벗에게 시간을 묻다
옹기장이 이현배와 시인 박형진이 주고받는 손편지 22
모항 박형진 시인께
창너머 볼빨간 홍시가 유혹을 합니다.
속이 텅빈 고목으로 큰추위를 앓았는지 작년에는 간신히 살았구나 싶었는데 올해는 새 가지를 내어 제법 무성하더니 헤아릴 만큼의 결실을 보입니다. 맛을 아는 때까치들이 벌써 다녀 가쌉니다.
개백이와 산보를 갈 때는 건빵바지로 갈아입고 나서고 있습니다. 한손으로는 개백이를 잡고 다른 한 손으로 알밤과 도토리 상수리들을 호주머니에 넣기 좋습니다. 돌아오는 발걸음이 제법 묵직합니다.
“가을철에 산에 가면 없는 처갓집보다 낫다고 그랬어” “요 밑 원촌 번암동네는 담배만 하나 살도 쌀, 술 한잔 먹을래도 쌀을 갖다줘야 헌게 4~50마지기 농사를 지어도 쩔쩔매. 우리는 20마지기 지으면 동네 최고부자여. 상백암은 산에서 용돈이 나온게 그럭저럭 살만혀”
(구술 서성동, 1944년생, 상백암마을 / 채록 김성식 2022. 10. 03)
어제는 도토리밥을 지었습니다. 깜밥까지 해보려 했는데 식구들도 맛이 궁금했는지 금방 동이 났습니다. 제가 깜밥을 엄청 좋아합니다. 그걸 타박하는 아내마저 장을 봐올 때 가끔 선물이라며 내민답니다. 두고 쓰는 말인데 깜밥 중에 깜밥은 묵깜밥입니다. 그래도 묵을 쑤기까지는 멀고 도토리밥으로 깜밥까지 해보려 합니다.
제가 아홉 살 때까지 흙을 먹었습니다. 그래 어려서 회충이 많았더랬습니다. 어머니께서 그게 오랫동안 걸리셨던지 커서까지 묵을 쑬 때마다 도토리 우린 물을 구충작용으로 마시게 했습니다. 그 맛을 아는지라 망설이면 ‘묵깜밥 줄게’ ‘묵깜밥 줄게 ’하셨습니다. 그 쓰고 떫은 고역스러운 맛 뒤에 종잇장처럼 얇디얇은 묵깜밥은 최고의 보상이었습니다. 묵을 말린 묵나물도 도시락반찬으로 싸 가면 친구들도 좋아했습니다.
요새 옹기점에서 저는 그릇을 빚고 식구들은 건조장으로 쓰던 창고를 정리하고 있습니다. 저는 보물이라고 하고 아내는 고물이라고 하는 것들을 정리해야 해서 낮에는 저도 그 일을 하였습니다. 이참에 마당도 정리하자 싶어 농촌형 공공미술로 제작했던 컨테이너의 자물통을 절단하고 열었더니 거기에도 도토리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저는 아내를 불러 여기에도 도토리이야기가 있다고 했더니 ‘자기가 써 놓고 잊고 있었냐’고 자기는 알고 있었다고, 하여간 이상한 사람이라고 합니다.
[꿈의 가게 b-마트]
요새
도토리 줍는 이를
많이 봅니다.
그거
차라리 사 먹는 것이 쌉니다.
그런데도
애써 도토리를 주워 모읍니다.
입안에서야 씹을 것도 없이
미끄러져 금방 사라지고 말 것이지만
[앙금, 그리움과 아쉬움]이 애써
도토리를 주워 모으게 하는 것일 겁니다.
여기
소개하고자 하는
우리 백운의 가게들
이 가게들에는
어디에나 다 있는 상품말고도
마치
함께했던 동무들에 대한 그리움,
지나간 세월에 대한 아쉬움 같은
고요한 아름다움이 있습니다.
오늘
우리 백운에서의 하루
꿈의 가게 b-마트 쇼핑을 통해
대형마트에서 놓쳐온
일산의 낭만, 작고 소소한 재미를
덤으로 받아 가셨으면 합니다.
(2007년 11월)
b-마트는 백운의 ‘ㅂ’이기도 하고, 대문자 E-마트의 옆구리를 찔러보고 싶어서 찌르기 좋게 소문자 ‘b’로 한 거였습니다. 그냥 그래 봤다는 것이고 그 결과물이 천덕꾸러기가 되어 그저 씁쓸하게 옹기점 마당에 맥없이 놓여 있습니다.
그리움/ 아쉬움/ 고요한 아름다움
말은 그렇게 했는데 과연 아름다운지
이 가을이 또 그렇습니다.
2022. 10. 12
옹기장이 이현배 드림
손내골 현배 선생님!
‘묵깜밥’ 이야기를 읽노라니 옛날 생각이 새록새록 납니다. 저의 어머니는 음식 솜씨가 참 좋으셔서 운 좋게도 저는 어릴 때부터 여러 가지 음식 만드는 것을 가까이서 보고 먹어볼 수 있었습니다. 특히 제가 막둥이인지라 어머니 앞지랑에서 떨어지질 않았는데 그 덕분에 지금도 어머니의 음식이 기억에 생생합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결국은 모두 구황의 언저리를 크게 벗어나지 않은 것들이므로 거의 잊혀진 음식들이지요. 상수리 도토리가 떨어질 때쯤이면 어김없이 마당 멍석위에는 이것들이 마르고 있던 정경들 절구통에 자근자근 찧어서 껍질을 까내고 물에 울쿠던 모습들, 맷돌에 갈아서 앙금을 내고 그 앙금을 다시 몇 번을 물거르기를 한 다음 깨끗한 천에 펴 말렸다가 다시 가루를 내서 보관해두고 필요할 때 조금씩 덜어 쓰던 모습과 묵쑤던 때의 힘들여 젓던 일들, 그 모든 수고가 묵깐밥을 긁어 먹기 위해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만치 그것은 맛이 있지요.
그것은 정말이지 너무나 수고스러운 일이며 요즈음 말로 가성비가 떨어진다고 할까요. 하지만 그것이 구황과 동시에 별미인지라 공들이는 품을 생각할 겨를이 없었겠지요. 저의 어머니는 가을에 메밀 농사를 지어두고 그것들로 피묵을 자주 쑤셨습니다. 농가에서 메밀농사는 많이는 하지들 않았는데 어쩌다 가뭄이 들어 여름 끌을 붙이지 못할 때는 대체 작물로 많이 심었습니다. 메밀은 숙기가 짧아서 ‘심으러 갈 때 베어서 지고 오는 사람만 만나지 않으면 먹을 수 있다’는 작물이지만 제사음식에는 반드시 한몫을 해야되는 식재료이기 때문에 예전엔 적으나 많으나 빠질 수 없는 농사였답니다. 도토리 묵만큼은 아니어도 껍질째 불퀐다가 찧고 빻아서 쑨 피묵은 참 맛이 있었습니다. 껍질을 벗겨내고 하얗게 쑨 것하고는 많이 달랐지요. 묵깐밥은 말할 것도 없지만 시장할 때 차게 식힌 물을 수저로 뚝뚝 떠서 김치 걸쳐 먹던 맛은 지금도 혀 끝에 남아서 저도 어머니처럼 묵을 쑤면 꼭 피묵을 쑵니다.
메밀농사를 오랫동안 하지 않다가 작년에 조금 했습니다. 조금이라고는 해도 조곡으로 한 200킬로그램 정도 했으니까 예전에는 조금씩 수확하던 것과는 비할 수 없이 많은 것이지요. 하여 시장에 내다 팔아야 하는데 가격을 알아보니 종자 살 때 킬로그램 당 7천원 하던 것이 이제는 2천원 밖에 줄 수 없다더군요. 요즈음엔 메밀도 경관농업인지라 코로나 때문에 축제가 없으니 따라서 메밀을 심는 사람도 찾는 사람도 없기 때문이라지요. 그래 여기저기 시나브로 없애고 먹을 것과 종자만 남겼습니다. 올해도 메밀을 심었습니다. 벌을 몇 통 치는데 벌이나 위한답시고 한마지기정도 심었다가 꽃만보고 수확을 포기했습니다. 바로 어제 예초기로 이것들을 베어서 그 자리를 깔아버렸습니다. 기분이 조금 야릇했지요. 지어놓은 농사가 병해충이나 수해 한발로 못쓰게 되었다면 모르겠는데 가격이 너무 형편없어서 수확을 포기하고 갈아엎거나 베어 눕히는 일, 주곡인 벼농사도 올해 그런 일이 전국 도처에서 벌어졌는데 메밀 따위야 여북하겠습니까? 하지만 옛날에 비추어 보면 상상할 수 없는 일이라 기분이 묘하며 씁쓸했습니다.
그나저나 이제 본격적인 수확철입니다. 저는 벼는 벌써 베었습니다. 10월 5일에 베었으니 오늘로 꼭 2주째 되었군요. 어느날쯤 베자고 기계 부리는 사람과 날을 잡으면 낫들고 가서 미리 논의 네 귀퉁이를 조금씩 벱니다. 그래야 콤바인이 수월하게 방향을 바꿀 수 있으니까요. 그러기 전에 저는 논둑부터 베었습니다. 예초기로 설렁설렁 베고 있는데 지나가던 사람이 그러더군요 “금방 나락 밀 것인디 무엇땜시 논둑을 비고 있는가, 그냥 놔 둬버려도 되것고만...” 그러긴 한데 개 바위 지나가듯이라도 베어놔야 나락 베기가 좋고 보기도 좋지 않을까요? 저는 그냥 유난 떤다고 생각할까봐 걱정을 하면서도 싱긋 웃고 말았습니다. 논이나 밭이나 수확끝나면 더 썰렁한 것이라 우뚝우뚝 서 있는 마른 풀들이나 수수깡 따위는 말짱하게 베어 주는 게 (다른 일에 바쁘더라도) 워낙이 좋습니다. 아무렴요!!
그리고 돌아서서 바로 들깨를 베었습니다. 올해는 들깨가 참 잘 되었습니다. 벨 때 생것이긴 해도 많이 무거웠습니다. 들깨값도 좋아서 작년엔 참깨보다 더 비쌌지요. 올해도 그만은 못해도 들깨값이 괜찮다는군요. 싸나 비싸나 많으나 적으나 들깨농사는 제가 평생 지어 왔습니다. 우선 짓기가 수월합니다. 다른 작물보다 병해충에 강하니까요. 그리고 제가 워낙 들깨잎 찜이나 김치, 들깨잎 장아찌를 좋아하고 들깨가루가 들어가는 슴슴하고 부드러운 나물 음식을 좋아하거든요. 그 향을 좋아해서 들깨밭에 자주 가는데 저같은 게으른 농부가 또 그러지 않을 수 없는 건 일전에 농협 마트에 갔더니 어떤 낯 모르는 여성분이 저에게서 들깨냄새가 난다며 자기가 좋아하는 향이라고 묻지도 않은 말을 하더군요. 저도 왠지 그분이 좋아졌습니다. 선생님도 뜰깨밭에 자주 가시기를 권합니다. 예초기질을 과하게 했는지 야속하게도 글씨가 잘 써지지 않아 혼났습니다. 추워지는 날씨에 부디 건강하시고 변변찮은 시 한편 동봉합니다.
2022. 10. 19 박형진 드림
이 하염없는 일들이 나를
마늘을 깐다
부엌일 바쁠
아내를 위해서지만
맑은 가을날 오후
마당귀 나무그늘이 아까웠다
할 일이 이것뿐일까 마는
나는 종종
이런 일이 좋다
벌레 먹은 콩을 고른다든지
쪽파를 몇 단씩 다듬는다든지
바지락을 한소쿠리 깐다든지
적당한 곳에 자리 잡고 앉아
그 하염없는 것들을 만지다 보면
마음속으론 바람이 지나가고
구름이 지나가고
어쩌다 저 멀리
푸른 하늘이 드러나기도 한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하얗게 까진 마늘들이
하나씩 더해져 그릇에 가득하고
이제 한쪽엔 껍질만 남았다
내가 내게서 나와
또 다른 나로 옮겨간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