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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12 | 연재 [임안자의 꿈꾸는 인생]
스위스에서 50년, 스위스에서 산다는 것 (36)
전주국제영화제, 중앙아시아 특별전과 그 이후
임안자 영화평론가(2022-12-13 13:51:48)


임안자의 꿈꾸는 인생

스위스에서 50년, 스위스에서 산다는 것 36


전주국제영화제, 

중앙아시아 특별전과 그 이후




2007년의 전주영화제 특별전을 체코 영화로 선택한 뒤에 나는 체코의 영화아카이브와 카를로비 바리의 자올라로바 집행위원장의 협조를 받으며 소비에트가 끝난 전후로 주요 감독들이 만든 8개 작품을 일년 전부터 준비했다. 그런데 전주영화제가 열리기 몇 주 전에 서울의 아트시네마에서 “체코 뉴웨이브” 프로그램을 언론에 발표했다. 한국의 체코 대사관 문화부장이 추진했는데 내가 볼 때 제목에 어울리지 않는 영화가 더 많았다. 문화부장에게 문제점을 말하자 그는 “사실 영화를 잘 모르면서 일을 벌여 미안하다”며 원하면 취소하겠다고 했다. 체코의 영화아카이브에서도 내 프로그램이 훨씬 낫다며 그냥 실행하라고 했지만 나는 도저히 그럴 수가 없어 결국 체코 영화를 포기했다. 


이후 급하게 새로운 곳을 찾다가 2002년에 칼로비 바리 영화제서 성공한 <터키의 최우수 영화 10편 특별전>이 떠올랐다. 앙카라의 영화협회 사무실에 전화를 했는데 다행히 카를로비 바리에서 사귄 50대의 보이시오글로 회장이 전화를 받았다. 그는 내 말을 듣더니 두말할 것 없이 10편을 다 쓰라고 했다. 그중에 두 편은 문제가 있어 8편만 사용했는데 60년대 중반에서 90년대 말까지의 여덟편 작품들은 카를로비 바리에서 인기가 대단했던 영화였다. 물론 전주영화제서도 대환영이었다. 이 프로그램을 위해 터키영화의 작가이자 제작자인 제카 데미르쿠부즈 감독이 전주영화제에 오려고 했으나 부인이 애를 출산하는 바람에 이스탄불의 젊은 기자 피라드 유셀이 그를 대신하여 참석하고 터키 영화 프로그램에 대한 글을 썼다. 그런데다 2007년은 때마침 한국과 터키의 수교 50주년이어서 시기적으로도 아주 잘 맞았다. 보이시오글로 회장은 반년 후에 ‘터키 영화 회고전에 감사하다’며 우리 부부를 카스에서 열리는 <쉬레바퀴 영화제>에 초대했다. <카스>는 터키의 대가 오르한 파묵의 소설 제목이기도 한데 소설의 오스만 시절과는 다르게 대부분 크드족이 사는 가난한 농촌이었다. 그는 영화를 보기 힘든 장소를 골라 해마다 장소를 바꿔가며 영화제를 조직하고 있었다. 


2008년의 전주영화제 특별전은 중앙아시아 다섯 나라의 12편 영화로 이뤄졌다. 카자흐스탄(중편4), 키르기스스탄(단편2), 타지키스탄(장편2,단편1), 투르크메니스탄(장편1), 우즈베키스탄(중편2)의 프로그램은 1989에서 2004년 사이에 만들어졌는데 경제 사정으로 중편과 단편 영화가 많았다. 이 작품들의 공통점은 1991년에 소비에트가 없어지면서 중앙아시아 감독들이 각자 새로운 국가적 가치와 독립국가로서의 특성을 영상으로 나타내 보였던 점이었다. 90년대에 나는 프리부룩과 로카르노에서 소비에트 시절의 중앙아시아 작품들을 몇 편 보았는데 2006년에 소비에트 시절에 금지됐던 영화들을 프로그램으로 준비하면서 언뜻 중앙아시아 영화들이 독립 이후 어떻게 변했는지를 알고 싶었다. 그러다 2006년 7월에 칼로비 바리 영화제서 카자흐스탄의 영화평론가이자 알마티에서 열리는 <유라시아 영화제>의 아트 디렉터인 굴나라 아비케에바를 알게됐다. 40대의 다정스러운 그녀와 이야기를 하면서 내가 두 달 전에 전주영화제서 소비에트 시절에 금지됐던 영화들에 대한 이야기를 했더니 그녀는 ‘그럼 중앙아시아 영화 프로그램도 만들라’며 11월에 유라시아 국제영화제에 꼭 오라고 했다. 그리고는 자신이 쓴 책을 주면서 중앙아시아 영화에 대한 의문이나 문제가 있으면 언제든지 알리라고 했는데 실제로 2008년의 전주영화제 프로그램을 만드는데 그녀의 협조는 절대적이었다. 그리하여 나는 2006년에 유라시아 영화제에 초청됐는데 일부 영화들이 자막 없이 상영되고 대부분이 러시아어를 쓰는 등 소통 문제로 몹시 힘들었다. 그럼에도 독립된 중앙아시아의 초기 영화들을 전주영화제에 초대하고 싶어 유운성 프로그래머와 함께 2007년에 다시 갔다. 그리고 아비케예바가 소개하는 감독들을 만나고 추천하는 영화들을 보면서 우리가 쓸 수 있는 작품을 찾았다. 하지만 다섯 나라의 영화들을 한 묶음으로 하려다 보니 일이 쉽지 않았다. 그중에서도 독재정치국인 투르그메니스탄이 가장 어려웠다. 내가 원하는 영화감독이 러시아로 이주하여 친구 나움 클레만이 모스코바에서 나를 감독과 만나게 해줘서 그의 영화를 얻게 됐다. 


2007년 8월에 나는 아마티 영화제서 알게 된 키르기스스탄의 영화평론가이며 <10인 풀러스영화제> 책임자인 굴바라 톨로무쇼바의 초청을 받았다. 내가 아주 좋아하는 작가 징기스 아이트마토프의 책을 가방에 넣고 키르기스스탄의 수도 비쉬캑으로 떠났다. 아마티에서 소개받은 중앙아시아 감독들과 유럽에서 초대된 영화제 전문인 대여섯 명과 함께 7일간 모임을 가졌는데 날씨가 40도나 되어 수도에서 4시간쯤 떨어져 있는 이식쿨 호수로 자리를 옮기고 예쁜 호수가의 호텔에서 토론을 계속했다. 나는 그 기회에 독립후 키르기스스탄의 대표 감독 압탄 칼리코프로부터 그의 단편영화와 다른 감독의 단편의 사용을 직접 허락 받아 여행이 헛되지 않았다. 그러나 우즈베키스탄의 감독들을 찾는 나에게 톨로무쇼바는 ‘두 나라 사이에 문제가 생겨 아무도 오지 못했다’며 자기가 도와주겠다고 하여 안심했다. 아무튼 첫 번의 국제적인 모임은 전국에서 온 50여 명의 젊은이들로 힘 났으나 출발점에 선 <10인 풀러스>에 정부의 반대가 있어서 좀 걱정스러웠다. 아주 어렵게 만들어진 중앙아시아의 프로그램은 내가 보기에 나름 신선했다. 하지만 갑자기 나는 건강 문제에 부딪혀 전주영화제에 가지 못하게 됐다. 



갑자기 끝이 난 영화 작업

2008년 3월말 아침이었다. 10시쯤 딸이 전화로 뭔가를 급하게 물었는데 내가 대답을 못하고 머뭇거리니 나중에 다시 연락하겠다며 전화를 끊었다. 말할 때 목이 좀 이상하다고 느꼈지만 별로 신경 쓰지 않았는데 두어 시간이 지나서 남편이 갑자기 일이 생겨 점심에 집에 올 수 없다고 전화를 하다 내 목소리가 평소와 다르다고 했다. 우리는 그날 저녁에 남편 친구 집에 초청받았는데 아침과 크게 다르지 않아 그런대로 저녁을 즐길 만했다. 남편이 다음 날 아침 일찍 방사선 전문의사에게 나를 데리고 갔는데 전날 보다 목의 안쪽이 훨씬 더 아프고 오른손 네다섯째 손가락들의 감각이 둔했다. 방사선 의사는 심한 과로로 생긴 뇌졸증이라며 다행히 큰 혈관이 아니어서 그 정도로 그쳤는데 지금부터 절대 안정이 필요하다고 했다. 3주 후에 전주영화제에서 2년 가까이 준비한 <포스트 소비에트 중앙아시아 특별전>을 보여줄 예정이었는데 일을 그만두라니 기가 막혔다. 남편은 바로 나 대신에 전주영화제와 중앙아시아의 주요인들에게 내 건강 상태와 프로그램의 안건을 알렸다. 


그 무렵에 나는 중앙아시아 영화 프로그램을 만들면서 모스코바 정부의 영화부가 그해 가을에 열려는 임권택 감독의 영화 프로그램을 도와주고 있었다. 그런데 3월 말경에 갑자기 모스코바 쪽에서 ‘임권택 감독님 부부를 위한 정부의 대접 문제는 실행하기가 어렵겠다’고 말하고는 소식을 끊어버렸다. 나는 임 감독님에게 그 소식을 전해줘야 할 입장이어서 그 때문에 닷새 동안 잠을 못 잤는데 그게 내 병의 원인이 된 듯 하다. 내가 모스코바 영화부를 도와준 건 2006년 전주영화제의 <소비에트 연방의 금지된 위대한 영화들 특별전>을 위해 나를 많이 도와준 나움 클레만의 부탁 때문이었다. 나는 바로 영화 작업에 관련된 모든 일을 그만뒀다. 다행히 병은 4개월 후에 회복됐다. 


2009년에 전주영화제서 우리 부부를 한옥마을의 공간 봄에서 송별식과 함께 나에게 공로상을 주었다. 나와 같이 일했던 감독님들과 영화인들이 그 자리에 거의 다 참석하셔서 감격스러웠다. 그 뒤로도 심심치 않게 나를 부르는 영화 행사가 서너 곳에서 있었다. 2013년에 한서 수교 30년을 기념하기 위해 스위스의 한국 대사관이 부탁하여 특별히 기획된 <작가 영화> 10편을 주요 도시의 다섯 개 비상업 영화관에서 두 달간 순회상영을 하여 매체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았다. 


전북일보 기자로 전주영화제에도 참여하고 있던 김은정 부장이 송별식 자리에서 “20여 년 동안 함께 해온 영화제의 시간들은 글로 써보시라”고 권했다. 도무지 써질 것 같지 않았으나 결국 나는 3년 반 동안 전북의 월간 문화잡지인 <문화저널>에 글을 썼다. 그리고 내 글을 읽은 부산영화제의 김지석 선생님이 서울의 부온북스 출판사 책임자 정란기 선생님과 연결시켜 2014년 <내가 만난 한국영화>라는 책이 나올 수 있게 됐다. 2015년에 부산영화제는 이 책의 출판을 기념하기 위해 나와 남편을 초청하고 문웅 프로그래머는 내가 영화 작업을 하던 시절의 사진들을 정리해 한달 동안 전시했는데 남편과 딸 그리고 한국의 가족들이 부산까지 찾아와 축하해주었다. 


지난 3년 동안 코로나 질병 때문에 한국에 가지 못했으나 올 6월에 우리는 아이들과 한국에 갔다. 딸과 아들의 가족은 휴가기간이 달라서 다 함께하지는 못했으나 우리 부부는 서울과 전주 주변을 두 번 여행하면서 오랜만에 애들과 좋은 시간을 가졌다. 딸의 가족과 전주에 있던 어느 날 막내 조카 부부가 우리를 집으로 초청했다. 처음 가본 조카의 새집은 전주시를 벗어나 산속에 홀로 서 있었는데 넓은 잔디밭과 그 옆의 골짜기 물이 흐르고 있어 신선하고 아름다웠다. 그 자리에서 나는 생각지도 못한 환대를 받았다. 여든 번째 생일이 아직 3개월이 남았었지만 조카 가족은 잔디밭 한쪽에 내 사진과 함께 ‘고모님 80년 생신을 축하합니다’라고 써있는 광목천을 걸어 놓고 있었다. 우리는 조카 가족이 정성껏 준비한 음식으로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이 자리에서 나는 스위스 가족과 조카들의 애정 넘치는 축하를 받으며 행복스럽게 여든 살이 되었다. 실로 가슴 벅찼다.  


올 10월 말경에 우리는 파리에서 열리는 한국영화제에 갔다. 올해에 17회를 맞는 영화제 방문은 남편의 내 생일 선물이었다. 2년 전 나에게 마스터 클래스를 부탁했던 한세정씨는 박사논문을 쓰면서 올해 영화제의 책임자로 선정되어 프랑스의 협조자 두 명과 함께 프로그램을 만들었다. 그녀의 안내로 우리는 5일 동안 10편 영화를 열심히 보았고 임상수, 김은정 감독의 관객과의 대화도 들었다. 특히 젊은 여성 감독들의 다양하고 뛰어난 열 편 영화를 아주 인상 깊게 봤다. 한국영화제는 샹젤리제 거리의 개선문과 디오 상점 사이에 있는 퍼블릭시네마의 지하실 극장에서 장단편 68편 영화를 일주일간 보여줬는데 4백 석의 극장과 2백 석의 작은 극장에서 영화에 따라 상영관의 자리는 거의 채워지거나 빈자리가 없을 만큼 인기를 끌고 있었다. 영화제는 한국의 프랑스 대사관과 한국 문화원, 한국영화진흥공사, 기아 가동차 회사와  아시아나 비행기 그리고 프랑스의 민간단체 협회주관(1886)에서 도와주고 있다. 우리는 중단편영화 감독이며 잡지기고가인 친구 한경미가 진행하는 씨네 클럽의 영화 <집으로>(2002, 이정향 감독)를 한국 문화원에서 봤는데 그곳에서도 백 여명의 좌석이 찰 정도로 관객이 많았다. 


돌아보니 2020년 1월부터 쓰기 시작한 이 글이 어느새 3년이란 시간을 채웠다. 문화저널 식구들과 매달 내 원고를 읽어준 친구 한경미, 그리고 독자님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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