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는 영화 읽는 영화 | 초록밤
인간답게 살 집을 구하려는
처절한 몸부림에 대하여
글 김경태 영화평론가
20대의 어린 부부인 ‘한결(전봉석)’과 ‘고운(박정연)’은 아기를 안고 아파트 모델 하우스를 구경하며 장밋빛 미래를 꿈꾼다. 그러나 배달 대행을 하는 한결과 아이를 안은 채 전단지를 붙이는 고운에게 그런 미래는 쉬이 올 것 같지 않다. 심지어 보증금 사기를 당하면서 당장 머물 집조차 없어 캐리어를 끌고 찜질방을 전전한다. 이런 와중에 찜질방에서 아이가 다치지만 당장의 병원비조차 낼 형편이 되지 못한다. 그들에게는 경제적으로 도움을 줄 부모나 형제는 없는 것 같다. 그나마 한결에게는 아버지가 있지만 그 역시 열악한 환경에서 살고 있다. 결국 배달 사무소 사장에게 월급 일부를 가불해 달라는 아쉬운 소리를 할 수밖에 없다.
고민 끝에 한결은 ‘예분(송광자)’의 집에 들어가 당분간 살기로 한다. 예분은 그가 배달을 하다 알게 되어 집안일을 도와주며 가깝게 지내는 독거노인이다. 가족을 만나러 미국으로 여행을 가면서 집을 보살펴 달라고 부탁했기 때문에 괜찮다고는 하지만 한결의 태도는 어딘가 수상쩍다. 영화는 가까운 과거에 한결과 예분이 맺은 관계와 현재의 한결과 고운이 처한 상황을 오가며 호기심을 증폭시킨다. 그러니까 예분이 정말로 미국으로 떠나면서 자신의 집에서 머물러도 좋다고 말했는지에 대한 의심의 해소를 계속 지연한다. 그러나 알고 보니, 한결은 고독사를 한 예분을 뒤늦게 발견했고, 그 사실을 숨긴 채 그 집에 살고 있었던 것이다.
이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된 고운은 망설임 끝에 시신을 앞마당에 묻고서 그 집에 계속 살기로 결심한다. 달아난 중개업자를 마침내 찾았지만 보증금을 돌려받을 수 없게 되었기에 정말 갈 데가 없다. 이제 그들은 범죄인 줄 알면서도 아이를 키우기 위한 최선의 선택을 한 것이다. 안락한 집이 필요한 이유는 단 하나, 아이를 위한 최적의 양육 환경 때문이다. 타인의 주거지에 대한 무단 점거의 정당성은 오롯이 아이로부터 획득된다. 그러면서 영화는 관객을 딜레마에 빠트린다. 아이를 잘 키우기 위해서라는 명분으로 행해지는 범죄를 어떻게 받아들여야만 할까?
영화는 방문을 한 사회복지사에게 예분이 이민을 갔다는 거짓말을 한 뒤 불안하게 식사를 하는 장면으로 끝을 맺는다. 결말을 열어 둔 채 그들의 위법적인 행동에 대한 재단을 유보한다. 사실 그들이 살고 싶어하는 예분의 집은 앞서 봤던 아파트 모델 하우스와 비교하면 낡고 허름한 구옥에 불과하다. 그래서 그 집을 탐내는 욕망은 현실적이며 더 설득력을 갖는다. 그리고 그만큼 집에 대한 갈망이 더 간절하게 다가온다. 크고 화려한 아파트를 원하는 것이 아니기에 터무니없는 욕심이나 허영심을 부리는 것이 아니다. 그저 세 명의 가족이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최소한의 여건을 갖춘 집이기 때문이다.
한편, 주목해야할 장면이 있다. 이미 한결의 거짓말이 들통 나고 모든 의혹이 풀린 상황에서 영화는 다시 과거로 돌아가 예분을 소환한다. 한결은 예분의 부탁으로 함께 초밥을 먹는다. 그런데 여기에서 예분은 등장하지 않은 채 목소리로만 존재한다. 한결의 난처한 상황을 전해들은 예분은 아이랑 살다가 힘들면 이 집에 방이 많으니 들어와 살라고 말한다. 그는 “이 집에서 조금만 더 살게요”라고 읍소하며 홀로 식탁에 앉아 있다. 이처럼 이 장면은 과거와 현재의 경계가 허물어지면서 실제로 예분과 나눈 대화인지, 죄책감에서 비롯된 그의 망상인지 모르게 모호하게 처리된다. 영화는 자신의 집에 살아도 된다는 말을 하는 예분의 모습을 관객에게 분명히 보여주거나 그러한 확신을 심어주지 않는다. 즉 예분을 극한적 상황에 내몰린 한결과 고운을 구해줄 구원자로 섣불리 내세우지 않는다. 돌봐주는 이 없이 혼자 사는 노인 역시 집이 없어 떠돌아다니는 어린 부부처럼 한낱 소외된 계층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저 아주 느슨하게 연대하며 버틸 뿐이다. 열린 결말은 한결과 고운의 불안한 주거를 끝내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에 대한 질문으로 이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