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만 가닥의 시간이
들려주는 이야기

문신 편집위원

"세상의 모든 사물과 사람 그리고 사연들이
하나의 커다란 연대를 이룬 것,
그게 제 설치예술이기도 하고
또 우리가 말하는 인생이기도 한 것 같아요"

2022년에 교동미술관이 주목한 작가는 고보연 설치미술가였다. 고보연 작가는 작년에 교동미술관에서 운영하는 교동미술상을 수상했다. 2011년에 시작해 10회째가 된 2022년 교동미술상은 작지만 분명 새로운 시도가 있었다. 그동안에는 해마다 1명의 수상자를 냈고, 수상자의 장르가 조각 2명, 한국화 2명, 회화 5명, 도자 1명이었다. 그러던 것이 2022년에 장년부와 청년부로 수상자를 확대했으며, 장년부에 설치미술을 작업하는 고보연 작가가 선정되었다. 그동안 눈여겨보지 않았던 설치미술에 주목한 것도 눈에 띄는 변화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교동미술상의 지난 10년간의 결실을 확인할 수 있는 수상작가전이 2023년 1월 17일부터 1월 29일까지 교동미술관 기획초대전으로 열렸다. 고보연 작가와 만난 건 1월 17일이었다.

땋기_그 연대의 힘

고보연 작가의 작품은 형식과 주제 모두 ‘땋기’에 닿아 있는 것 같다. 그의 이야기대로 땋기는 하나로는 불가능한 형식이다. 둘로도 부족하고, 적어도 세 가닥의 실이 있어야 땋아낸 세계가 견고하게 존재할 수 있다. 하나가 둘을 엮고 둘이 하나를 받아들이는 형식이 땋기다. 그리하여 세 개의 독립된 세계가 하나로 완성된 세계가 되는 것. 땋기는 그렇게 하나의 완성된 세계이자 그 세계를 바라보는 심도의 눈이다. 땋기의 이런 속성 때문에 자연스럽게 ‘연대’라는 인간 삶의 근원적 속성을 떠올리게 하지 않을까?

“대학에서 회화를 공부했어요. 학부와 대학원에서 서양화를 전공한 후 독일로 유학을 떠나게 되었죠. 독일어를 잘하지 못했지만 무작정 제 포트폴리오를 들고 대학을 찾아갔어요. 말이 안 통했기 때문에 포트폴리오만으로 뭔가를 이루어보려고 한 거죠. 그런데 한 교수님이 그러시더라구요. 당신은 회화보다는 설치미술에 역량이 있는 것 같다고. 그러면서 설치미술을 하는 교수님을 소개해주었어요. 그렇게 설치미술을 제대로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사실은 회화를 할 때도 제 작품에는 공간적 표현 요소가 강하게 드러났어요.”

독일에서 말이 잘 통하지 않았기 때문에 오히려 더 많은 작품을 감각적으로 자세히 ‘볼’ 수 있었다. 작품과 민낯으로 소통하는 방식은 언어를 통해 설명을 듣거나 해설을 듣는 것과는 다른 차원이었다. 언어를 매개하지 않음으로써 창작의 과정은 ‘생각’이 아니라 ‘감각’을 활성화할 수 있었다. 감각은 생각과 달리 하나로 규정되지 않고, 과장된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다. 알다시피 인간이 만들어 온 모든 창조적 상상력은 활성화된 감각의 표상이지 않은가!

고보연 작가의 포트폴리오를 보면 공간을 점유하기 위해 다양한 사물이 활용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중에 눈길을 끄는 건 폐기된 사물들이다. 일회용 티백을 활용한 작품은 작은 우주들이 모여 반짝이는 코스모스적 상상력이 돋보인다. 그러나 다시 보면 우리가 사는 공간을 보이지 않게 그물망처럼 엮고 있는 시간의 형상 같기도 하다. 초겨울, 잘 깎아 말린 곶감이 주렁주렁 매달린 것을 연상하게도 하고, 작은 요정들이 각자의 범선을 타고 한꺼번에 창공으로 날아오르는 것을 상상하게도 한다.

“찻물을 우려내고 남은 티백은 단순한 사물이 아니에요. 티백은 그 차를 마신 사람들과 차를 우려내고 마시는 시간의 잔여 같은 거죠. 그 순간은 지나갔지만, 그 순간을 기억하는 티백은 남아 있잖아요. 그 시간을 그물망처럼 구성하다 보니 그것이야말로 서로 모르는 사람들, 서로 다른 시간이 알게 모르게 연대하는 것처럼 생각되었어요. 세상의 모든 사물과 사람 그리고 사연들이 하나의 커다란 연대를 이룬 것, 그게 제 설치예술이기도 하고 또 우리가 말하는 인생이기도 한 것 같아요.”

티백뿐만 아니라 기저귀 천도 그에게는 좋은 표현 도구였다. 그리고 지금은 헌 옷이 다양한 상상을 실현하는 미적 도구가 되고 있다. 그러나 중요한 건 티백이나 기저귀 천, 헌 옷 같은 일상의 오브제를 미적 오브제로 전환해내는 그의 방법적 상상력이다. 고보연 작가는 사물의 개별성을 보존하면서도 사물이 확장해갈 수 있는 연대의 가능성을 ‘땋기’라는 방법적 상상력으로 실현한다. 오래전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던 어떤 이가 헤아릴 수 없이 반짝이는 별을 상상적으로 연대하여 별자리를 만들어낸 것처럼, 고보연 작가는 분별없이 흩어져 있는 사물들 사이의 인력을 발견하고 그것들을 연대의 오브제로 확장하는 일을 미적 기획으로 삼고 있다.

공간_자유와 유연한 세계

일반적으로 미술가가 구상하는 미적 상상은 캔버스라는 플랫폼에서 구현되는 걸로 우리는 알고 있다. 미술에 대한 인식이 평면예술에 국한된 경우가 많고, 대중에게 호소력을 지닌 미술의 매개가 대체로 화폭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이차원의 평면으로도 인간의 감정과 사유를 내밀하게 표현할 수 있는 게 미술이다. 그러나 고보연 작가의 미적 플랫폼은 삼차원 공간에서 좀 더 자유롭고 유연해지는 특징이 있다. 어쩌면 삼차원 공간이야말로 인간의 삶을 누락되는 감정 없이 가장 절실하게 담아내는 플랫폼일지 모른다. 고보연 작가는 이러한 삼차원 공간을 삶 차원으로 환기하고 전환하는 작업에서 작가로서의 정체성을 확립해나가는 중이다.

“장애인들을 보면서 비장애인들이 쉽게 누릴 수 있는, 예를 들어 미술을 배우는 분들이 많잖아요. 음악도 그렇고. 장애인들은 이런 활동에서도 기회가 부족해요. 그래서 십 년 넘게 작업실을 개방해서 장애인이나 여성 등 사회적 소수자들과 함께 미술을 했어요. 제가 방법론으로 삼고 있는 땋기는 그러한 소수자들의 연대라고 생각해요. 또한 땋기는 여성의 머리카락이나 실매듭 같은 곳에서 중요한 미적 표현 요소잖아요. 제 작품의 기획이 그러한 걸 모두 포함하고 있어요. 여성의 억압과 소수자의 차별 그런 걸 땋기라는 방법으로 풀어내고 싶었어요.”

고보연 작가는 오랫동안 장애인, 여성들과 더불어 그들의 고민과 삶을 작업으로 전환해왔다. 이러한 작업은 미술교육이라는 제도적 성과를 넘어 삶의 공간을 확장하는 활동이었다. 작가에게는 소수자의 일상 영역으로, 소수자들에게는 예술가의 일상 영역으로 한 걸음씩 다가가는 과정이었던 것. 이렇게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새로운 작업을 진행하는 일은 무관했던 서로의 영역으로 섞여드는 일이었다. 이런 활동 속에서 땋기라는, 무관한 가닥들이 자기 몸으로 타인의 몸을 감싸는 상호작용이 일어나는 건 아닐까?

그럴 때 작가의 작업실은 서로의 감각과 생각이 엮이는 공간이 되었다. 그러나 그보다 내밀한 곳을 들여다보면 까마득한 심도가 발생하는 것 같다. 티백을 활용한 작품의 경우, 티백으로 차를 우려낸 시간과 그 차를 마신 사람들의 시간, 그리고 그들의 이야기가 티백의 배경에 있었다. 티백 하나하나에 담긴 사람과 사연과 시간이 연대하여 새로운 미적 공간을 형성해냈을 때, 그 공간은 티백의 기억이 재생되는, 인간의 시간이 살아나는, 사람의 이야기가 발화되는, 그런 삶의 탄생지가 되었다. 이렇게 보이지 않는 인연의 고리가 서로 다른 시간을 입체의 공간에 풀어놓는 방식은 고보연 작가의 세계에서만 펼쳐졌다. 그래서 그의 작업을 이렇게 말해볼 수도 있겠다. 고보연 작가는 공간을 점유함으로써 시간의 덫을 땋아내고 있다고.

“제 작품이 공간 안에 배치되는 것에 그치지 않고, 공간 자체를 구획하고 형성할 수 있는 작업을 준비하고 있어요. 땋기의 작품은 정해진 형식이 아니잖아요. 그래서 정물처럼 전시되지 않고 그 안에서 또 다른 활동이 발생할 수 있는 공간이 될 수 있으면 좋겠어요. 그러자면 전시 공간도 만족할 만큼 커야 하는데, 아직은 그런 공간을 만나지 못했어요. 조만간 기회가 있을 거라고 믿어요. 올해는 6월에 숨갤러리에서 개인전을 준비하고 있고, 그밖에 단체전을 통해 관람객을 만나고자 합니다.”

고보연 작가의 땋기는 정해진 규격이 없다. 땋아가는 시간도 제한이 없다. 일 년에 하나의 작품을 땋아내기도 한다. 교동미술관에 전시 중인 작품 설명에서 고보연 작가의 기획을 읽어낼 수 있었다. “여성의 머리 땋는 방식에서 얻어온 이 방법은 단순하지만 시간, 노동, 연대, 여성, 환경, 재생, 새활용 등을 생각나게 한다. 탯줄, 머리카락, 여성의 가슴 등의 소재는 꾸준히 여성의 신체언어에 관심을 가지고 작업하는 과정의 일부이다.

땋기를 통해 고보연 작가는 정형화되기 쉬운 공간 예술을 시간의 유연함으로 극복해내고 있다. 길게 땋아가는 매듭 하나하나가 그러한 시간의 가시적 형상처럼 보인다. 그리고 그 과정은 하나의 매듭 지음이 삶의 종결이 아니라 새로운 삶을 향한 단단한 토대가 됨을 보여준다. 땋기의 상징적 방법론에 관해 고보연 작가는 2022년에 나온 도록에서 이렇게 이야기했다.

삶은 다시 이어지고

작가의 말처럼, 티백이나 헌 옷 같이 버려진 것들이 단단하게 땋아짐으로써 삶은 다시 형상화되었다. 그리고 그 삶이 시공간을 점유함으로써 그의 작품은 인간의 이야기를 재생하기 시작했다. 그래서일까? 그의 작품 앞에 서면 수만 가닥의 시간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듣는 기분이다. 만약에 그의 작품에서 나의 이야기를 발견한다면 우리도 고보연 작가의 땋기에 낯선 방식으로 참여하고 있다는 뜻이 될 것다. 그러니 마땅히 우리의 이야기는 땋기의 시간에서 자유를 얻어야 한다. 그것이 고보연 작가가 기획한 미적 연대의 세계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