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 기고 | 고 이광웅 시인 30주기 추모식
참된 시인의 길을 걷다
글 문신 시인·편집위원
이 땅에서
참된 연애를 하려거든
목숨을 걸고 연애를 해야 한다.
-이광웅, 「목숨을 걸고」에서
‘참된 연애’의 시대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모였다. 대설주의보 속에 굵은 눈발이 빗금으로 정수리를 때려대는 날이었다. 먼저 내린 눈이 시간처럼 쌓여 발목까지 푹푹 빠지는 길이었다. 금강이 내륙의 굴곡을 견디고 오랜 여정의 고된 숨을 파, 하고 단숨에 토해내는 자리. 망망한 서해를 목전에 둔 자리에 세워진 고 이광웅 시인의 시비(詩碑)에는 시인의 필체 그대로 시인의 대표작 「목숨을 걸고」가 새겨져 있었다. 사람들은 겨울의 표정을 하고는 참된 연애의 시대처럼 시비를 향해 묵묵히 걸어갔다.
“광웅이 형 가시던 날에도 눈이 엄청나게 내렸었지.”
세밑을 앞두고 눈 내리는 일에 특별한 의미가 있을 리 없다는 걸 알면서도, 어쩐지 오늘 내리는 눈은 여느 날의 그것과 다르게 보인다. 삼십 년의 시차를 두고 쏟아지는 눈발은 쉬지 않고 자기 목숨을 내던지듯 단단하게 버티고 선 시비를 후려친다. 우리 시문학사에서 겨울의 눈보라는 흔히 혹독한 시련을 뜻한다고 했던가! 시련이야말로 참된 연애의 시대를 사무치게 하는 객관적 표상이었다.
전북작가회의(회장 김자연)에서 기획하고 준비한 추모식에는 멀고 가까운 곳에서 열아홉 명의 작가가 모였다. 아무래도 그들의 이름을 낱낱이 기록해두는 게 좋을 듯하다. 추모하는 일에 몸과 마음의 구별을 두고 싶지 않지만, 추모하는 자리에 자기 체온을 더하는 일의 수고로움을 모른 척하고 싶지 않다. 강형철 시인, 한상준 소설가, 김영춘 시인, 복효근 시인, 정철성 문학평론가, 신귀백 영화평론가, 이봉환 시인, 정도상 소설가, 김병용 소설가, 김자연 아동문학가, 정동철 시인, 박태건 시인, 진영심 시인, 김수예 시인, 최기우 극작가, 김근혜 아동문학가, 김성철 시인, 문신 시인 그리고 뒤늦게 합류한 장현우 시인. 이 중에서도 추모식을 기획하고, 멀고 가까운 곳에서 사람을 불러 모은 이는 박태건 시인이다. 그는 이틀 전에 이광웅 시인이 근무했던 군산제일고등학교 학생들에게 이광웅 시인의 삶과 문학에 관해 특강을 하기도 했다.
오전 11시.
이광웅 시인의 시비에 헌화하는 것으로 추모식을 시작했다. 술잔을 올리고 묵념을 하면서 우리는 각자의 방식으로 이광웅 시인과의 인연을 더듬어냈다. 강형철 시인, 신귀백 평론가, 정도상 소설가의 이야기가 나직나직 이어졌다. 이들의 이야기는 바람에 밀려 서해로 몰려가는 눈보라처럼 망망한 시간의 저편으로 불어갔다. 이광웅 시인의 시비가 그의 귓바퀴처럼 단단한 자세로 우리의 이야기를 골똘하게 들었다. 눈을 치뜨기 힘들 정도로 악착같이 불어대는 눈바람도 우리의 이야기를 막아서지 못했다. 우리는 이광웅 시인의 시비 앞에 동그랗게 모여 김영춘 시인의 시에 유종화 시인이 곡을 붙인 ‘그 사람 있습니다’를 함께 들었다.
정다운 물소리 저벅저벅 따라가 보면 그 사람 거기 서 있네 푸르른 소나무처럼
아이들 노는 소리 가만가만 찾아가 보면 그 사람 웃고 서 있네 활짝 핀 수선화처럼
노랫말처럼 이광웅 시인은 ‘푸르른 소나무’였고, ‘활짝 핀 수선화’였다. ‘푸르른 소나무’ 시절은 그가 군산제일고등학교에 근무하던 날들이었다. 1976년부터 군산제일고등학교에서 국어 교사로 근무했던 이광웅 시인은 1982년 11월 일명 ‘오송회 사건’으로 구속되어 징역 7년을 선고받았다. 우리는 ‘푸르른 소나무’를 찾아 군산제일고등학교로 자리를 옮겼다. 눈발은 우리의 등을 떠미는 듯, 소맷부리를 잡아채는 듯했다. 군산제일고등학교 역사관으로 옮긴 자리에서 진영심 시인이 이광웅 시인과의 인연을 회고했다.
“1988년 2학기 때 부임 인사가 있었어요. 갑자기 제 뒤에서 ‘아, 저는 너무 행복합니다’라는 말이 들리더라구요. 그분이 이광웅 선생님이었어요. 지금 생각해보니까 선생님은 당시 감옥 생활을 마치고 다시 복직해서 너무나 행복했던 것이죠. (…중략…) 선생님과 문학을 이야기하면서 굉장히 가까워졌어요. 선생님은 마종기, 백석, 김수영, 두보 같은 시인을 좋아했어요. 릴케와 횔덜린, 러시아의 솔로호프 그리고 중국 시인 애청을 좋아했어요.”
1987년 6월, 4년 8개월의 복역 끝에 특사로 석방된 이광웅 시인은 1988년 9월 군산 서흥중학교에 복직했다. 이 무렵이 어쩌면 ‘활짝 핀 수선화’의 시기였을 것이다. 그러나 선생의 교단 생활은 1년 만에 끝나고 말았다. 전교조에 가입했다는 이유로 이듬해 8월에 해직된 것이다. 짧은 기간이었지만 진영심 시인은 이광웅 시인에게서 많은 영감을 받았다고 했다.
“선생님은 교무실에 출근하시면 서정주의 「동천」, 백석의 「허준」 같은 시를 외우고 오세요. 지금도 잊히지 않는 모습은, 에밀리 디킨슨의 ‘I am Nobody’ 우리말로는 ‘나는 무명인’이라는 시가 있거든요. 그 시를 보여주면서 선생님은 유명한 사람이 되기보다는 그림자처럼 살고 싶어 했어요. 그분의 가슴에는 시가 있었고, 아이들이 있었고, 평등한 세상에 대한 꿈이 있었던 것 같아요. 선생님은 한 마디로 굉장히 영롱한 분이셨어요.”
김병용 소설가는 이광웅 시인이 전북대에 다닐 때 학보사 기자로 활동했다는 새로운 사실을 이야기했다. 이광웅 시인은 1959년 한국외국어대학교 불문학과에 입학했으나 한 학기 만에 자퇴하고 1963년에 전북대학교 국문학과에 입학했었다. 그러나 전북대학교도 한 학기 만에 자퇴하고 이듬해 원광대학교 국문학과에 편입하여 곡절 끝에 1971년에 졸업했다. 우리는 이광웅 시인의 연보를 읽었고, 김병용 소설가는 1998년 5월 이광웅 시인의 시비가 세워진 내력을 이렇게 덧붙였다.
“문학비를 어떻게 세워야 할지, 돈을 어떻게 조달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을 때, 서예가 여태명 선생이 제안했어요. 진안에 용담댐이 만들어지면서 많은 마을이 수몰되는데, 사람들이 돌을 막 주워가고 있다. 그러면서 제 기억에 이병천, 안도현, 여태명 선생이 트럭 하나를 구해왔어요. 당시 각 대학 박물관들이 수몰되는 지역을 지표조사하고 있었는데, 그때 발굴팀에 와 있던 중장비의 도움을 받아 돌을 트럭에 싣고 왔어요. 그 후 여태명 선생이 글을 쓰고 새겨서 이광웅 선생의 시비를 세울 수 있었습니다.”
군산제일고등학교를 나온 우리는 눈길을 더듬어 째보 선창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이광웅 시인이 단골로 들렀던 유락식당이 있었다. 우리는 그곳에서 이광웅 시인 없이 점심을 먹었다. 이광웅 시인 덕분에 한자리에 모였지만, 정작 우리를 불러 모은 사람은 보이지 않는 이상하게 허전하고 이상하게 가득 찬 자리였다. 강형철 시인이 점심을 드시다 말고 노래를 시작한 것은 호스트 없이 앉아 있는 불청객의 허전함을 채우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그 뒤를 한상준 소설가가 ‘호남가’를 짱짱하게 세웠고, 후일담 같은 이야기들이 이광웅 시인을 여러 차례나 옆자리에 불러 앉혔다. 노랫가락은 그칠 줄 모르고 퍼부어대는 눈발처럼 군산을, 이광웅 시인을 기억하는 우리를, 하얗게 흠뻑 덮었다.
보기 드문 폭설을 핑계로 일정은 서둘러 마무리되었다. 마지막으로 나는 군산을 떠나면서 자료집에 실린 글 한 편을 새기듯 읽었다. 오송회 사건 재심 판결문 ‘이유’에 수록된 이광웅 시인의 「보석함」이라는 글이었다. 이광웅 시인이 경찰에 연행되기 직전인 1982년 5월 원광대학교 학도호국단에서 발간한 「원광문화」에 발표한 글이라고 설명이 붙어 있었다.
“인간은 이 지상에서 시인으로 살아간다. 시인의 말이 가슴 속에 젖어 있어 언제나 눈이 밝은 시인으로 살고 싶어 추위에 떨고 있는, 겨울밤 하늘 별빛을 보석함에 받는다.”
나는 글의 마지막 단락에 도돌이표를 그려놓고 계속해서 읽었다. 그랬다. 우리는 보석 같은 눈발을 고스란히 뒤집어쓴 채 모두가 시인으로 살아가고 있었다. 그렇지만 과연 참된 시인으로 사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목숨을 바쳐 술을 마시고, 연애하고, 교단에 서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분명한 건, 그날 그 자리에 보석 같은 함박눈이 내렸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눈발을 헤치고 걷는 사람들의 어깨가 단단하게 살아 있었다는 것이다. 나는 그런 모습이 진짜라고 생각했다. 이광웅 시인이 그랬던 것처럼, 목숨을 걸어도 좋을 진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