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안옹기의 오늘을 만드는 사람들
배움을 놓지 않다
<손내사람 손내옹기전(1995, 우진문화공간)>으로 문화저널을 통해 지역사회에 첫인사를 했던 이현배 옹기장. 삼십 년 전, 전통 옹기의 원형을 보존하기 위해 지나는 길이었던 솥내마을에서 꺼져가는 옹기가마 불을 다시 피워낸 그는 이제 진안에 남은 유일한 옹기장이다. 옹기 일을 통해 스스로 “갇힌 게 아니라 담긴 것임”을 알았다는 그가 진안고원에 담겨있던 서른 해 동안 옹기에 담아온 지역적 삶의 가치, 옹기문화의 힘은 무엇일까.
독 짓는 젊은이에서 늙은이로
이현배 옹기장이 진안에 자리를 잡고 해온 작업은 단순히 물레간에서 옹기를 만드는 일에만 초점이 맞춰져 있지 않았다. 손내옹기점에서 일했던 걸출한 옹기장들을 차례로 모셔와 그들의 일하는 습성, 기술들을 배우며 협업한 것. 여러 옹기점 문화가 섞여 복합적인 성격을 가진 정송옹기점의 면면이 남은 것은 이현배 씨가 손내에 자리 잡은 뒤 공부하고 탐문해 얻은 결과다. 함께 일한 옹기장들과 마을 어른들에게 물어가며 옹기점 역사를 되살리고 옹기에 관한 지식을 보존하는 작업은 옛 방식과 기술대로 만드는 일만큼이나 지역의 옹기문화를 전승하는 데 유의미하다.
옹기를 만드는 기술보다 옹기의 본질을 먼저 알아야 한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다. 1991년, 서울의 호텔에서 초콜릿을 만들다가 옹기 일을 해보겠다고 처음 징광으로 내려갔을 당시 운영이 어려웠던 옹기점에는 기술공들이 남아있지 않았다. 답답한 마음에 먼저 일을 배우던 선배나 옹기점 살림을 도와주셨던 아주머니에게 이것저것 묻기도 했다. 옹기점의 한상훈 사장과 뿌리깊은 나무 한창기 선생이 가끔씩 방문하면 그들의 말을 받아적고, 필사한 자료를 보며 나름대로 연구했다. 환경의 미흡함 때문에 벌어진 상황이지만 말과 글로 공부하는 습관이 현재까지 이어져온 것이다.
“기술적으로 한 분야만 습득이 돼버리면 다른 일을 맡기가 힘들어요. 더군다나 오늘날은 옹기점 일을 분업적으로 할 수 없는 구조예요. 모든 것을 알고 스스로 꾸려가야 해요. 예를 들어 호텔에도 제과부에는 아주 다양한 일이 있어요. 빵을 만드는 일이 있고, 디저트를 만드는 일이 있고, 초콜릿이나 과일을 다루는 일이 있고... 경영자들 입장에서는 빨리 잘할 수 있는 파트만 시키기에 다른 일들은 잘 모르게 돼요. 오히려 동네 제과점에서 일을 배우면 전부 다 할줄 알게 되거든요.”
특히 ‘대형옹관제작 고대기술 복원 프로젝트’에서 그의 지론은 빛을 발했다. 2008년 국립나주문화재연구소에서 10년간 진행한 장기사업이었다. 사업 초기, 연구소 측에서는 복원작업을 함께할 옹기장을 찾지 못해 난항을 겪었다. 옹기장들이 모두 대형옹관 제작이 힘들다고 선언했기 때문. 그러나 이현배 씨는 홀로 Yes를 외쳤다. 그는 옹관을 만드는 것이 독을 짓는 것만큼 쉽다고 말한다.
“옹기는 아주 오래된 물건이에요. 선사시대 사람들도 만들 수 있었던 것을 지금이라고 못 만들겠어요. 옹기를 만들 줄 알면 당연히 옹관도 만들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메주 한 말에 장을 담을 수 있는 크기가 독인데, 내용물을 담으면 옮길 수 없는 크기예요. 건축처럼 처음부터 계획해서 설계를 하는 과정이 필요한 거죠.”
2016년 서울시립 남서울생활미술관 기획전에서 그가 복원한 대형옹관을 전시했고, 1995년 전주에서 연 첫 개인전에서 옹기에 관해 쓴 문장을 함께 적었다. “옹기는 세상에 태어날 때 태항아리, 밥을 담는 오모가리, 똥을 담는 합수독아지, 죽어서는 옹관까지 한반도 사람들이 나고 죽은 그야말로 처음과 마지막을 담는 모든 것이다.” 말과 글로 옹기를 익힌 그가 작업을 통해 배움의 결실을 확인한 셈이다. 독 짓는 젊은이라 불리던 그가 늙은이가 되었고 이제 다시 젊은이인 다음 세대에게 그 배움이 이어지고 있다.
마을일에서 가족일로, 마을에 남은 손내사람들
많은 노동력을 필요로 하는 전통 옹기점은 주로 마을단위로 모여 함께 일하며 먹고 사는 형태였다. 혼자 할 수 있는 일이 아닌 만큼 공동체의 협업이 큰 부분을 차지한다. 온 마을사람들이 붙들어도 쉽지 않은 옹기 일을 가족일로 꾸려가게 된 배경엔 옹기문화의 쇠락이 있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마을과 공동체에 관심이 많은 이현배 씨는 옹기점 안에서도 자체적인 생활공동체 프로젝트를 시도해왔다. 2010년 대안학교 졸업생 셋, 홈스쿨링하며 농촌살이하는 형제 둘과 함께 ‘옹기종기 학습모임’을 꾸려본 것이 그 중 하나이고, 2014년부터 2015년까지 진행한 ‘패밀리 비즈니스’도 그 중 하나다.
패밀리 비즈니스는 그의 아내 최은정 씨와 자녀 이물, 이솔, 이바우와 함께 ‘세대 간 동업’을 목적으로 한 협업팀이자 전승공동체였다. 성인이 된 자녀들의 농촌생활과 진로탐색뿐 아니라 ‘가르치고 배우며 서로 성장한다’는 것을 목표로 했다. 그는 “이번이 마지막 기회”라며 자녀들에게 옹기를 제대로 학습해볼 수 있는 조건을 만들어주고 이후 선택은 각자의 몫으로 돌렸다. 학습자였던 자녀들이 7년이 지난 지금까지 손내마을에 남아 옹기 일을 업으로 삼은 것을 보면 성공한(?) 프로젝트였던 걸까.
“단순한 협업보다는 독립된 경제체제를 가지면서 연합하는 형태를 원했어요. 패밀리 비즈니스가 끝나고 가능성이 조금 보이겠다 싶을 때 옹기점에 큰 불이 나서 안타깝게 됐죠. 평행이론 같습니다. 제가 처음 옹기일을 익힐 때 옹기점 운영이 가장 어려울 때였듯이, 프로그램 참가자들께 무엇보다 미안하죠. 그 과정이 전부가 아닌데 그 경험만으로 이 일을 판단하지 않길 바랄 뿐입니다.”
진안고원형옹기로 되살아나다
2017년 ‘진안고원형옹기’가 전라북도무형문화재 제57호로 지정되었으며 손내옹기의 이현배 옹기장이 기능보유자로 선정됐다. 옹기장독이 기능을 잃어가던 시기에 중고명품 이름처럼 회자되던 ‘진안옹기’의 자취를 손내옹기점에 남은 옹기문화로 되살린 것이다. 이런 제도적 장치는 기능보유자 개인만이 아니라 지역에 주어지는 사회적 책임이 짝을 이루니 관의 적극적 역할이 필요한 것은 당연한 일. 손내옹기점에서도 2010년 화재 때 소실된 독막 자리에 진안군의 지원을 받아 2018년 새로운 작업장을 지었다. 2016년 화재로 소실된 독막 자리에도 공예디자인문화진흥원 작업환경개선사업을 시작으로 장기 계획을 세우고 있다.
기능보유자에게도 가볍지 않은 짐이 주어진다. 대물림만이 아닌 넓은 의미의 전승을 통해 사회적 역할을 해야 한다. 무형문화재 지정 이후 손내옹기점에는 체험학습형 교육 기회가 늘었다. 2021년 마령고등학교 학생들과 옹기 및 지역문화를 공유 학습하는 프로그램이나, 진안 월랑역사에서 주관한 생생문화재 프로그램처럼 지역주민을 대상으로 한 전승 활동이 더욱 활발해진 것. 이현배 옹기장은 ‘진안고원형옹기장’ 기능보유자를 신청하며 오래 전부터 꿈꿔온 옹기문화의 회복 방안을 전승 계획으로 내놓았지만 아직까지는 쉽지 않은 문제다.
“예전엔 가정단위로 식사가 이뤄지면서 옹기문화의 지속이 가능했지만 지금은 그게 안 됩니다. 이제는 옹기 전반을, 옹기문화적인 것까지 향유할 수 있는 옹기생활공동체, 옹기문화학교 같은 형태가 답일 것 같습니다. 본래의 옹기가 그랬던 것처럼 사람들이 모여 집합적으로 문화를 형성할 수 있는 구성체가 필요한 것이지요.”
급격히 소멸해가는 옹기문화의 현실을 놓고 보면 해야만 하며 서둘러야 하는 일이라는 이현배 옹기장. 그가 말하는 옹기문화공동체는 한편으로 이상적인 마을의 모습이기에 쉽지만은 않을 것. 과거 이뤄졌던 몇몇 생활공동체형 프로젝트가 같은 형태를 모델 삼고 가능성을 탐색해본 시도였다는 점을 고려하면 희망 없는 꿈만은 아니다.
최근 그는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와 난파선 출수 고려도기 복원 사업에 참여해 가족들과 함께 새로운 작업을 시작하게 됐다. 역사시대의 유물 복원인 만큼 이전과 또 다른 도전이 될 터. 공동체의 회복과 함께 지켜지는 유산이 아닌 이어가는 전통으로 진안옹기의 앞날을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