멜라초 나물
백희정
정월 대보름을 지나면 차츰 햇것이 먹고 싶어진다. 겨우내 먹었던 김장 김치와 동치미가 조금씩 물리기 시작하고, 골마지가 끼면서 군내가 난다. 식욕은 신선한 채소와 상큼한 겉절이 같은 것을 욕망하고 때에 따라 변절자가 되어간다.
집에서 차로 30분 이내에 있는 읍소재지인 삼례, 고산, 봉동에는 5일마다 장이 선다. 3일과 8일은 삼례장, 4일과 9일은 고산장, 5일과 10일은 봉동장이다. 보름을 앞두고 장에 나가보니 벌써 봄동, 달래, 냉이, 섬초(시금치)가 나와 있다. 봄동과 달래가 잃었던 입맛을 돋게 한다면, 냉이와 섬초는 동절기(冬節期) 부족했던 철분과 비타민 등을 보충할 수 있는 좋은 식재료다.
시절은 아직 봄이 아니건만, 시장의 야채들은 봄이 따로 없다. 이맘때가 되면 입맛을 돋우는 특별한 나물이 생각난다. 눈을 맞고 자란다는 멜라초다. 멜라초는 주로 산기슭, 얕은 계곡 주변이나 습기가 있는 땅에서 잘 자라는 식물이다. 산괴불주머니라고도 하는데 마트나 시장에서는 쉽게 볼 수 없는 나물이다.
작년, 수만리 마애석불을 다녀오는 산길에서 나는 멜라초를 채취했다. 쓴맛이 매우 강하고 독성이 있어 생으로는 먹을 수 없는 식물이다. 삶은 후 찬물에 반나절 정도 담가 쓴맛을 충분히 우려내어야 먹을 수 있다. 조리법은 데친 멜라초에 된장, 고추장, 들기름을 넣고 양념하여 무쳐 먹는다. 멜라초 나물은 그 맛과 향이 특별하여 입맛을 돋우고, 그 맛을 아는 이는 꼭 다시 찾는 나물이다.
나는 처음 이 나물을 먹었을 때, 쓴맛이 너무 강해 깜짝 놀랐다. 한약보다도 더 쓰고, 살면서 맛본 음식 중에서 최고의 쓴맛이었다. 그러나 이 나물에는 묘한 매력이 있다. 처음 맛은 쓰지만, 부드러우면서도 아삭거리는 식감과 은은한 향이 씹을수록 깊다.
옛날 우리 집에는 엄마가 외가에서 씨를 받아와 뿌려, 뒤 안의 장독대 주변에서 해마다 자라났다. 엄마는 이 나물을 먹으면 입맛이 살아나고, 잠이 잘 온다며 이맘때 꼭 밥상에 올렸다. 그런데 9년 전, 시골집을 허물고 새집을 지으며 아쉽게도 뒤 안의 멜라초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멜라초의 쓴맛은 강렬하여 몸이 기억한다. 작년 이맘때 코로나인 듯 아닌 듯한 자가격리를 마치고 답답함과 무기력증이 극에 달했다. 병원에서 감기약을 두 번이나 처방받아 복용했지만, 몸은 더디게 회복되어 갔다. 목의 통증은 지속되었고, 입맛이 사라지고, 혀와 목 안쪽이 데인 것 같고, 맛을 식별할 수가 없었다. 음식을 먹으면 속이 답답하고 비위가 상했다. 까끌까끌한 입에서는 쓴 내가 나는 것도 같고, 식욕이 없고 좀처럼 입맛이 돌아오지 않았다. 집을 벗어나 바람이라도 쏘여야 답답함이 해소될 것 같았다.
오전 11시 나는 따뜻한 물 한 병과 등산지팡이를 챙겨 무작정 집을 나섰다. 평소 가지 않았던 곳, 새로운 길을 걷고 싶었다. 차를 달려 소양 위봉산성을 지나 수만리 마애석불 입구 이정표를 찾았다. 오래전 문화해설사 교육을 받으면서 알게 된 장소였다. 다행히 이정표는 길가에 있었다. 몇 해 전만 해도 이정표가 없어 등산로를 찾지 못했는데 산뜻한 모양새가 최근 세워 놓은 모양이다. 나는 차를 주차하고 맞은편 입석교라고 쓰인 다리를 건너 계곡을 가로질렀다. 그리고 텅 비어있는 논과 밭 사이 폭이 50㎝ 남짓한 작은 수로를 따라 산을 향해 걸었다. 야생동물의 침입을 막기 위해 설치해준 그물망 일부를 누군가가 터놓아 산으로 나 있는 등산로가 눈에 들어왔다. 나는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산길을 걸었다. 유난히 바위가 많은 산길이었다. 제법 수령이 되어 보이는 참나무와 활엽수가 어우러진 숲이었다. 등산로 초입을 벗어나자 크고 작은 너럭바위들로 누군가가 산길을 만들어 놓은 듯 길이 나 있었고, 중간중간 등산객들이 쌓아 놓은 돌탑도 보였다. 등산로 옆으로 계곡이 쭉 이어졌고 겨울 가뭄 탓인지 물은 많지 않았다.
나는 걷고 쉬고를 반복하며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은 걸음으로 산길을 올라갔다. 산길을 걷는 내내 사람에 기척은 없었다. 간혹 바스락거리는 소리에 놀라 쳐다보면 나보다 더 놀란 다람쥐가 있었다. 아무도 없이 혼자 걷는 산길이고, 초행이어서 겁이 날 만도 한데 이상하게 마음은 평온했다.
1시간 30분 남짓을 걸어 민가처럼 보이는 안도암에 도착했다. 기도 도량이라고 적힌 낡은 팻말이 눈에 들어온다. 주황색 양철지붕, 자물쇠를 채운 방문, 오래된 나무 마루, 마당과 집을 연결해주는 토방, 토방 위 작은 나무 의자, 마당 한쪽의 텃밭과 집 주변으로 서 있는 늙은 감나무 그리고 옹달샘 ……
토방 한가운데에 놓아둔 나무 의자는 마치 쉬어가라는 집주인의 인사 같았다. 나는 집주변을 한참이나 두리번거리다 겨우 마애석불로 올라가는 길을 찾았다. 지금까지의 완만한 산길과 달리 급경사진 산길을 10m 남짓 더 올라 겨우 마애석불 앞에 섰다. 위봉산성이 있는 서쪽 산 능선을 천천히 눈에 담으며 가쁨 숨을 골랐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커다란 암벽에 새겨진 마애불을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나는 마애불 앞에 두 손을 모아 합장 후 삼배를 올리고 천천히 산길을 내려왔다.
그 내려오는 산길에 멜라초가 있었다. 얼마나 반가웠는지 발걸음을 멈추고 그대로 앉아 맨손으로 나물을 뜯었다. 연한 잎과 줄기에서 아삭아삭 소리가 났다. 한주먹 남짓, 혼자 먹기에는 충분한 양이었다. 집으로 돌아와 옷도 갈아입지 않고, 냄비에 물을 끓이고 멜라초를 데쳐냈다. 검고 진한 푸른 물이 우러나왔다. 나는 저녁에 나물을 무쳐 먹을 요량으로 쓴맛이 잘 우러나도록 물을 수시로 갈아주었다. 그날 저녁 나는 멜라초를 무쳐 밥상을 차렸다. 쌉쌀한 쓴맛과 향이 입안 가득 퍼졌다. 절로 침이 고이고 입맛이 살아나는 것 같았다.
강변의 마른 억새가 서로 몸을 비비며 사각거린다. 입춘(立春)을 지나고 봄을 데려오는 바람은 메마르고 변덕이 심해서 어느 날은 훈풍(薰風) 같고, 어느 날은 삭풍(朔風) 같다. 아침저녁 간간이 서리가 내리고 물가에 아직 살얼음이 남았지만, 양지바른 산기슭 수북하게 돋아있는 푸른 멜라초가 싱그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