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계를 향한 열망이라는
여성적 투쟁으로
다시 쓰는 해방운동
김경태 영화평론가
<유령>은 일제강점기인 1930년대 경성을 배경으로 전개되는 첩보액션물이다. 조선총독부에 새로 부임해온 총독을 향한 항일단체 ‘흑색단’ 소속 ‘난영(이솜)’의 첫 번째 암살 시도가 실패로 돌아간 뒤, 경호대장인 일본인 ‘카이토(박해수)’는 총독부 내에 숨어있는 스파이 ‘유령’을 색출하기 위한 작전을 수행한다. 이를 위해 용의자로 지목된, 경무국 통신과의 감독관 ‘쥰지(설경구)’, 암호문 기록 담당 ‘차경(이하늬)’, 암호 해독 담당 ‘천계장(서현우)’, 직원 ‘백호(김동희), 그리고 정무총감 비서 ‘유리코(박소담)’를 외딴 호텔에 가둔다. 카이토는 이들 중 유령이 있다고 확신하며 자백을 하지 않으면 한명씩 고문을 하겠다고 겁박한다.
그런데 영화는 애초에 차경이 유령임을 밝히면서 시작한다. 비 내리는 어느 날 밤, 영화관 앞에서 흑색단의 지령을 받은 차경과 난영은 서로 처음 보는 사이처럼 마주한다. 우산 너머로 난영의 얼굴이 조금씩 드러나고, 우산살 끝에서는 빗방울이 맺혀서 떨어지며, 차경은 난영이 입에 문 담배에 성냥으로 불을 붙인다. 이 일련의 쇼트들은 마를린 디트리히가 부르는 재즈풍의 노래가 흐르는 가운데 클로즈업과 슬로우모션의 배분을 통해 매우 감각적으로 묘사된다. 다음 날, 차경은 일본군의 총에 맞아 숨진 난영을 끌어안고 오열한다. 그리하여 우리는 차경이 유령임을 알아차릴 뿐만 아니라 둘이 동료 이상의 친밀한 사이임을 깨닫는다. 마치 영화는 누가 유령인지를 맞추는 것보다 그들의 관계에 더 주목하며 보고 느끼라고 말하는 듯하다.
그래서 영화는 일찌감치 유리코가 또 다른 유령임을 밝힌다. 이제부터는 차경과 유리코의 견고한 여성 연대를 통해 호텔에서 무사히 빠져나와 투쟁을 이어가기 위한 필사의 노력이 펼쳐진다. 그들은 유령을 색출하고자 안간힘을 쓰는 카이토 및 쥰지와의 맞대결에서 결코 밀리지 않는다. 여성은 남성과 대등한 전투력을 과시한다. 특히 유리코의 몸은 남성들의 고문과 학대로 심하게 훼손되어 있지만, 그럴수록 그녀는 더욱 단단해져 갔다. 그런데 정작 그들의 특별함은 남성 못지않은 신체적 강인함이 아니라 관계를 향한 강한 열망에서 비롯된다.
예의 그 영화관 앞 차경과 난영의 조우 장면은 차경의 회상을 통해 다시 한번 등장한다. 그 장면은 영화의 시작점일 뿐만 아니라 잊지 말아야 할 감각적 지향점임을 알린다. 즉, 그것은 유리코와 차경이 항일투쟁을 통해 맺어갈 친밀한 관계의 복선이다. 여성들은 조국해방을 위한 연속체로서 서로를 지켜주고 돌보며 연대해 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애초에 비록 조선인이지만 조선 최고 재력가의 딸이기에 남부럽지 않게 살 수 있었던 차경이 항일투쟁에 뛰어든 것도 사랑했던 난영의 신념을 따른 선택이었다. 조국에 대한 헌신은 사랑에 대한 헌신으로부터 기원한다. 심지어, 어머니를 죽이겠다는 카이토의 협박에 백호가 끝내 차경이 유령임을 실토하지만, 차경은 백호를 원망하지 않으며 그의 죽음을 애도하는 눈물을 흘린다. 백호의 자백이 사랑하는 사람을 지키기 위한 것임을 알기 때문이다.
반면에, 남성들은 서로 반목하고 경쟁한다. 카이토는 총독의 신임을 얻기 위해 유령을 놓친 부하들을 닦달하고, 쥰지는 다시 경호 대장의 자리에 오르기 위해 유령을 찾는데 혈안이 되어 있다. 그리고 카이토는 쥰지의 어머니가 조선인이라는 사실 때문에 그를 폄하하고, 쥰지는 자신의 출세에 걸림돌이 된 어머니를 원망했고 그녀의 자결을 방관했다. 이처럼 일본인 남성들에게 조선인을 향한 억압은 입신양면의 욕망과 맞물린다. 이는 조선인 여성들이 모든 사사로운 욕심과 개인의 안위를 버리고 조국해방에 투신한 것과는 다르다. 다만, 그 정서적 동력은 관계를 향한 갈망, 즉 사랑이어야 한다. 영화는 그것이야말로 결코 꺾이지 않는 여성적 투쟁의 본질이라고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