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까지 바라보고만 있을 것인가!
글 이병초 시인·전북작가회의
급우가 한 반에 70명이 넘었던 1970, 80년대의 우리는 비정상적으로 수학과 영어를 잘하는 녀석들 몇 빼고는 평범했다. 이름자의 특징이나 신체적인 특징을 들어서 별명을 붙여서 놀곤 했다. 내 별명은 꽁초였다. 이름 끝에 자가 ‘초’여서 급우들이 꽁초라고 불렀을 터였다. 하지만 나는 불쾌하지 않았다. 급우들도 마찬가지였다. 얼굴이 긴 놈은 길쭉이, 눈이 큰 놈은 뻥새, 이름이 ‘김대인’인 놈은 왕대인이라고 불렸다. 우리는 쉬는 시간마다 꽁초나 길쭉이나 뻥새, 왕대인이 되었고 유쾌했다. 그땐 학교폭력이란 말이나 ‘왕따’라는 말이 없었다.
쉬는 시간에 더러 싸움이 나가도 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주먹을 휘두른 놈이나 느닷없이 한 방 얻어맞은 놈이나 둘 중의 한 녀석이 상대의 신경을 건드린 거였다. 한 녀석이 일방적으로 무시당했다고 생각한 순간 우당탕퉁탕 싸움판이 벌어진 거였다. 그러나 이 싸움판은 불과 2, 3분 만에 끝났다. 우리는 탁월한 싸움꾼이 아니었다. 그리고는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는 듯 싸운 놈들끼리 더 친해지곤 했다. 나도 물론 급우와 투닥거릴 때가 있었다. 하지만 다른 급우들과 똑같이 금세 너나들이가 되었다. 중3 때의 한 급우를 제외하고는.
“이병초 너, 야자시간에 철봉대 밑에서 만나자.”
쪽지에 적힌 글씨가 삐뚤빼뚤했다. 윤민수였다. 5교시 체육 시간에 내가 속한 1조와 민수네 5조가 쭈쭈바 내기 축구 시합을 했는데 풀백인 내가 날쌘돌이 민수와 맞부딪혔다. 볼을 치고 나오는 민수를 나는 막아야 했고 민수는 나를 제끼고 볼을 넣어야 했다. 서로의 욕망에 충실했던 우리는 정면으로 맞부딪혔는데 어찌 된 일인지 민수가 나동그라져 있었다. 심판을 맡은 반장이 달려와서 패널킥을 줬다. 공격수와 수비수가 맞부딪힌 정상 플레이였지만 민수는 골대를 봤고 나는 민수 정강이를 노렸다는 게 반장의 설명이었다. 나는 수비를 한 게 아니라 노골적으로, 고의로 민수의 정강이를 걷어찼다는 것이었다.
시합은 우리 1조가 졌다. 하지만 민수는 반에서 키가 제일 작은 1조, 그중의 나를 혼내고 싶은 모양이었다. 풀백인 주제에 내 정강이를 걷어차서 떼굴떼굴 구르게 해? 너 맛 좀 봐라, 이런 심보로 쪽지를 보냈을 터였다. 민수는 축구만 잘하는 게 아니었다. 합기도 3단이라는 녀석은 쉬는 시간에 옆차기를 선보이며 우리의 탄성을 불러내곤 했다. 상대방의 몸을 확인하고 잽싸게 돌아차는 솜씨는 눈부시기까지 했다. 그러나 그때도 나는 볼품없었다. 몸무게도 우리 반 평균치 못 미쳤다. 나는 반편이였다. 이런 나에게 싸움을 걸어 오다니.
민수는 나와 2미터쯤의 거리를 두고 스텝을 밟았다. 이러다 녀석은 벼락같이 앞발을 높이 들어서 내 어깨를 찍어버릴 터였다. 그러나 이것은 민수의 생각일 뿐이었다. 요리조리 몸을 피하다가 민수의 허리를 잡고 어중간하게 서서 시간을 보낸 것이다. 상대의 허리를 잡고 버티는 힘을 씨름판에서는 ‘안기는 힘’이라고 했는데 허리를 잡힌 민수는 힘을 쓰지 못했다. 아니 힘을 안 썼다. 누가 봐도 고목에 검정 고무신이 걸려 있는 형국일 터이니 팔꿈치로 내 어깨며 등을 찍을 수 있었고 내 불알에 니킥을 날릴 수도 있었다. 하지만 민수는 그러지 않았다. 싸움과 폭력의 차이를 알고 있던 것이다. 그렇다, 우리는 폭력과 싸움을 명확히 구분했다. 급우와 2. 3분 투닥거릴 수는 있어도 일방적으로, 지속적으로 급우를 구타하지 않았고 야비한 말로 마음에 상처를 주지도 않았다. 그것이 급우 또는 친구에 대한 예의이기 때문이었다. 10여 분이 지났을까. 우리의 싸움판은 이렇게 싱겁게 끝났다.
“야, 요즘 나 괴롭다.”
민수는 말을 꺼냈다. 한 달 전쯤에 미술실이 있는 건물 뒤에서 네 놈에게 집단구타를 당했다는 것이다. 미술 시간만 되면 괴롭고 매점에서 그놈들을 만나면 기가 팍 죽는다고 했다. 놈들은 7반이라고 했다. 녀석은 이놈들을 어떻게 처리할까, 고민하는 것 같았다. 민수는 학교를 그만두었다. 여름방학이 있던 날 아침 담임선생님께 들었다. 어젯밤 미술실이 있는 건물 뒤에서 3학년 7반 네 명이 집단구타를 당했는데 그중 1명이 과다출혈로 혼수상태라는 것을.
요즘 학교폭력이란 말이 사람들 입에 오르내린다. 드라마 「더 글로리」와 이 드라마 PD의 전력, 검사 출신 정모 씨의 사태는 학교폭력 문제가 이미 심각한 사회 문제임을 드러낸다. 특히 드라마가 아니라 실제인 정모 씨 아들의 작태(作態)에 아연실색할 수밖에 없었다. 현재 서울대에 재학 중인 가해자가 2018년 동급생들에게 지속적으로 폭언과 욕설을 해댄 것으로도 모자라서 한 급우에게 “제주도에서 온 돼지 새끼”, “좌파 빨갱이”, “더러우니까 꺼져라” 등의 폭언을 지속적으로 해대자 피해자 학생이 자살 시도했다는 기사를 읽었을 때 나는 내 세월이 모욕당한 느낌을 받았다. 순간 내 뇌리에 “씨를 말리고 싶다.”라는 말이 스쳤다.
잘못을 인정하고 용서를 빌기는커녕 되레 뻔뻔한 부자(父子), 이들보다도 더 악의적이었을 또 다른 가해자들을 우리는 언제까지 바라보고만 있을 것인가. 가해자도 법으로 보호받을 권리가 있는 국민이므로 “씨를 말리고 싶다.”라는 말을 철회하고 싶지만 이게 쉽지 않다. 그러나 나는 백번 천번 폭력이 더 큰 폭력을 부르는 일을 원하지 않으며 2차 가해에 해당하는 “맞을 짓을 했으니까 때렸겠지”라는 말이 지워지기를 바란다.
또한 폐인이 되었다는 내 친구가 윤민수 한 명으로 그치길, 도종환 의원이 2023년 3월 9일 국회에서 진행된 교육위원회 현안 질의 때 “아 그래서 결국 가해자가 이기는구나.”라고 피해자 학생의 말을 대신하는 일이 더 생기지 않기를 바란다. 법이 기득권 세력의 충실한 개가 아님을 증명하도록 우리가 나설 때다. 지연된 정의는 정의가 아니라고 하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