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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3 | 연재 [윤지용의 튀르키예 기행 5]
튀르키예에서 가장 큰 로마 유적 에페스
윤지용 편집위원(2023-03-16 10:49:22)



튀르키예에서 

가장 큰 로마유적 

에페스

윤지용 편집위원






지난 2월 6일 튀르키예의 아나톨리아 남동부 지역과 시리아 북부에 대규모 지진이 발생했다. 공교롭게도 지난 1월호에 소개했던 가지안테프 지역이 큰 피해를 입었다. 불과 넉 달 전에 내가 다녀온 곳에서, 수만 명이 목숨을 잃었고 수십만 명이 집을 잃고 노숙하면서 겨울 추위에 고통받고 있다. 참혹한 재난을 당한 곳에 대한 ‘여행기’를 쓰는 것이 마땅치 않은 일이지만, 연재는 독자와의 약속이기에 마지막 회 원고를 썼다. 이번 재난의 희생자들을 애도하며 삶의 터전과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모든 이들에게 진심으로 위로와 연대의 마음을 전한다. 





사도 요한이 묻힌 땅 셀추크

아나톨리아반도 서부의 에게해 연안에 있는 이즈미르는 튀르키예 최대 항구도시이자 세 번째로 큰 도시이다. 우리나라로 치면 부산쯤 되는 대도시이고 관광객들도 많이 찾는 곳이다. 그렇지만 우리 일행은 이즈미르를 건너뛰고 근처에 있는 작은 도시 셀추크로 향했다. 그곳에 에페스(Efes 튀르키예어)가 있기 때문이다. 기원전 7세기 무렵 그리스인들이 식민도시로 건설했다는 에페스는 로마제국 시절에 크게 번성했다. 신약성서에 나오는 ‘에베소’가 바로 이곳이다. 지금은 도시의 흔적만 남아 있지만, 고대에는 번성했던 대도시였으니 기독교 초창기의 사도들이 중요한 선교 거점으로 삼았을 것이다.




이즈미르 공항에 내려 버스를 타고 남서쪽으로 한 시간쯤 달려 셀추크에 도착했다. 숙소에 짐을 풀고 나왔더니 근처에 성 요한 교회(St. John’s Church)가 있었다. 사실 교회가 아니고 교회가 있던 유적이다. 예수의 사도이자 신약성서 요한복음의 저자인 요한을 기리는 교회가 이곳에 있었다는데, 지금은 돌기둥들만 남아 있다. 예수는 십자가형을 당하기 전에 요한에게 어머니인 마리아를 부탁했다고 한다. 요한은 예수가 십자가에서 처형된 후 예루살렘에서 추방된 마리아를 모시고 이곳에 와서 살다가 묻혔다고 한다.


나중에 기독교가 로마제국의 국교가 된 이후 비잔틴제국의 전성기였던 서기 6세기에 유스티니아누스 황제의 명에 의해 사도 요한이 묻힌 자리에 웅장한 교회가 지어졌다. 교회를 짓는 데에 사용된 엄청난 양의 석재들은 근처에 있는 달의 여신 아르테미스 신전을 부수어 가져왔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아르테미스 신전 터에는 돌기둥 한 개만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 성 요한 교회는 당시에 아나톨리아 일대에서 가장 큰 교회였다는데, 14세기 몽골의 침입으로 파괴되었다고 한다. 파괴된 유적인데도 세계 각지에서 기독교 성지순례객들이 타고 온 관광버스들이 줄을 이었다. 우리나라에서도 단체 성지순례객들이 많이 찾는 곳이라 근처에 한국식당도 있었다.


성 요한 교회를 둘러본 후 쉬린제 마을에 다녀왔다. 셀추크 시내에서 동쪽으로 7~8km쯤 떨어진 산골 마을인데, 최근 몇 년 전부터 유명 관광지로 떠올랐고 우리나라 여행자들도 많이 찾는다. 셀추크 시내에서 택시로 20분쯤 걸려 마을에 도착하니 입구부터 관광지 분위기가 물씬 났다. 산기슭의 가파른 언덕길에 있는 오래된 집들은 대부분 기념품이나 와인을 파는 가게들로 변해 있었다. 본래는 순박한 산골 사람들이 오순도순 살았을 동네가 장터가 돼버린 느낌이라 못마땅했다. 과일 와인으로 유명한 곳이라길래 어느 카페에 앉아 와인을 주문했더니 싸구려 과일주 맛이 났다. 관광업 때문에 망쳐진 곳 같아서 굳이 권하고 싶지 않은 곳이다.



튀르키예를 대표하는 역사문화유적

다음날 에페스 유적지에 갔다. 셀추크 시내에서 3km쯤 떨어져 있어 걸어서 가도 되지만, 오전 내내 유적지를 돌아봐야 해서 기력을 아끼기로 했다. 숙소에서 불러준 택시를 타고 유적 입구에 도착했다. 에페스 유적에는 출입구가 두 곳 있는데, 우리는 남쪽 출입구로 들어가서 북쪽 출입구로 나왔다. 다른 사람들도 대부분 남쪽으로 들어가서 북쪽으로 나오는 것을 보니 그게 일반적인 관람 방향인 것 같다.


에페스 유적은 튀르키예의 대표적인 역사문화 관광지다. 튀르키예 전역에 산재해 있는 그리스-로마 시대의 유적들 중 가장 규모가 크고 잘 보존되어 있다고 한다. 튀르키예 화폐 중 20리라 지폐에 에페스 유적이 그려져 있고 튀르키예에서 가장 대중적인 맥주 브랜드도 에페스다. 그리스 아테네인들이 건설한 식민도시였던 에페스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헬레니즘 제국과 로마제국 시절에 본격적으로 번성했다. 사도 바울의 전도 여행지였고 신약성서 요한계시록에 언급된 소아시아 7대 교회 중 하나가 있던 곳으로 초기 기독교 역사의 중요한 사적이기도 하다.



에페스는 각종 사회기반시설을 완벽하게 갖춘 도시였던 모양이다. 도로망과 상하수도는 물론 공중목욕탕과 공회당, 원형극장, 도서관까지 있었다. 도시에서 멀리 떨어진 계곡에서 상수도를 끌어왔던 수도교의 일부가 셀축 시내에 남아 있다. 공중목욕탕에는 대리석 바닥 아래로 더운 공기를 지나게 해서 난방을 하는 일종의 온돌도 구비되어 있었다고 한다. 좌변기 아래로 수로가 흘러 배설물을 씻어내리는 공중화장실도 그대로 남아 있었다. 여러 신들을 모시는 신전도 있었고 로마제국의 대도시들에 반드시 있는 원형극장도 있었다. 지금도 옛 모습 그대로 남아 있는 에페스의 원형극장은 객석의 규모가 2만5천 석에 달한다. 대규모 원형극장과 별도로 소규모 연극이나 음악회, 시 낭송 등을 공연했던 소극장인 오데온도 있다. 이 소극장도 1,500명 이상의 관객을 수용할 수 있었다고 한다.



버려진 덕분에 보존된 도시 에페스

남쪽 출입구로 들어가서 야트막한 경사의 언덕을 내려가면 길이 끝나는 곳에 셀수스 도서관이 있다. 켈수스 도서관이라고 발음하기도 하는데, 에페스 유적을 대표하는 건물이다. 에페스 유적의 입장권에도 이 도서관이 인쇄되어 있다. 도서관의 원형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는 것은 아니고 건물의 앞면과 내부 공간 일부만 남아 있다. 그렇지만 웅장과 크기와 섬세하고 화려한 조각 장식들에서 당시 이 도시의 영화를 엿볼 수 있었다. 이 도서관은 2세기 초반에 소아시아(아나톨리아)의 총독이었던 율리우스 아킬라가 자신의 아버지이자 전임 총독이었던 율리우스 켈수스를 기리기 위해 지었다고 한다. 도서관 건물 안에 켈수스의 무덤도 있었다고 한다.





아직 종이가 없었던 로마제국 시절의 책은 양피지 두루마리였다. 게다가 인쇄술도 없던 때이니 일일이 사람이 손으로 베껴 쓴 필사본들이었다. 양 한 마리에서 고작 몇 장 얻을 수 있는 양피지에 글을 읽고 쓸 수 있는 ‘고급인력’이 손으로 베껴 쓴 책이니, 매우 값비싼 귀중품이었다. 셀수스 도서관에는 그런 양피지 두루마리 책이 1만2천 권이나 소장되어 있었다고 한다.


에페스는 그만큼 번영을 누리던 도시였다. 본래 항구도시였던 이곳은 로마제국 시절에 지중해 무역의 요충지로서 막대한 부를 쌓았다. 에페스 유적에서 가장 넓고 긴 대로는 항구 쪽으로 난 길이다. 그런데 오랜 세월 동안의 퇴적작용으로 인해 지형이 변해 바다가 뒤로 물러나서 항구로서의 기능을 잃게 되었다. 게다가 몇 차례의 지진과 전염병 등으로 도시가 버려졌다고 한다. 아이러니하게도, 도시 전체가 거의 원형을 잃지 않고 보존될 수 있었던 것도 도시가 일찌감치 버려졌기 때문이라고 한다. 일종의 ‘새옹지마(塞翁之馬)’일까? 원형극장의 돌계단 위에 앉아, 버려진 덕분에 보존되어 오늘날 튀르키예를 대표하는 역사문화유적이 되었다는 에페스의 역설을 곰곰이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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