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중해의 안탈리아와
성스러운 도시 히에라폴리스
윤지용 편집위원
튀르키예 영토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아나톨리아는 ‘반도(半島)’다. 3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있다. 북쪽에 흑해, 서쪽에 에게해, 남쪽에는 지중해가 있다. 아나톨리아 남부의 안탈리아(Antalya)는 고대부터 발달했던 지중해의 항구도시다. 일찍부터 해상 무역의 요충지로 번성했던 곳답게 그리스-로마 시대의 유적이 많이 남아 있다. 기원전 2세기에 페르가몬(Pergamon) 왕국의 앗탈루스 2세가 세운 도시라서 앗달리아(Attalia)로 불렸다. 기원전 133년에 로마제국의 속주가 됐고, 12세기에 셀주크튀르크의 영토가 되면서 안탈리아로 이름이 바뀌었다.
안탈리아 구시가지 칼레이치
안탈리아는 지중해의 해변과 온화한 기후, 다양한 역사유적들 덕분에 유럽인들에게 휴양지로 인기 있다. 최근에는 우리나라 사람들에게도 많이 알려져서 젊은 배낭여행자들이나 은퇴자들 사이에 ‘안탈리아 한 달 살기’가 유행이다. 전용 해변을 갖추고 있고 하루 세 끼 식사와 음료, 주류를 모두 제공하는 ‘올 인클루시브 리조트’들도 성업 중이다. 며칠 동안 호텔 안에만 머물면서 다양하고 풍성한 식사와 수영을 즐길 수 있는데도 숙박비가 그리 비싸지 않다. 그렇지만 며칠 안 되는 여행기간 동안 둘러볼 곳이 많은 우리는 한가하게 ‘호캉스’를 누릴 여유가 없으니 구시가지의 항구 쪽에 숙소를 잡았다.
안탈리아 구시가지는 ‘칼레이치(Kaleiçi)’라고 불린다. 튀르키예어로 칼레는 ‘성’, 이치는 ‘안쪽’이다. 항구에서부터 도시를 둘러싸고 있던 성곽 안쪽 지역이라는 뜻이다. 칼레이치로 들어가는 관문인 ‘하드리아누스 게이트’는 안탈리아의 랜드마크다. 그 옛날에 이곳이 로마제국의 땅이었다는 것을 알려주는 조형물이다. 서기 130년에 로마 제국의 하드리아누스 황제가 순방한 것을 기념해서 세운 이오니아식 아치다. 돌로 된 바닥에 깊게 패인 두 줄은 이곳을 드나든 마차들의 바퀴 자국이라고 한다. 오랜 세월 동안 떨어진 물방울들이 바위에 구멍을 뚫는다더니 얼마나 많은 마차들이 지나다녀서 돌바닥이 이렇게 패였을까?
하드리아누스 게이트를 지나 칼레이치로 들어서는 길목에 있는 웅장한 탑이 이블리(Yivli) 미나렛이다. 이슬람 사원들에 있는 첨탑을 미나렛이라고 한다. 1207년에 안탈리아를 점령한 셀주크튀르크의 술탄이 이슬람의 영광을 과시하기 위해 20년에 걸쳐 높이 40미터짜리 첨탑을 세웠다. 이블리 미나렛을 지나 항구 쪽으로 언덕을 내려가면 미로 같은 골목길들이 나온다. 오스만제국 시절에 지어진 오래된 건물들의 담벼락은 꽃으로 장식되어 있다. 대부분 카페와 레스토랑과 숙박업소들이다. 골목길에 있는 아무 카페에나 들어가 마당에 앉아 튀르키예식 홍차인 차이를 마셔도 좋다. 길가에 늘어서 있는 가게들에선 갖가지 기념품을 판다. 액운을 물리친다는 푸른 눈 나자르본주 같은 공예품들도 있고 튀르키예 전통 디저트 로쿰도 있다. 관광지여서 마진을 많이 붙였을 텐데도, 워낙 물가가 싼 나라라서 그리 비싸지 않다.
지중해의 해적 붉은 수염 바르바로사
반원형 모양의 아늑한 칼레이치의 항구에 정박해 있는 배들은 대부분 관광객들을 태우는 유람선들이다. 하나같이 옛 범선들처럼 돛대가 달려 있지만, 돛대는 장식용이고 내연기관 엔진으로 움직이는 동력선들이다. 이런 유람선을 타고 안탈리아 해안을 따라 뒤덴폭포까지 갔다가 돌아오는 데 두 시간쯤 걸린다. 뒤덴폭포는 제주도의 정방폭포처럼 민물이 바다로 떨어지는 폭포인데 배 위에서 바라보는 풍경이 장관이다. 유람선 투어를 마친 후 항구의 레스토랑에 앉아 잔잔한 지중해의 잔물결에 석양이 반짝이는 윤슬을 바라보면서 에페스 맥주를 마셨다.
안탈리아 항구 한켠에는 터번을 두르고 수염을 기른 한 남자의 흉상이 있다. 흉상 아래의 명판에 ‘BARBAROS HAYREDDIN PASA’라고 새겨져 있다. 16세기 북아프리카를 근거지로 지중해 일대를 장악했던 해적 바르바로사, 하이르엣딘 파샤다. 바르바로사는 ‘붉은 수염’이라는 별명이고 본래 이름은 하이르엣딘이다. 페르시아어에서 유래한 ‘파샤’는 오스만제국에서 높은 신분의 인물에게 붙이는 경칭이었다.
해적 바르바로사는 오스만제국의 술탄 셀림 1세에게 영입되어 오스만제국의 해군제독이 되었다. 사실 이 시기에는 ‘해적’과 ‘해군’의 구분이 모호했다. 무장한 배들은 서로 자국의 선박을 보호하고 상대 국가의 배들을 노략질했다. 바르바로사가 이끄는 오스만제국의 해군이 지중해를 제패한 덕분에 오스만제국은 북아프리카까지 영토를 확장할 수 있었다. 튀르키예의 장보고인 셈이다. 바르바로사가 죽은 후 1571년 레판토 해전에서 유럽 연합군에게 패배한 오스만제국은 지중해의 패권을 잃고 쇠락하기 시작했다.
신성한 도시 히에라폴리스, 목화의 성
안탈리아에서 당일치기로 파묵칼레에 다녀오는 사설 투어버스를 탔다. 안탈리아에서 북서쪽으로 세 시간쯤 가면 데니즐리라는 도시가 나오고 데니즐리 근교에 파묵칼레가 있다. 파묵칼레는 튀르키예 패키지여행 상품에 빠지지 않고 들어가는 관광명소다. 고대 로마제국 시절부터 황제와 귀족들이 즐겨 찾는 온천 휴양지로 발달했는데, 온천수에 함유된 칼슘 성분 때문에 석회암이 녹아내려서 언덕 전체가 눈부시게 하얗다. 그래서 파묵칼레다. 파묵은 ‘목화’, 칼레는 ‘성’이니 ‘목화의 성’이다. 12세기에 이 일대를 장악한 셀주크튀르크인들이 붙인 이름이다. 본래 그리스-로마 시대의 이름은 히에라폴리스(Hierapolis)였다. ‘히에로스’는 고대 그리스어로 성스럽다는 뜻이니 ‘성스러운 도시’다. 유황 성분이 들어있는 온천수의 수증기가 고대인들에게 신비감과 경외감을 주어서 그런 이름을 얻었을 것이다.
파묵칼레 언덕의 석회암이 녹아내려 만들어진 새하얀 웅덩이들이 절경이다. 목화의 성이라는 이름이 저절로 실감난다. 우리가 갔던 가을철이 건기라서 웅덩이에 고인 온천수의 양은 많지 않았다. 발목까지 찰랑찰랑 물에 잠길 정도인데도 관광객들 중 태반이 수영복을 입고 있는 모습이 낯설었다. 따로 입장료를 내고 들어가는 온천 수영장도 있는데, 로마 제국 시절부터 황제와 귀족들이 몸을 담갔던 곳이라고 한다.
벌판에 멀리 보이는 돌덩어리들은 모두 고대도시 히에라폴리스의 유적들이다. 객석에 만오천 명이 들어갈 수 있다는 로마의 원형극장도 옛 모습 그대로 남아 있다. 상하수도를 갖춘 주거지도 있고 공동묘지도 있다. 로마제국의 유력자들 중에 온천 휴양지인 이곳에 와서 여생을 마친 이들이 많다 보니 묘지의 규모가 커졌다고 한다. 히에라폴리스 유적에서 출토된 유물들을 모아둔 박물관도 있다. 박물관에는 묘지에서 출토된 석관들과 로마 시대의 동전들, 도기들과 벽화들을 시기별로 분류해서 전시하고 있다. 파묵칼레 입장료에 박물관 입장까지 포함되어 있으니 그냥 들어갈 수 있다.
히에라폴리스에는 기독교 성지순례 단체 여행객들도 많다. 예수님의 열두 제자 중 하나인 사도 빌립보가 이곳에서 순교했다고 한다. 멀리 높은 언덕 위에 있는 건축물이 빌립보교회다. 사도 빌립보의 순교를 기리기 위해 4세기 무렵에 지어진 교회다. 물론 지금 교회로 사용되는 건물이 아니고 반쯤 허물어진 유적이다. 이 일대는 농업이나 교역이 발달한 곳이 아니었고 지정학적으로도 중요한 위치가 아니었지만, 온천 덕분에 제법 발달했던 도시라서 사도 빌립보가 이곳에서 전도활동을 했을 것이다.
안탈리아로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2천 년 전의 한 남자를 생각했다. 이스라엘 땅은 이곳에서 2천 킬로미터나 떨어져 있다. 당시로서는 거의 세상의 끝이다. 사도 빌립보는 왜 이 먼 곳까지 와서 목숨을 걸고 ‘복음’을 전했고 기꺼이 죽음을 맞이했을까? 그를 이곳까지 이끌었던 신념과 열정의 실체는 무엇이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