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 전주는 어떻게 책의 도시가 되었는가
지식과 문화의 토대 위에
우뚝 선 책의 도시
인문학적인 통찰력이 사라진 시대다. 우리나라 성인 절반 이상은 1년 동안 책을 한 권도 읽지 않고, 청소년들의 이해력과 문해력이 문제시되는 콘텐츠의 홍수 시대. 한정된 시간동안 더 짧고 강한 자극에 끌려 독서는 뒷전이 된 흐름 속에서 책이 시민들의 가장 친근한 벗이 된 전주의 행보는 눈길을 끈다. 전주는 우리나라에서 인구대비 도서관 비율이 가장 높은 도시다. 해마다 전주독서대전을 열어 독서 문화의 정착을 주도하고 있기도 하다. 최근에는 새로운 형태의 특화도서관을 순차적으로 개관하여 주목을 받고 있다. 문화저널은 창간 35주년을 맞이해 인문학의 꽃을 피우고 있는 전주의 책문화와 책의 그릇이 된 도서관의 행렬을 들여다보았다.
글 성륜지·신동하 기자
민과 관이 협력하여 만들어낸
책 문화 르네상스
책은 지식과 문화를 전수하는 매체이다. 전주는 조선시대에 지식 정보화와 지식 산업의 중심에 있었다. 그것을 증명하는 것이 바로 완판본이다. 완판본 책들은 우리에게 화려했던 방각본의 역사와 문화를 말하고 있다. 그중에서도 완판본 한글고전 소설은 서울의 경판본과 더불어 후대의 소설 발달에 큰 공헌을 해냈다. 이후 활자본 소설은 물론 한국의 현대 소설에 이르기까지 전주를 소설문학의 원천지로 만들었다.
전주에 이러한 책산업이 발달할 수 있었던 이유는 기술과 환경과 사람이 삼위일체를 이루었기 때문이다. 전주는 조선시대 전 기간을 통하여 전라관찰사가 머물던 전라감영이 위치했던 곳이다. 당시 서적은 학문을 진흥시키는 것은 물론 정치적 이상을 실현시키기 위한 도구였고, 조선 정부는 서적 간행에 큰 힘을 쏟았다. 이 과정에서 질 좋은 종이를 생산하던 전라감영이 그 중심에 서게 된다. 전라감영의 지소와 인출방에서는 종이를 제조하고 책을 출판하였고 이를 완영본이라고 불렀다.
전주 지역의 중산층들은 벼를 재배하고 한지를 제작하여 돈을 벌었고 상업에 종사하는 부유층들이 많이 생기게 되었다. 이들은 쉽게 읽을 수 있는 소일거리가 필요하게 되는데, 마침 유행하던 판소리 ‘춘향가, 심청가, 토별가, 적벽가’ 등이 눈에 띄었고, 이것들을 책으로 출판하고자 하는 요구가 있었다.
발달한 전주의 시장은 자연스럽게 책의 유통처가 되었다. 전주에는 큰 시장이 여럿 있었다. 한약재와 특용작물을 취급하는 동문외장, 양념과 어물을 취급하는 서문외장, 생활품과 곡식을 취급하는 북문외장이 대표적이다. 그중에서도 전라도에서 가장 큰 시장인 남문시장 근처에서는 서계서포, 다가서포, 칠서방, 양책방과 같이 많은 서포가 문을 열고 상업적으로 책을 만들어 판매했다.
조선시대를 관통해서 이어진 전주의 독서문화는 전주에 남은 마지막 서포였던 양책방의 책판들이 6.25 전쟁 중 폭격으로 인해 모조리 불에 타 사라지고, 1951년 폭발사고로 인해 전라감영이 무너진 후 그 자리에 도청이 지어지며 사라지는 듯 했다. 그러나 70여년이 지난 2010년대 이를 다시 복원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나타났고, 현재 전주는 다시 한 번 책의 도시로 우뚝 일어섰다. 그 이면에는 어떠한 노력이 있었을까?
전라감영 복원
전라도와 제주도를 통솔하는 전라관찰사가 지내던 전라감영은 역사 문화적으로 의미가 큰 장소다. 동학 혁명 당시 전주화약이 체결된 곳이며, 김성근 관찰사에게 대접을 받은 조지 클레이턴 포크의 기록을 통해 전주의 식문화를 엿볼 수 있기 때문이다.
전라북도 청사의 이전 계획이 확정된 1996년을 시작으로 2005년 도청이 신도심으로 이전하며 전라감영 복원에 관한 논의가 본격적으로 이뤄졌다. 그러나 복원 범위와 구도청의 철거에 대한 회의적인 의견이 있어 논의가 중단된 상태였다. 10여년이 지난 2017년 전북의 재도약을 위해 복원이 시작됐고 3년간의 대공사 끝에 2020년 11월 완공되었다.
현재 관찰사가 업무를 보던 선화당과 민심을 살피던 관풍각, 휴식을 취하던 연신당, 가족들과 거처하던 내아, 내아 행랑 등 동편에 있는 건물들은 모두 복원되었다. 지소와 인출방이 있던 서편은 아직 어떻게 활용할지 결정된 바가 없다. 비록 부분적이지만 전라감영의 복원은 전주의 자긍심을 높이는 계기가 되었다.
완판본 문화관
2011년 10월 개관한 완판본문화관은 전주 지역에서 생산한 각종 출판유산을 보전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전시실에서는 한글고전소설, 완영본 서책, 책판 제작과정 등 기록문화와 관련된 다양한 기획전시가 열린다. 현재는 ‘전주 동의보감 완영책판을 품다’가 진행되고 있다. 전시에서는 전북대학교 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던 ‘동의보감의 완영판본’을 만나볼 수 있다. 목록, 내경편, 외형편, 잡병편, 침구편, 탱액편 여섯 점이 공개되며, 이것들은 책판의 형태, 고정 방법, 책판을 수정하고 보수했던 흔적이 엿보이는 자료다. 한의학적 지식의 보급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동의보감의 유일한 책판이기에 더욱 의미가 있다.
완판본 문화관의 안준영 관장은 앞으로의 계획으로 “인쇄술은 인류 최고의 발명이다. 그런 의미에서 조선시대 단일도시로서 가장 많은 책을 출판한 전주는 대단하다. 이 정신을 후세에 그대로 전달하기 위해 월인석보와 불교 경전들, 지역을 대표하는 문학서인 열녀춘향수절가들을 복원하고자 노력중이다”라고 밝혔다.
완판본-마당체
사회적 기업 마당은 2013년 ‘완판본 마당체’를 개발했다. 300여년 동안 목판위에서 잠들어 있던 완판본 글자를 집자하여 만들어진 디지털 글꼴이었다. 완판본의 역사적 가치나 내용 뿐만 아니라 그것을 활용한 새로운 콘텐츠를 제작하는 것은 미비한 실정이었기에 마당의 시도는 역사 자원의 활용가능성을 넓히고 문화상품 개발을 촉발하는 계기가 되었다.
2017년 전주시는 ‘완판본 마당체’의 저작권을 넘겨받아 마당과 함께 5,560자의 고어체를 추가로 개발해 ‘전주완판본체’를 완성하고 무료로 배포했다. 국민 모두가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는 족보있는 우리 서체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도서관 정책
전주는 2014년부터 인문 자산을 기반으로 독서문화 정책을 펼치고 있다. 전주 시립도서관에서는 도서관 책 배달 서비스인 ‘옴서감서’를 운영 중이다. 서비스를 통해 시립도서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자료를 다른 시립도서관과 공립 작은 도서관을 통해 대출 및 반납할 수 있다. 지난해 시민들이 이 서비스를 이용해 대출한 책이 총 359,778권에 달할 정도로 인기를 끌고 있다. 자료가 필요할 때면 언제 어디서든 가까운 도서관을 방문하여 열람할 수 있는 체계가 만들어진 것.
또한 장애인, 다문화 가정 등 정보 취약계층을 위한 독서복지를 강화하고 있다. 재택 장애인에게 무료로 도서를 대출해주는 ‘책나래 서비스’, 도서관에서 인형극 공연을 통해 문화격차를 줄이는 ‘다문화 멘토링’이 대표적이다. 유아를 대상으로 한 책육아에도 공을 들이는 중이다. 2014년부터 운영된 ‘야호 책놀이 프로그램’은 프로그램은 어린이들이 그림책과 함께하는 생태놀이, 독서디베이트와 같이 책과 관련된 활동을 하며 책 읽는 습관을 만들 수 있도록 한 것이다. 프로그램은 시립도서관을 중심으로 상하반기 각각 24주 동안 운영된다. ‘생애 첫 도서관 이야기’는 주말 동안 가족과 함께 독서 활동을 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프로그램이다. 책놀이와 함께 찾아가는 도서관 서비스 등이 제공되어 부모와 아이가 그림책을 매개로 소통할 수 있도록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