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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12 | 연재 [윤지용의 튀르키예 기행 2]
이스탄불의 두 제국, 비잔틴과 오스만
윤지용 편집위원(2022-12-13 13:33:33)


윤지용의 튀르키예 기행 2

이스탄불의 두 제국, 비잔틴과 오스만


글·사진 윤지용 편집위원







이스탄불(옛 이름 콘스탄티노플)은 두 제국의 수도였다. 마르마라해가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형제처럼 나란히 서 있는 아야소피아와 블루 모스크, 이 역사적인 건축물들은 이스탄불이 풍미했던 두 시대를 상징한다. 아야소피아는 비잔틴제국의 전성기에 지어졌고, 블루 모스크(술탄아흐메트 모스크)는 오스만제국의 전성기에 지어졌다. 도시 곳곳에는 두 제국의 1500년 세월이 깃들어 있다. 역사학자 아놀드 토인비는 이스탄불을 일컬어 “인류문명의 거대한 옥외박물관”이라고 했다.


비잔틴제국과 오스만제국의 유산들



   ▲ 술탄아흐메트광장의 오벨리스크


서기 395년 테오도시우스 황제 사후에 로마제국이 동서로 분할되었고, 서로마제국은 476년에 멸망했다. 홀로 남은 동쪽의 로마는 더 이상 ‘동로마’로 불리지 않게 됐다. 동로마와 구분할 서로마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수도 콘스탄티노플의 옛 이름 비잔티움을 따서 ‘비잔틴제국’으로 불리웠다. 비잔틴제국은 1453년 오스만튀르크에 의해 수도 콘스탄티노플이 함락될 때까지 로마제국의 계승자로 남아 있었다. 인류의 역사에서 천년 넘게 존속했던 유일한 제국이었다.


이스탄불에는 남아 있는 비잔틴제국 시절의 역사유적은 아야소피아뿐만이 아니다. 아야소피아 앞의 길쭉한 광장은 ‘히포드롬’이었다. 고대 그리스어 히포스(말)와 드로모스(경주)의 합성어이니, 영화 <벤허>에 나왔던 것과 같은 전차경기장이다. 이 히포드롬이 있던 자리가 오늘날 술탄아흐메트 광장이 되었다. 광장 한복판에 서 있는 거대한 사각기둥 첨탑은 오벨리스크다. 기원전 15세기 이집트의 룩소르 신전에 세워졌던 오벨리스크를 4세기에 로마 황제 테오도시우스가 이곳으로 옮겨왔다. 어쩌면 인류 최초의 ‘약탈 문화재’였을지도 모른다. 무려 3,500년 전에 이토록 거대하고 정교한 석탑을 만들었다는 것 자체도 경이롭지만, 1600년 전에 지중해를 건너 그것을 옮겨왔다는 사실도 놀랍다.


로마제국의 도시들은 상하수도 시설을 갖추고 있었다. 아치 모양의 수도교를 이용해 도시 외곽의 수원지에서 물을 끌어와 시내 곳곳의 공중목욕탕과 분수에 물을 공급했다. 콘스탄티노플의 수도교는 4세기 후반 발렌스 황제 시절에 지어졌다. 수도교를 통해 도시로 가져온 물은 가뭄에 대비해 저장하기도 했다. 튀르키예어로 ‘사라이’는 궁전이라는 뜻이지만, 아야소피아 맞은편에 있는 예레바탄 사라이는 궁전이 아닌 지하 저수조다. 336개의 기둥으로 지탱되는 지하 저수조의 모습이 웅장하고 아름다워서 궁전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이 돌기둥들을 트라키아(발칸반도 동부지역) 곳곳의 그리스 신전에서 가져온 것들이라서, 기둥의 모양이나 새겨진 조각들이 제각각이다. 이 중 괴물 메두사의 머리가 새겨진 기둥이 가장 유명하다. 예레바탄 사라이는 톰 행크스가 주연한 영화 <인페르노>에 등장하기도 했다.


이스탄불에 있는 두 개의 궁전은 모두 오스만제국 시절에 지어진 것이다. 톱카프 궁전(Topkapı Sarayı)과 돌마바흐체 궁전(Dolmabahçe Sarayı)이다. 마르마라해가 내려다보이는 구시가지 언덕 위의 톱카프 궁전은 오스만제국이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한 직후인 15세기 후반에 지어져서 19세기 중반까지 4백여 년 동안 술탄의 거처이자 집무실이었다. 나는 3년 전에 이미 구경했던 곳이라서 이번에는 들어가지 않고 일행들이 관람하는 동안 궁전 앞 카페에 앉아 있었다.


톱카프 궁전에는 넓은 정원과 여러 채의 건물이 있는데, 건물들의 장식은 대제국의 지배자가 거주했던 궁전치고는 의외로 소박하게 느껴진다. 그 대신 내부에 전시되어 있는 화려한 보석들과 중국, 일본에서 수입해왔다는 수많은 도자기들이 제국의 위세를 과시한다. 궁전 안 전시관 중 한 곳에는 ‘모세의 지팡이’가 전시되어 있다. 나는 수천 년 전 출애굽 시절의 나무 막대기가 지금까지 썩지 않았다는 것도 그것이 모세가 쓰던 지팡이였다는 것도 믿지 않는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그 지팡이를 보기 위해 길게 줄을 서고 촬영이 금지돼 있는데도 몰래 휴대전화로 사진을 찍다가 혼찌검을 당하기도 한다.


보스포러스해협 건너편 위스퀴다르



   ▲ 탁심광장의 독립영웅들, 가운데 인물이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


보스포러스해협 바닷가에서 아시아지구를 마주보고 있는 돌마바흐체 궁전은 1850년대에 지어져 오스만제국 후기 술탄들의 황궁으로 쓰였던 곳이다. 튀르키예 공화국의 초대 대통령이 되었던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도 사망할 때까지 이곳에 머물렀다. 프랑스의 베르사이유 궁전을 본떠서 만들었다는 화려한 석조건물이다. 내부의 천장과 벽면을 장식하기 위해 쓰였던 황금이 14톤이라고 한다. 3년 전에는 겉모습만 보고 지나쳤던 곳이라서 이번에는 들어가서 관람하려고 찾아갔는데, 가는 날이 장날이었다. 하필 월요일이었다. 전세계 대부분의 박물관과 미술관들이 월요일에 휴관한다. 그날이 이스탄불에서 머무는 마지막 날이라서 다음날을 기약할 수도 없었다. 역시 화려한 궁전은 나와 인연이 없는 모양이다. 1938년 11월 10일 오전 9시 5분에 이곳에서 사망한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를 기리기 위해 그의 주거공간과 집무공간의 모든 시곗바늘이 9시 5분에 맞춰져 있다는데, 직접 보지 못해서 아쉬웠다.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 내가 어렸을 때 위인전에는 ‘케말 파샤’로 나왔던 인물이다. 본명은 무스타파 케말이고, 파샤는 오스만제국의 재상이나 장군을 일컫는 존칭이었다. 무스타파 케말이 오스만제국의 고위 장교 출신이라서 예전에는 케말 파샤로 불렸다. ‘아타’는 튀르키예어로 ‘아버지’라고 한다. 그러니 아타튀르크는 ‘튀르크의 아버지’라는 뜻, 말 그대로 ‘국부(國父)’다. 제1차 세계대전의 패배로 오스만제국이 몰락하고 제국의 영토가 서구 열강들에게 분할된 후 국토회복 전쟁과 튀르키예공화국 수립을 주도한 무스타파 케말에게 튀르키예 국민의회가 공식적으로 부여한 칭호가 아타튀르크다. 아닌 게 아니라 튀르키예 국민 대다수가 그를 진심으로 존경하는 것 같다. 이스탄불 신시가지의 중심인 탁심광장을 비롯해서 가는 곳마다 그의 동상이나 초상화가 있다. 공공장소뿐만 아니라 민간인이 운영하는 가게나 식당에도 아타튀르크의 초상화가 걸려 있는 곳이 많다. 온 국민이 함께 존경할 만한 ‘건국의 아버지’가 있다는 사실이 몹시 부럽다.


돌마바흐체 궁전 입구에서 허탕을 치고 근처 카바타쉬 선착장에서 페리(여객선)를 타고 보스포러스해협을 건넜다. 보스포러스 해협을 사이에 두고 유럽과 아시아로 나뉘어 있는 이스탄불에서는 해협을 건너다니는 페리가 버스나 지하철, 트램처럼 대중교통이다. 요금이 7리라이니 우리돈 600원이 채 안 된다. 심지어 환승할인까지 된다. 페리를 타고 아시아지구에 있는 위스퀴다르(Üsküdar)로 건너갔다. 아시아대륙의 서쪽 끝에 있는 항구다. 그 옛날 동방에서 대륙을 가로질러 온 실크로드 상인들이 이곳에서 배를 타고 해협을 건너 실크로드의 종착점인 콘스탄티노플로 들어갔다.


예전에 개사곡(노가바)으로 부르던 노래가 생각났다. “위스키 달라, 맥주 달라~ 소주도 괜찮다~” 이런 노래였다. 사실 이 노래는 ‘Üsküdar gider iken(위스퀴다르 가는 길에)’이라는 제목의 튀르키예 민요인데, 위스퀴다르 지역을 배경으로 젊은 남녀의 사랑을 노래한 것이다. 6.25 전쟁에 참전했던 튀르키예군 병사들이 고향을 그리워하면 불렀던 노래가 우리나라에 남아 느닷없이 ‘술타령’이 된 것이다. 귤이 회수를 건너면 탱자가 된다.



   ▲ 이스탄불 신시가지의 번화가 이스티크랄 거리


흑해 북안(北岸)에 있는 우크라이나에서 전쟁이 한창인데도 여전히 해협은 붐볐다. 흑해에서 출발해 보스포러스 해협을 지나는 대형 화물선들이 줄을 잇고 있었다. 보스포러스해협은 흑해에서 마르마라해를 지나 지중해로 나가는 유일한 뱃길이다. 그래서 보스포러스 해협을 영해로 갖고 있는 튀르키예를 강대국들도 함부로 대하지 못한다. 몇 년 전에 시리아 반군을 공습하기 위해 출격했던 러시아 전투기가 실수로 튀르키예 영공을 침범했는데, 튀르키예가 불문곡직 대공미사일로 격추해버렸다. 그렇지만 러시아는 튀르키예에게 해코지하지 못하고 오히려 영공침범에 대해 사과했다. 미국도 마찬가지다. 나토의 창설 멤버인 튀르키예가 러시아와 가깝게 지내는데도 제지하지 못한다. 튀르키예가 가진 지정학적 힘이다.


이스탄불에 대해 아직 이야깃거리가 많이 남았지만, 연재가 한없이 늘어질 것 같아서 다음 호부터는 아나톨리아반도의 도시들로 넘어가야 할 것 같다. 공교롭게도 이 글을 쓰고 있는 동안 이스탄불 시내에서 폭탄 테러로 많은 사람이 희생되었다. 이스탄불 신시가지의 가장 번화가인 이스티클랄거리였다. 슬픈 일이다. 쿠르드 분리독립을 요구하는 세력이 저지른 일이라고 한다. 테러는 용납할 수 없는 일이지만, 쿠르드 민족의 사정도 딱하다. 자신들의 나라를 갖고 싶어하는 그들은 오랫동안 탄압받고 여러 차례 배신당했다. 비운의 쿠르드 민족에 대해 다음 호에서 잠깐 다뤄보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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