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킵 네비게이션


분야별보기

트위터

페이스북

2022.11 | 칼럼·시평 [문화칼럼]
인문학 오지라퍼의 푸념
이종민 완주인문네트워크 대표(2022-11-11 17:44:13)


인문학 오지라퍼의 푸념


글 이종민 완주인문네트워크  대표



또 하나 오지랖 행사가 마무리 되었다. 좋아하는 세 시인이 하필 같은 출판사에서 절판된 옛 시집을 복간했다. 이 반갑고 기쁜 일에 친구로서 독자로서 팔짱만 끼고 있을 수는 없었다. 그래서 또 나섰다. 시인들도 내심 기다리고 있었던 것 같았다. 출판사는 불감청고소원(不敢請固所願)의 입장이었다.


우여곡절이 없을 수 없다. 잘나가는 시인들이라 일정 맞추기부터가 쉽지 않았다. 맞춤한 장소는 10월 한 달 중 하필 그날만 예약이 되어 있었다. 어렵게 다른 장소를 섭외하고 축하객 모으는 일을 시작했다. 나름 두터운 애독자 층이 있어 하객 수를 한정시켜야 할 판이었다. 고민은 참가비를 얼마로 해야 시인들에게 누가 되지 않고 예산 부담도 줄일 수 있을까? 였다. 일을 벌일 때 가장 고민스러운 부분이다.


행사는 기대 이상으로 풍성하고 따뜻한 분위기 속에 마무리 되었다. 북콘서트도 울컥과 화기애애를 넘나들며 참가자 모두에게 멋진 가을 선물이 되어주었다. 이어진 시골 농가에서의 뒤풀이는 잊지 못할 환상의 추억으로 간직될 것이다.


문제는 역시 예산. 계산은 항상 어긋나라고 있는 것 같다. 출판사에서 시집을 150권이나 후원을 했는데 참가자가 늘어나다 보니 상당 양을 추가 구입해야 했다. 더불어 식사비용도 예상을 훨씬 넘어버렸다. 어쩔 수 없이 초청 음악인들에게 적은 출연료 양해를 구해야 했다. 그 가난한 예술인들에게 돈 얘기를 건네야 하는 게 가장 가슴 아픈 일이다. 참가비를 내고 현장에 오지 않은 사람들이나 후원만 한 이들을 챙겨야 하는 일도 꽤 번거로운 뒷설거지다.


왜? 무엇 때문에 이 궁색스러운 일들에 나서방네 코빼기가 되는 것일까? 주책없이 왜 이런 오지랖을 떠는 것일까? 허영심이 한 근 반이라면 의무감 비슷한 것이 반 근? 시인 예술가들을 돕고 싶은 마음도 조금 있겠고 지역의 문화예술계에 조금 기여하리라는 기대도 조금은 작용했을 것이다. 하지만 어느 시인이 말한 훌륭한 이의 ‘최후의 결점’인 명예욕으로 포장한 허영심이 더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돌아보면 지역문화운동이나 지역학술운동에 오랫동안 기웃거린 것도 어쩌면 이런 이유에서일 것이다. 외국문학도로서 지역의 현장에서 일정한 역할을 하기는 쉽지 않았을 테다. 비판적 아카데미즘과 학제간 연구를 내세우며 호남사회연구회를 창립하고 지금까지도 그 대표를 맡고 있는 것도 이런 소외감 혹은 열등의식과 무관하지 않다. 억지춘향으로 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에 간여하고 ‘문화저널’ 활동에 상당기간 열심이었던 것도 그 때문이었을 것이고.


이런 경력이 뒷배가 되어 전주전통문화도시 일을 추진하게 된 것은 이 허영심을 키우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언제부터 전통문화의 파수꾼이 되었다고 천년전주사랑모임을 창립해 지금까지도 바둥바둥거리고 있는 것만 보아도 쉽게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또 하나, 정년퇴임 직전 전북대학교 인문대학장 및 인문역량강화사업단장 직을 맡아 나라의 인문학 활성화 사업의 한 축을 거들게 된 것은 이런 허영심을 더 부추기고 말았다.


꽤 오랜 기간 동안 나름으로 정성을 다하다 보니 가끔은 박수소리도 듣게 되었다. 일정한 책임감도 부담으로 갖게 되었고. 오지라퍼는 이 모든 것을 소명의식으로 둔갑시킨다. 나 아니면 누가 하나? 오만한 생각까지 하게 된다. 이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앉아야 할 나이에 아직도 천둥벌거숭이로 나대는 이유가 이런 거 말고 뭐가 있을까?


다시 생각해보니 오기라는 녀석도 꽤 크게 작용을 했던 것 같다. 지역학술운동이건 지역문화운동이건 교수가 대학 밖에서 더 열심인 것을 보고 ‘전공 연구에 자신이 없으니까 밖으로 나대는 것이다!’는 비아냥거림을 자주 들었었다. 군자불기(君子不器)를 내세우며 분과학문에 갇혀서는 안 된다는 명분을 되뇌었지만 궁색한 변명이나 핑계로 치부되기 일쑤였다. 그래서였을 것이다. 두고 보자고 오기를 부리기 시작한 것은. 일정한 성과를 내야 한다. 중도에 그만두는 것은 스스로의 판단 잘못을 인정하는 것이니 계속 밀고나갈 수밖에 없다. 


그렇게 정년을 맞았는데 작금의 여러 상황이 이런 오기를 더욱 부추기고 있다. 개인적 신분의 변화가 우선 크게 작용했다. 대학교수의 정체성을 잃었으니 무엇인가 내 존재의 의미를 보장해줄 수 있는 일을 찾아야 했다. 강의와 연구 그만두고 건강만 챙기는 그런 퇴임교수가 되고 싶지는 않았던 것이다.


30년 넘게 힘써왔는데 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은 여전히 터덕거리고 있다. 경제개발에 떠밀려 슬럼가로 전락한 전통문화의 보고 전주한옥마을은 이제 더 심각한 자본의 포로가 되고 말았다. 전통문화의 노둣돌을 자처한 천년전주사랑모임은 아직도 운영비 염려에 허덕이고 있다. 인문학의 생태계는 인문역량강화사업 이전보다 나아진 게 없다. 삶의 질과 연관된 문화예술을 가성비나 경제효과로 평가하는 풍토는 오히려 더욱 강화되고 있다.


특히 요즘 새로운 지자체장들의 경제타령은 느슨해진 오기의 고삐를 더욱 죄게 한다. 그래 여기서 멈출 수는 없다. 멈추면 지난 3-40년의 노력이 물거품이 되고 만다. 오기로라도, 나 혼자만이라도, 문화를 역성들고 예술을 응원해야겠다. 삶의 질이나 사회적 참살이를 더욱 크고 길게 외쳐야겠다. 오기가 앞서 이끌면 허영심이 뒤에서 밀어줄 것이다.


이런 오기와 허영심을 지속적으로 버팀해주는 것은 물론 인문예술의 원초적 힘에 대한 굳은 믿음이다. 우리가 처한 상황은 엄청난 속도로 변하고 있지만 변하지 않는 근원적인 것들도 있다. 인간의 불가피한 한계 혹은 잠재적 가능성에 대한 인학문적 탐구는 섣부른 희망의 환상이나 절망의 낙담을 막아준다. 인간의 무한 상상력에 의해 창조된 예술세계 또한 그 고유의 치유력으로 삶을 보다 잘 견딜 수 있게 해준다.


돈의 논리에 휘둘려 갈팡질팡하는 게 어디 어제오늘 일이던가? 이를 경계하는 성현들의 정성어린 가르침에도 불구하고 경제논리는 여전히 유효한 득표 전략이다. 많은 선지자들의 피를 토하는 수천 년 동안의 외침에도 불구하고, 물질적 욕망은 개발과 성장이라는 가면을 쓰고 민주주의의 주인임을 자처하는 선거권자들을 노린다. 지자체장들을 비롯한 정치세력들은 이런 불변의 욕망을 자극하여 문화예술을 볼모삼아 표를 구하고 있다. 그렇게 애써 쌓아온 공든 탑을 하루아침에 쓸어버리려 하고 있다.


그래서다. 다시 인문학과 문화예술을 소환해야 하는 것이. 가난한 시인 예술가들을 챙겨야 하는 것이. 다양한 인문학 강의들을 기획하여 많은 이들로 하여금 그 욕망의 굴레로부터 조금이라도 벗어나 스스로를 뒤돌아 볼 수 있게 도움을 주어야 하는 것이.


이제 인문학 오지라퍼로서의 명분까지 확인했으니 더 열심히 오지랖을 떨어야겠다. ‘치유의 시, 위로의 노래’ 행사를 챙기고 ‘줌으로 떠나는 치유의 세계역사문화기행’도 진행해야 한다. 책의 도시로 우뚝 선 전주로 젊은 문인들을 초청하여 ‘김사인 시인과 함께 하는 전주도서관 기행’도 추진하고 원로 시인들을 초청하여 ‘한국시의 깊은 힘’도 선뵈어야 한다.


그렇게 절망의 안개를 걷어내는 것이다. 깜도 안 되는 정치인들이 자행하는 황당무계한 분탕질을 그렇게 또 견뎌내 보는 것이다. 꼭 희망이 있어서가 아니다. 죽음에 이르는 병에 스스로를 내맡길 수는 없기 때문이다.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