 있기 때문입니다. 각설,   


그렇게 배가 든든해지고 나면 옛 부성 안 이 골목 저 골목을 천천히 아껴가며 걷습니다. 동문길과 객사 주변은 물론이고 요새는 어은골과 덕진공원, 건지산 쪽까지 영역을 넓혀가는 중입니다. 나는 큰 길보다 작고 외진 골목들을 한껏 해찰 부리며 걷기를 좋아합니다. 잘 비질된 골목길과 오래된 철대문집과 그 너머 잘 가꾸어진 손바닥빼미 채마밭이나 꽃밭들을 만나게 되면 차마 발이 잘 안 떨어집니다. 낮도 좋지만 밤에 도둑고양이처럼 쏘다니는 맛도 각별합니다. 문닫힌 가게의 내부, 웨리단길의 드레스나 한복맵시들을 주인 눈치 보지 않고 실컷 기웃거릴 수 있습니다. 비나 눈이 오는 날에는 우체국 사거리에 꽃다발을 들고 서있는 곰돌이 연인상이 더 정겹습니다. 


멀리 한바퀴를 돌아오는 귀가길에는 동문길의 터주대감인 홍지서림에 들어가 괜히 이 책 저 책을 뒤적거려봅니다. <현대문학>도 한번 펼쳐보고, <내셔날지오그래픽>이 어디 없는가 찾아도 보고, 어떨 때는 <실전재테크> 같은 책도 뒤적거립니다. 미안하게도 빈손으로 나올 때가 많습니다. 대신 옆집인 <한가네서점>에 들렀다가 이북 5도청에서 낸 것일 엉뚱한 <함경남도 함흥시지>나 <대순전경>해설서 같은 것을 군것질 하듯 들고 나오기도 합니다. 이미 배낭이 묵직한 건 중앙시장에서부터 한 자루에 오천원 하는 사과를 사 짊어지고 걸어온 때문입니다.


여기까지는 내가 사랑하는 전주 풍미의 초입일 뿐입니다. 먼 데서 벗들이 찾아와 늦도록 회포를 푼 다음날은, 남부시장 해징국으로 속을 좀 다스리게 한 다음, 반드시 나는 한벽루 지나 옛 남원행 철길이 지나던  ‘바람쐬는길’로 모시고 나갑니다. 십중팔구 공기는 맑고 하늘은 환하게 열려있습니다. 천천히 걸어야 합니다. 얘기도 조금만 하고요. 승암산과 전주천 사이로 이어지는 잘 생긴 나무와 들꽃들의 길을 삼보일배 하듯 걷습니다. 색장동 초입에서 되돌아 오는 길에는 카톨릭 평화의 전당 입구, 매력적인 동시집 [착한 마녀의 일기]의 시인 내외가 오손도손 일하는 작은 찻집을 잠깐 들르는 것이 좋습니다. 주인과 간단한 수인사 나눈 다음 아아, 높은 천정 아래에서 따끈한 차를 한잔 모시면, 산책에 이어 얼마간의 평화와 한적과 경건을 만날 수 있습니다.


조금 더 시간에 여유가 있는 손님에게는 또 다른 코스가 준비되어 있습지요. 고산에서 봉동 거쳐 삼례로 이어지는 만경강 상류길입니다. 가로수 아래로 긴 뚝방을 따라가면 강 건너로 완주 동부의 연봉들과 애국가 가사에 나오던 그 ‘공활한 가을하늘’이 거기 넓게 펼쳐져 있습니다. 고산미소시장의 귀촌 댁네 찻집에 닿아 보이차를 한잔 따끈하게 하는 것도 흡족하고, 반대쪽으로 걸을 때는 봉동시장에 들러, 미리 말리지 않으면 한 ‘세숫대야’를 말아주는 국수를 한 그릇 먹는 것도 유쾌합니다. 그 쪽 걸음에 한 자락 운치를 더하고 싶을 때는, 저 ‘화암사 고요한 절마당에서의 반나절’을 특별 메뉴로 보탭니다.


하루 이틀 더 유하시는 손님께는 그 세째날쯤, 전주가 장착한 최신 메뉴를 꺼냅니다. 도서관입니다. 아니 바야흐로 진북풍류가 무르익는 판에 술 깰일이 있나, 웬 도서관? 그러기 십상이겠지만, 일단 따라만 오라고 구구한 설명을 꾹 눌러 참고 손을 잡아끕니다. 백문이 불여일견! 나는 우선 동문길 서쪽 끝 <다가여행자도서관>을 맛 뵙니다. 파출소였던 평범하던 공간이 정성과 상상력이 투입될 때 어떻게 재창조되는지 1층부터 옥상까지 모퉁이마다, 소품 하나하나마다가 말해 줍니다. 마지못해 따라나선 손님의 눈빛이 달라집니다. 그 다음은 20평 남짓한 <학산시집도서관>으로 또 별거 아니라는 듯 슬쩍 안내합니다. 못과 산이 내다뵈는 창가에 잠시 좀 앉아있게 합니다. 오오, 탄성이 안 나오면 나쁜 사람이지요. 전주는 대개 이래, 일고 여덟 개 큰도서관 말고도 이런 작은 매력 도서관이 곳곳에 열 개도 넘어, 넌지시 양념을 얹습니다. 그 다음으로 <꽃심도서관>을 데리고 가면 이제는 놀라지도 않습니다. 도서관에 대한 인상이 ‘책 창고+ 어떻게 하면 책 안 빌려줄까 하는 표정의 무뚝뚝한 직원들’쯤으로 굳어져 있는 사람들이라면, <꽃심도서관>이 웅변하는 도서관 개념의 확장과 저변에 깔린 교육철학적 모색과 깊이에 깊이 감동하게 됩니다.


너무 압도된 손님을 <금암도서관>의 의표를 찌르는 지붕 발코니나 <연화정도서관>으로 이끌어 커피를 한잔 권하면서 긴장을 좀 풀어줍니다. 그리고 잊지 않고 한 마디 합니다. ‘책도 책이지만 이런 공간을 어려서 체험한 아이들과 그렇지 않은 아이들은 다른 어른이 될거야. 길의 공식 이름을 ‘바람쐬는길’이라고 붙일 수 있는 전주의 자신감이자 저력이지.’ 이쯤이면 돌이킬 수 없는 전주 매니아가 또 한 사람 탄생하는 것이지요. ㅋㅋ


아무려나, 남 앞에서 대놓고 애정을 드러내는 것이 모양 빠지는 푼수 짓임을 모르지 않지만, 어쩔 수가 없습니다. 당분간 나는 전주가 걸어오는 이 주술에서 놓여날 듯싶지 않습니다. 솔직히 말하면 이 지복의 주술에서 놓여나고 싶지가 않습니다. 오늘도 김병용의 주옥같은 기행에세이를 뒤적이며 배낭을 메고 나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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