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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10 | 연재 [임안자의 꿈꾸는 인생]
스위스에서 50년, 스위스에서 산다는 것 (34)
두 아이들의 학교와 삶
임안자(2022-10-12 13:42:56)

임안자의 꿈꾸는 인생

스위스에서 50년, 스위스에서 산다는 것 34






두 아이들의 학교와 삶  


  

스위스의 교육 체제는 지방자치제 규칙에 따라 주로 지방 정부에서 관리 해왔다. 그리하여 학교 입학 시기나 방학 또는 휴교일은 칸톤마다 조금씩 달랐고 초등학교 기간도 똑같지 않았다. 우리 애들은 의무교육인 유치원 2년을 다닌 뒤 초등학교에 들어갔다. 바젤은 예로부터 4년제의 초등학교를 유지했으며 우리가 사는 지역의 학교는 작은 규모에다 학생이 한 반에 20명 정도였다. 수업은 하루에 평균 대여섯 시간으로 끝났고 숙제도 별로 많지 않아서 애들은 방과후 공부에 매달리지 아니하고 친구들하고 놀기에 바빴다. 


현이와 미자는 초등학교를 끝내고 아빠가 엣날에 다니던 “인본주의 고등학교”(Humanistisches Gymnasium,이하 HG)에 진학하여 8년간 그 곳에서 공부했다. 학교는 1589년에 세워졌으며 제네바의 콜레즈 칼방(College Kalbin, 1554년 설립) 다음으로 스위스에서 가장 오래된 독어 지역의 전형적 인문계 교등학교였다. 원래는 남학생들만 허락됐었으나 남편이 졸업하고 3년 지나서 이른바 “68 학생 운동” 바람으로 1968년부터 여학생들도 받아주었다. 바젤에서는 예나 지금이나 학교 성적이 좋으면 시험 없이 고등학교에 입학할 수 있는데 우리 두 애들은 비교적 공부를 잘해서 어렵지 않게 들어갔고 현이는 20명, 미자는 17명 학급에서 배웠다. HG에서는 일반 고등학교와 다르게 필수 과목으로 고대 그리스어(일학년부터)와 라틴어(3학년부터)를 배웠고 둘 다 졸업 시험에 합격하여 “A형 고등학교 졸업장”을 받았다. A형 졸업장은 스위스의 모든 국립대학에 등록할 수 있는데다가 대부분의 과목을 시험 없이 마음대로 선택할 수 있어 대학 입학에 편리했다. 


그런데 HG는 미자가 졸업한 뒤에 “바젤 학교의 개혁”으로 말미암아 1997년 가을부터 “뮌스터 고등학교”로 이름이 바뀌어졌으며 필수 과목의 그리스어와 라틴어가 빠지고 대신에 영어와 스페인어 등 다른 과목들이 새로이 채용됐다. 그뿐만 아니라 4년 뒤에 새로운 “교육 조합법“이 도입되면서 칸톤 바젤의 초등학교는 드디어 2013년에 다른 칸톤들과 동등하게 4년제에서 6년제로 길어졌다. 그리고 HG는 3년 중등학교와 4년 고등학교로 갈라졌는데 4백년이 넘는 인본주의 고등학교의 특이한 옛스러움은 바젤 교육 제도의 현대화 바람에 시나브로 사라져 버렸다. 


아들 카르 현


카르 현은 동생 미자와 나이 차이가 1살 4개월이어서 어릴 때는 자주 싸웠으나 빨리 풀리고 잘 어울렸다. 초등학교부터 공부는 우수한 편이었고 특히 수학에 뛰어났었다. 학교에서 집에 오면 공부는 대체로  쉽게 해치웠고 축구를 아주 좋아했다. 그가 좋아하는 바젤 팀의 축구 경기가 있는 날에는 눈비가 와도 경기장으로 갔고 그게 안되면 텔레비전 앞에서 꼼짝 않고 경기만 지켜보는 열정적인 축구의 팬이었다. 초등학교 시절에 짬짬히 그리던 그림은 고등학교에 들어가면서 부쩍 늘어났다. 주로 풍자적인 소재의 만화를 그렸고 크리스마스 때나 아빠 엄마의 생일날에는 익살스러운 인물화를 그려 선물로 주곤 했다. 음악엔 그다지 관심이 없었지만 내가 부추겨서 초등학교 4학년때부터 첼로 과외수업을 4년 하다가 싫증나서 드럼으로 바꿨으나 그것도 바로 그만뒀다. 


그는 초등학교의 4학년에서 고등학교 3학년 말까지 바젤에서는 나와 여친 둘이서 처음으로 시작한 한국어 학교에 매주 토요일마다 2시간씩 다녔다. 처음에는 아주 열심이었지만 한국어 여선생님의 독일어가 시원치않아 결국 4년을 하다가 싱겁게 끝냈다. 90년대 중반에 내가 국제영화제에 다니느라 집에 없을 때면 아빠 곁에서 부엌일을 잘 도왔고 내가 해주는 한국 음식을 상당히 좋아했다. 그는 원래 사근사근하여 우리와 말 다툼을 해 본 적 없이 별로 없었는데 고등학교의 7학년이 되자 말이 갑지가 줄어들고 친구들도 많지 않은 듯 했다. 그리고 언젠가부터 밤늦게까지 밖에서 머무르고 그 때문에 늦잠으로 학교에 출석을 못하는 날이 많아져 한동안 집안이 시끄러웠다. 20명의 반에서 동양모습이 섞인 얼굴을 가진 학생은 현이 혼자뿐이었는데 몇몇 학생들이 그를 험하게 놀리고 몇 번 싸움까지 벌였는데도 우리는 그걸 전혀 모르고 있다가 나중에서야 알게 된 것이다. 


아무튼 현은 그로 인해 7학년을 어쩔 수 없이 반복해야 했었는데 그해 가을 방학 시기에 나는 남편 없이 혼자서 현이가 원하는 곳 뮌헨으로 3박 4일간 여행을 갔다. 여행 동안에 무슨 말이 나오겠지 했는데 아무 말없이 뮌헨의 박물관들과 시내를 신나게 돌아다니는 아들 앞에서 나는 할 말이 없었다. 다행히 뮌헨의 여행 뒤에 그는 8학년 끝까지 시험들을 무사히 끝내어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졸업 후 군대에 들어가야 할 나이가 됐으나 천식문제로 군대입영이 면제되었다. 


현은 1997년에 바젤의 대학에서 5년 동안 경제학을 전공하여 2002년 10월에 석사 학위를 받았다. 25살에 방을 하나 얻고는 혼자서 석사 과정을 마쳤는데 어느 회사에서 몇 달 일하다가 2003년에 바젤의 “경제 컨설팅 회사” (VZ VermoegensZentrum AG)에 취직을 했다. 그리고 7년후 2011년에 바젤과 바젤의 북서지역의 지도자가 되었으며 2018년에는 같은 회사에 속한 스위스 서쪽의 제네바, 로잔느, 프리부룩 지역의 책임자가 되어 양쪽의 일을 맡고 있다. 현은 몇 년 전에 이혼을 하고 올해로 20살인 노아 용호와 17살인 루카스 진 두 아들이 있는데 2주마다 5일씩 아들과 같이 지낸다. 그리고 역시 두 아들을 가진 초등학교 선생인 새로운 여인을 사귀어 자주 만나고 있으며 2022년 여름에 둘은 우리와 함께 첫 한국 여행을 같이 하면서 즐겁게 시간을 보냈다.  


딸 미자 이본느 


딸 미자 이본느는 어릴 때 우리와 놀고 떠드는 걸 아주 좋아했고 나중에 학교에도 아주 열심이었다. 초등학교 일학년 때에 바이올린을 시작하여 고등학교 4학년까지 계속했는데 바이올린 선생님이 갈수록 엄격해져 안타깝게도 어느날 갑자기 그쳐버렸다. 그리고 초등학교 2학년 말쯤부터 한국어를 4년간 배웠지만 여기서도 여선생님의 독일어 문제점으로 현과 같은 시기에 한국어를 끝내버렸다. 그 대신 걸스카웃트에 들어갔는데 열살에서 열여섯살에 해당하는 아이들이 여섯명에서 열명 단위로 일년 내내 매주 토요일 오후에 만나 숲이나 자연속에서 놀면서 보냈다. 그 밖에도 그들은 항상 오순절에 야영지로 떠나 14일을 보냈고 그렇지 않으면 가을에 7일간 함께 놀았다. 


미자는 16살에서 18살까지 바젤의 한 야영지의 책임자로 일했으며 6학년부터 7학년 고등학생때 중국어를 개인적으로 배웠다. 그리고 고등학교 졸업후에는 두어 달 상해 보험 회사에서 조금 일한 뒤에 1997년에 8개월 동안 서울 연세대학교에서 한국어를 배웠으며 얼마후에는 옥스퍼드 레이크 학교에서 반년 동안 영어를 배웠다. 


미자는 1999년에 바젤 대학교에 입학하고 조금 있다가 집을 떠났다. 그리고 2005년에 사회학과 영어학(언어학과 문학)의 석사를 받았다. 항상 책을 좋아하여 나와 비슷했는데 미자가 대학에 들어간 뒤에 나는 암스텔담, 베니스, 한국을 미자와 같이 돌아다녔고 비엔나에서 조교로 취직된 후에는 프랑스 리옹에서 다시 몇일 동안을 같이 즐겁게 보냈다. 


아무튼 미자는 2006년부터 2012년까지 베른과 프리부룩 대학에서 여러 종류의 연구를 마친 다음 프리부룩 대학에서 언어학으로 박사학위를 얻었는데 그러기 바로 전에 비엔나 대학의 언어학과에서 학생으로 한 학기를 보낸 바 있었다. 그리고는 프리부룩 대학에서 2013년에서부터 2015년에까지 연구원으로 있다가 2016년부터 비엔나 대학의 언어학과에서 조교로 불려 오늘날까지 일하고 있다. 첫 결혼에 실패한 미자는 몇 년 뒤에 현재 바젤의 건설회사 프로젝트 책임자로 있는 남편과 결혼하고 새로 얻은 딸 발리 옥례와 함께 비엔나에서 살고 있다. 발리는 한 살이 되기전부터 키타(어린이 보호원)에 다니고 있는데 미자는 장란꾸러기 발리의 모습을 우리에게 거의 2일마다 비데오로 보여줘 우리 둘은 아주 행복하다.  


남편과 나는 작년에 딸과 아들 가족 모두 같이서 한국 여행을 할 예정이었으나 코로나 판데미 때문에 좌절되었다. 그러나 올해 2022년에는 다 같이 할 수 있는 시간이 안돼서 하는 수 없이 남편과 나는 먼저 딸의 가족들과 여행을 같이 즐기고 중간에 좀 쉬다가 아들과 그의 새로운 여인을 맞아 즐겁게 한국여행을 했다. 


11월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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