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휘현의 숨은 책 좋은 책 11 박혜란, <나이듦에 대하여>
그럼에도, 인생은 아름답지 아니한가
글 이휘현 KBS전주 PD
“차돌멩이를 땅에다 묻고잉, 삼 년만 그대로 놔두믄 수정이 된다는디?”
옆집 동갑내기 재성이의 말에 아홉 살 소년의 가슴은 마구 뛰었다. 며칠 전 같은 반 상일이가 갖고 놀던 수정이 떠올랐던 것이다. 우툴두툴하게 못생긴 것이 햇빛만 받으면 영롱한 빛을 쏘아대던 신기한 물건. 한 번만 만지게 해달라고 졸랐지만 상일이는 끝내 제 손에서 수정을 내어주지 않았다. 두고 보자.
옆집 재성이와 온종일 동네방네 쏘다니며 캐낸 자그마한 차돌 몇 개를 집 마당 한 귀퉁이에 묻었다. 해는 뉘엿뉘엿 저물어가고 있었다.
“절을 꼭 혀야되는 거여?” 소년의 미심쩍음에 옆집 재성이는 단호하게 맞섰다. “그렇당게로. 너는 싫으믄 말어. 나는 절 헐랑게. 나중에 수정 나오믄 너는 손도 대지 마라잉!”
소년은 재성이를 따라 서둘러 절을 올렸다. ‘하나님, 부처님, 조상님들, 부탁합니다. 이 어린 영혼의 소원을 들어주세요!’
3년 후엔 기고만장하던 상일이 코앞에 보란 듯이 예쁜 수정을 내보이리라. 음메 기 살아! 상일이의 난감해할 표정을 떠올리자 소년의 입가에서는 웃음이 실실 배어 나왔다. 아따, 생각만 혀도 꼬숩네잉.
십 년 전쯤, 방송 프로그램 촬영 때문에 고향 마을에 들를 일이 있었다. 그날 잠깐의 휴식 시간이 주어지자 나는 내 유년의 골목을 홀리듯 걸어 들어갔더랬다. 그 옛날 철부지였던 내가 그림 그린다고 못으로 긁어대어 생채기를 낸 녹색대문이 그대로 남아있었다. 그 시절보다 더 낡고 더 녹슨 녹색대문. 중학교 졸업 후 들어가 본 적 없는 그 문 너머로 내 유년의 풍경은 여전할까. 문은 굳게 닫혀있었고, 시간의 무게가 내 가슴을 세게 짓눌러왔다.
그러다가 불현듯 아홉 살 때 묻어두었던 차돌이 떠올랐다. 맞다! 나는 왜 그 차돌멩이를 잊고 살았을까. 열두 살의 나는 왜 마당을 파헤치지 않았을까.
녹색대문 앞을 한참 서성이다가, 나는 허허롭게 발길을 돌려야 했다. 그 후로 아주 오랜 시간 내 머릿속에서는 물음 하나가 잔상처럼 계속 떠돌아다녔다. ‘그 차돌은 정말 수정이 되었을까?’
두 달 후면 내 나이 오십이다. 평생 청춘일 줄 알았는데, 이젠 에누리 없이 중년의 문턱을 넘어서게 되었다. 어디 마음뿐인가? 몸 여기저기서 신호가 온다. 관절에 힘이 들어가면 나도 모르게 “에구구”라는 말이 절로 튀어나온다. 흘러가는 세월에는 출구가 없다. 그저 시간의 불가역성 앞에 겸허히 무릎 꿇는 수밖에.
그래도 무언가 억울하다. 돌아보니 다시 얻을 수 없는 청춘의 시간이었는데 무언가 손해 보면서 산 느낌이다. 리셋하고 그 시절로 돌아갈 수는 없을까? 오늘도 중년의 나는 시간 되돌리는 것뿐만 아니라 몸까지 젊어지는 타임머신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한다. 열두 살 시절로 돌아가 마당을 마구 파헤치고 싶다. “오메! 재성아 수정이다잉!!” 나는 반짝반짝 빛나는 수정을 앞에 모셔두고 넙죽 진심 어린 큰절을 올릴 터인데……, 아나 꿀떡!
헛된 바람을 뒤로하고 책을 펼친다. 배운 게 도둑질이라고, 내 우울을 달래주는 것 중 으뜸은 역시 독서다. 이번에 집어든 건 에세이집이다. 10년 전쯤 중고서점에서 눈에 띄어 구입한 책이었는데 읽는 재미가 제법 쏠쏠했었다. 그걸 다시 펴들었다. 유명 고전 아니고서는 웬만해서 다시 읽기를 하지 않는 나지만 이번에는 예외였다. 아마도 이 책을 재독하게 된 데에는 ‘내 나이 오십’이라는 실존적 자각이 큰 몫을 했지 싶다. 그러면서 또 탄식한다. 아! 예전에 이 책을 읽었을 때는 내 나이 아직 마흔도 안 되었었는데….
여성학자 박혜란은 가수 이적의 엄마로 유명하다. 이적이 데뷔하기 전부터 제법 이름난 여성학자였지만, 이적이 유명세를 탄 후로는 ‘가수 이적의 엄마인 유명한 여성학자’가 되었다. 그는 원래 신문기자 출신으로 글발이 좋아 책도 여러 권 냈다. 그중 가장 유명한 것은 아마 <믿는 만큼 자라는 아이들>일 것이다. 아들 셋을 몽땅 서울대로 보낸 엄마의 에세이라니 세간의 관심이 제법 컸나 보다. 하지만 내 자식 서울대 보내는 비법은 도대체 어디 숨었나 꼭꼭 숨어라 숨바꼭질하던 독자들의 기대를 아주 보기 좋게 배반한 책이기도 했다. 엄마의 치맛바람이 아니라 여성주의를 녹여낸 관점에서 자녀 교육의 여러 이야기를 풀어낸 건데 그럴 수밖에(굳이 ‘서울대 삼형제의 엄마’로 프레임을 짜서 들이댄 건 혹시 출판사의 농간?).
여하튼 여성학자 박혜란이 나이 오십이 넘어 <여성신문>에 글을 연재했는데, 그걸 한 권의 책으로 묶어 출간했다. 제목은 심플하다. <나이듦에 대하여>.
하지만 내용은 버라이어티하다. 한 사람의 엄마로서, 아내로서, 딸로서, 그리고 무엇보다 한 명의 여성이자 인격체로서 나이 오십을 몸과 마음으로 버티어내는 어느 실존인의 다양한 일상 무늬들이 빼곡하게 채워져 있다. 박혜란이라는 한 사람의 이야기지만 모든 이들의 에피소드로 공명한다. 평이한 문장에 공감되는 내용들. 무엇보다도 글의 톤이 서글프지 않아서 좋다. 웃음의 타율이 매우 높다. 이 책이 가진 미덕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웃음 뒤에는 진한 페이소스가 있다. 뜨거운 청춘의 한낮을 지나 깊어가는 가을의 한복판에 선 이들의 서늘한 외로움이 자리하고 있다. 제아무리 부정하려 해도, 나이 들어간다는 건 무서운 일이다. 하루하루 죽음의 벼랑이, 그 아래 알 수 없는 까마득한 심연이 점점 가까워진다는 건 그리고 그걸 온몸으로 체감하며 산다는 건 두려운 일이다.
천하의 여장부 박혜란이라고 별수 있나? 그 또한 무섭고 두려웠을 것이다. 그래도 웃는다. 웃으면서 싸운다. 오로지 청춘만 대접받고 나이듦이 괄시받는 이 시대에 “나 아직 죽지 않았어!”라는 생존 선언을 감행한다. 그 용기가 나이든 독자들의 마음을 다독여준다. 당신만 외로운 게 아니라고, 당신만 두려운 게 아니라고. 당신은 아직 삶을 존중받을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다고.
인생이라는 흙밭을 굴러온 시간들이지만, 나이가 들었다는 건 그 희로애락이라는 일직선 코스를 차돌멩이처럼 단단하게 버텨왔다는 증거가 아닐까? 그리고 혹시 모르지. 어쩌면 그 부박한 세월을 통해 각자의 마음속에 은은한 빛을 뿜어내는 수정 한 조각 돋아났을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