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안자의 꿈꾸는 인생
스위스에서 50년, 스위스에서 산다는 것 35
부산국제영화제와 전주국제영화제
1996년 2월 초에 나는 영화 주간지 “씨네 21”의 해외특별 기자로 베를린 영화제에 대한 글을 쓰려고 현지에 갔다가 김지석 교수를 만났다. 그는 나를 보자 반갑게 손을 잡으며 “올 가을 부산에서 영화제가 열리는데 같이 일하자”고 했다. 그렇지 않아도 한국에 영화제가 없어 안타까웠는데 너무나 기뻤다. 그는 영화제에 대한 설명을 하면서 남포동의 극장들과 해운대 수영만의 요트 경기장을 주요 장소로 쓸 예정이라고 했다. 그 순간에 언뜻 로카르노 영화제의 야외 상영장 피아자 그란데(Piazza Grande)가 떠올라 그에게 부산의 요트 경기장에서 피아짜 그랜데의 대규모 스크린을 쓴다면 대중적인 인기를 얻을 것 같다고 하자 그가 그렇다면 해보자고 했다. 그리고 8개월 뒤에 취리히에 있는 스크린 회사에서 동양에서 제일 큰 스크린(24.9x13.8m)을 부산의 요트 경기장에 설치했다. 예상했던 대로 관객 수가 첫 개막식 날부터 아주 높아서 스위스의 대규모 스크린은 2010년에 부산영화제 전용관이 만들어질 때까지 인기를 끌었다.
그해 부산영화제에서 나는 뉴욕 현대 미술관의 영화담당자 로렌스 카뒤쉬 그리고 파리 퐁피두 센터의 영화 프로그래머 실비 푸라(장-루 파섹 관장의 대리)와 함께 부산영화제의 첫 공로상을 받았다. 그때부터 2003년까지 나는 부산영화제의 프로그램 애드바이저로 8년간 일했다. 처음에는 다섯 사람이 나눠 하다가 3년째부터 아시아 영화평론가인 영국 출신 토니 레인즈와 내가 남게됐다. 유럽에 삶터를 둔 나는 주로 베를린, 칸느, 베니스, 로카르노, 상 세바스챤에서 영화를 보고 일년에 “월드 시네마” 프로그램 책임자에게 네다섯 편을 넘겨줬다. 월드 시네마 말고도 나는 “뉴 커런즈” 경쟁영화 부문의 심사위원들을 관리했는데 외국 영화제서 심사위원을 해본 사람이 한국에 아무도 없어 1회 때부터 내가 모두 맡아했다. 우연하게 칸느 영화제서는 1994년에 한국인으로는 처음으로 “황금 종려상”에 신상옥 감독님과 “황금 카메라” 부문에 나를 심사위원으로 뽑았다. 그뿐 아니라 나는 1995년에 포르투갈 판타스포르토 영화제의 “젊은 감독”과 1996년에 로카르노 영화제의 “국제평론협회”의 심사위원을 맡아 했던 지라 새로 생긴 부산영화제에 어느정도 도움이 됐을 거로 생각한다.
부산영화제는 도쿄와 홍콩의 영화제들이 기울어져 가던 시기에 출발을 하여 상당히 빠르게 동양 영화제의 윗자리를 누리게 됐고 그 덕분에 나는 부산영화제서 일하면서 개인적인 프로젝트 3개를 유럽에서 실행할 수 있었다. 2000년에 취리히의 리트베르크 동양박물관에서 처음 열린 한국의 국보전시 “한국-고대 왕국들”의 프로그램에 맞춰 무속, 불교, 유교의 영화 13편을 취리히, 바젤, 베른, 로잔느의 비상업성 영화관에서 두 달 동안 실행했고 유현목 감독 부부가 취리히와 바젤 행사에 참석하셨다.
2001년에는 체코슬로바키아의 카를로비 바리 영화제와 공동작업으로 나는 한국영화의 “다양성과 역동성”을 주제로 장편 14편, 단편 14편을 처음으로 동유럽의 관객들과 만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했다. 그리고 2002년에는 스위스의 한국 대사관의 요청으로 한국에서 관객의 인기가 높았던 10편 영화를 취리히의 필름포디움 영화관에서 한 달 동안 상영했다. 한국 여성 소피 장이 스위스의 소령으로 나오는 박찬욱 감독의 “공동경비구역 JSA”를 개막식 영화로 골랐는데 심재명 제작자가 취리히 개막식에 참석했다. 개막식에 참여한 취리히 시장 에스터만은 개막식 인사말에서 “....섭섭하게도 스위스 군대에는 아직까지 여자 소령이 없는데 영화를 보면서 부러웠다”고 하여 관객들을 웃겼다.
부산에서 7년을 보낸 후 나는 나만의 영화 프로그램을 만들고 싶었다. 그러던 차에 전주영화제서 2002년 “아시아 독립영화포럼”의 심사위원으로 나를 초청하고 나중에는 전주영화제로 오라는 연락까지 받았다. 그들의 부름에 2003년에 관찰자로 갈 수 있으면 좋겠다고 대답하자 기꺼이 받아줬다. 그리하여 2003년에 나는 전주영화제에 참석하여 조직의 약점이나 문제점을 찾아내고 전북일보에 두어 번 글을 썼다. 전주영화제서 대안영화제로서 자유 독립 소통의 가치성에 중요함을 느꼈고 내 프로그램을 만들 수 있을 것 같았다. 결국 2004년에 전주영화제는 나에게 부집행위원장 자리를 내주었고 내가 원하는 프로그램을 만들 수 있게끔 해줬다. 그리고 2003년에 내가 전주영화제에 심사위원으로 추천했던 바젤의 뉴메디어 연구소 풀러그인 대표 아네트 쉰들러가 전주영화제가 마음에 든다며 전주영화제의 작품들과 스위스 감독들의 작품들을 같이 보여주고 싶어해서 “지프 마인드”의 2004년 책임자인 조한상과 공동 작업을 할 수 있도록 도와줬다. 쉰들러는 그해 가을에 한국의 몇몇 감독들의 작품들을 바젤로 초청하여 초청자들과 회의를 하고 한 달간 전시를 가졌다.
전주영화제서 내가 만든 첫 프로그램은 쿠바였다. 2003년에 스위스 정부는 로카르노 영화제를 무대로 경제적 협조가 필요한 개발국의 영화 생산을 도와주는 시스템을 만들었는데 첫 대상이 쿠바였다. 90년대에 프리부룩 영화제서 알게된 감독 두 명과 친구가 된 나는 이때다 싶어 로카르노에 가서 쿠바 친구들의 협조로 “쿠바영화제작소” 대표 마리아 돌로레스를 만나서 쿠바영화를 전주영화제서 보여줄 수 있는가를 타진했다. 물론 한국과 쿠바는 비수교국이었지만 노무현 정부에서 허락하여 내 꿈이 이뤄졌다. 지면상 다 쓸 수는 없지만, 돌로레스 여사의 노력으로 나는 2004년 전주영화제에서 한국인들에게는 처음인 명작 13편과 다큐멘터리 4편의 쿠바 영화를 보여줘었는데 상영관들은 매번 관객들로 꽉 차있었으며 두 대학에서는 교수가 학생들을 데리고 왔었다. 12년이 지난 뒤인 2016년에 나는 남편과 쿠바를 여행하면서 돌로레스를 다시 만났는데 그녀는 전주영화제 이후에 쿠바의 영화계에서 김동호 집행위원장과 임권택 감독님을 초청하고 한국영화 전시를 두 번 열었다고 했는데 두 나라의 사이가 조금은 좁아진 듯 하여 참으로 보람차고 만족스러웠다.
2005년의 프로그램은 두 개였다. 베를린 영화제의 새로운 집행위원장 코실릭과 나는 어렵사리 임권택 감독의 회고전에 합의를 본 다음 포럼의 공동 대표인 에리카와 울리히 그레고 부부의 끈끈한 협조로 20편 영화를 베를린 영화제에 내놓았다. 부인하고 함께 영화제에 참석한 감독님은 “평생에서 가장 행복한 날”이라고 하셨는데, 동양에서 최초로 감독님에게 주어진 “명예황금곰상”과 98번째의 작품인 “춘향뎐”의 특별 상영으로 회고전은 절정을 이루었다. 그레고 부부와 나는 “독일 키네마택 친구” 협회의 협조로 책 “Im Kwon-Taek 임권택”을 출간했고 그의 회고전은 영화제가 끝난 뒤에도 아르세날 영화관에서 한 달간 계속 상영을 했다.
2005년의 두 번째 프로그램은 아프리카의 서북부 국가들인 마그레브(아랍어로 해가 지는 곳) 영화들이었다. 그 당시에 나는 마그레브의 영화는 잘 알지 못했으나 2004년 칸느에서 유럽 친구를 통해 튀니지의 시네텔레필름의 대표 아흐메드 바하인과 카타르고 영화제 여집행위원장 나디아 아티아를 알게 되어 전주영화제서 마그레브 영화를 보여주고 싶다고 했다. 그들은 동양에서는 처음인데 잘 해보라며 나를 10월초에 66회 카타르고 영화제에 초청했다. 나는 카타르고 영화제와 마르케팅에서 본 영화중에 4편을 찾아냈다. 그리고 개막식 날 내 옆에 앉았던 모로코 감독이 나를 파티에서 모로코 영화원의 부위운원장 모하메드 바크림에게 소개했는데
나는 그로부터 두달 후 12월에 모로코의 22회 마레케시 영화제에 초청을 받았다. 아름다운 마레케시에서 나는 일주일 동안 영화를 찾느라 영화관에서만 시간을 보냈지만 마음에 드는 영화는 하나뿐이었다. 나는 바크림의 권고로 영화제가 끝난 다음에 수도 라바트에 기차로 가서 4일간 영화원에서 영화를 보고 3편을 선택했다. 2005년 전주영화제의 마그레브 특별전은 온갖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표가 매진될 정도로 많은 관객들이 몰렸고 기자들도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리고 영화제 중반에 열린 “마그레브 영화와 아랍 문화의 이해”를 중점으로 회의가 열렸었다. 유명한 “천일야화 이야기꾼이며 전통적인 아랍 영화의 감독인 튀니지의 나세르 케미르와 모로코의 바크림 부위원장 그리고 한국의 아랍지역학과 교수이며 “무슬림 여성”을 펴낸 조희선 교수와 “이슬람” 저자인 이희수 한양대학교 교수는 두어 시간에 걸쳐 열띤 토론을 펼쳤다.
전주영화제는 2005년에 문화관광부에서 우수 영화제로 평가를 할 만큼 안정스러워졌다. 나는 인디비전 경쟁 부문에 몇 편 영화를 선정하고 독일의 이름난 하룬 파로키 감독을 “디지털 스펙트름” 의 심사위원으로 초청했다. 나의 특별전 프로그램은 2004년 초가을에 상 세바스챤 영화제에서 우연히 만난 러시아의 국제영화평론계 대표 안드레이 푸라코프의 도움으로 이뤄졌다. 고바초프의 해빙 선언이 나온 80년대 말쯤에 소비에트 영화총회에서는 과거 검열 문제에 걸려 지하로 사라진 영화를 찾아내려는 뜻에서 쟁의조정위원회를 만들고 풀라코프를 대표로 뽑았다. 그들은 4년에 걸쳐 250편 영화를 찾아냈는데 그중에 일부는 베를린, 칸느, 베니스에서 소개됐다.
나는 2005년에 베를린 영화제서 풀라코프와 만나서 프로그램에 대한 상의를 한 다음 3개월 지나서 그를 전주영화제의 경쟁부문에 심사위원으로 초청하고 사이사이에 둘이서 영화 10편을 뽑았다. 그러나 소비에트 해체 이후에도 모든 영상 자료는 모스코 필모폰드에 저장돼 있어 나는 키에프 영화제를 참석하여 우크라이나 정부의 허락을 따로 받았는데 프린트를 받기까지 문제는 복잡했고 러시아 정부 관료들의 책임성 없는 일처리로 아주 힘들었다. 아무튼 소비에트 시절에 나온 영화들에 대해서 전주영화제에 참석한 세르게이 에이젠스타인 전문가인 나움 클레만과의 시네 토크가 있었으며 그 밖에도 그는 한국에 알려지지 않는 소비에트의 영화들에 대한 해설을 해줬다.
임안자 영화평론가
12월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