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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4 | 기획 [도시의 유산]
김제의 지평선, 땅과 하늘의 경계, 그곳에서 풍요를 일구다 ①
벼농사만을 위한 천팔백보의 둑
성륜지 기자(2023-04-10 13:58:18)

땅과 하늘의 경계, 

그곳에서 풍요를 일구다






국토의 70%가 산악지대인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지평선을 볼 수 있는 곳. 김제는 드넓은 평야와 비옥한 토양을 가진 한반도 최대 곡창지대다. 그래서일까. 김제의 어원 역시 쌀과 관련이 있다. 삼한시대에는 김제를 ‘벽비리국’이라 불렀다. ‘벼의 고을’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삼국시대에 이르러 ‘벽비리국’은 ‘벽골군’으로 바뀌었으며, 그 후 신라 경덕왕 16년에 행정지명을 모두 한자로 바꾸며 지금의 이름이 되었다.


옛부터 김제는 부자를 상징하는 천석꾼이나 만석꾼이 많았다. 유일하게 지평선을 볼 수 있을 정도로 너른 평야와 곡식 천석 만석을 거둘 정도로 부자를 가진 땅답게 김제는 오늘날에도 전국 쌀 생산량의 40분의 1을 생산 한다. <농작물생산조사>에 따르면 2022년 김제의 재배면적 당 쌀 생산량은 581kg, 전국 1위다. 


비옥한 땅과 쌀 생산지로 이름을 알려온 김제는 양옆에 만경강과 동진강이 흐른다. 김제가 쌀 생산지로서 더없이 좋은 조건을 갖게 된 것도, 자랑스러운 유산이 된 <벽골제>가 만들어진 것도 이러한 지형 덕분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저수 시설인 <벽골제>는 농경문화의 상징적 땅이었던 김제를 상징하는 유산이다. 매년 가을에 열리는 <지평선 축제>도 <벽골제>가 있어 더욱 특화된 지역의 대표 축제로 자리잡을 수 있었다. 


이번 호에서는 최초의 저수시설인 ‘벽골제’와 지역을 대표하는 전통 축제인 ‘지평선 축제’, 그리고 김제를 배경으로 쓰여진 문학작품을 들여다보았다.




벼농사만을 위한 천팔백보의 둑





벽골제는 약 3km에 이르는 우리나라 최초의 고대 저수지다. 농경사회에서 치수(治水)는 식량 생산에 절대적 요소로 생존과 국가 존속에 직결되는 문제였다. 특히 우리나라는 여름철에 강수량이 집중되어 수리시설 없이는 농사짓기가 어려웠다. 벽골제는 아주 오래전부터 김제에 농경문화가 꽃 피웠다는 것을 말해준다.



벽골제는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벽골제에 대한 기록은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남아있다. 

‘처음 벽골지를 여니 제방의 길이가 일천팔백보다’  (흘해왕 21년, 서기 330년)


이 시기는 김제가 백제의 영토였던 때다. 때문에 기록은 신라의 삼국통일 이후 이루어졌지만 축조는 백제 11대 비류왕 27년으로 추정하고 있다. 무려 1,700여 년 전, 인구도 장비도 오늘날처럼 여의찮았던 때에 3.3km의 거대한 저수지를 세웠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거니와 그만큼 농경사회에서 저수지의 역할이 절실했다는 것을 짐작하게 한다.


벽골제에는 수여거, 장생거, 중심거, 경장거, 유통거 5개의 수문이 있었다. 이 수문은 물이 필요할 때 내부의 물을 흘려보내는 인공수로로 이어졌다. 김제를 중심으로 만경현에서 부안현, 고부ㆍ인의현 경계에 이르기까지 관개면적 약 9,500만m²에 달했으니 벽골제의 위상이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벽골제는 큰 하천과 많은 수문으로 인해 비가 많이 올 때면 물이 넘칠 위험이 있었다. 통일신라 원성왕 때 장마철에 둑이 무너져 수리하였고 이때 단야전설이 만들어졌다. 고려와 조선 때에도 수리를 하였다는 기록이 있지만 세종 2년에 폭우로 유실되고 말았다. 세종실록 지리지 김제군 기록을 보면 “옛 큰 방죽은 벽골제이다. 신라 흘해왕 21년에 비로소 둑을 쌓았는데, 길이가 1천 8백 보이다. 본조 태종 15년에 다시 쌓았으나, 이익은 적고 폐단은 많았으므로 곧 허물어뜨렸다”고 남아있다. 


벽골제는 조선시대에도 당진합덕제, 황해도 연안남대지와 함께 조선 3대 저수지로 이름을 날렸다. 하지만 일제강점기에 동진수리조합이 설립되고 벽골제를 운암제 설치를 위한 간선수로로 개조하면서 그 원형이 크게 훼손되었다. 제방을 절단하고 양분된 중앙을 수로로 만들어 농업용수를 흐르게 한 것이다. 그러다 해방 이후, 1963년에 고대 농업사와 토목건축적 의의를 인정받아 국가사적으로 지정되었다. 1975년 복원을 시작한 뒤에는 네 개의 수문이 발견되기도 했다.





오늘날 벽골제는 수원의 역할을 넘어서 김제의 농경문화가 살아 숨 쉬는 역사의 현장이자 문화공간으로 거듭났다. 단지내에 농경문화를 테마로 한 벽골제농경문화박물관, 농경사주제관및체험관, 김제우도농악관, 전통가옥체험마을, 명인학당, 벽골제 쌍룡, 아리랑문학관 등을 조성하였고, 전통문화를 즐길 수 있는 체험을 운영하고 있다. 명인학당에서는 전통혼례를 체험할 수 있으며, 공예체험, 쌀체험, 짚풀공예 등 상설체험 프로그램도 마련됐다. 농경사주제관및체험관 3층에는 전망대가 있어 하늘과 맞닿은 지평선과 벽골제 쌍룡을 한눈에 담을 수 있다. 




쌍룡놀이와 단야낭자에 얽힌 이야기 





통일 신라 원성왕 때 장마철 둑이 무너지는 일이 있었다. 이때 둑을 수리하면서 생긴 전설이나 지명이 그대로 남아 전해진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이 쌍룡놀이와 단야낭자에 관한 설화다.


당시 최고의 토목 기술자였던 원덕랑은 벽골제의 보수 공사를 위해 김제에 파견되었고 김제 태수의 외동 딸인 단야낭자와 사랑에 빠졌다. 그러나 원덕랑에게는 이미 약혼한 월래가 있었고 그는 일에만 집중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공사가 끝날 무렵 갑자기 천둥번개가 치고 큰 비가 내려 보수가 중단된다. 세간에서는 벽골제 근처에 청룡과 백룡이 사는데, 심술궂은 청룡이 득세하여 제방을 무너트리려 한다는 소문이 돌았다. 청룡의 기분을 풀어주기 위해서는 처녀를 제물로 바쳐야 했다. 이때 단야의 짝사랑을 알던 김제 태수는 월래가 김제로 내려운 틈을 타 월래를 재물로 바치고 단야가 원덕랑과 결혼하게 만들겠다는 음모를 꾸몄다. 이를 눈치 챈 단야는 청룡에게 자신을 재물로 바쳐 모두를 구원한다.


설화는 단야의 죽음으로 끝나지만 쌍룡놀이는 단야가 살아나 마을 잔치를 벌이며 마무리되는데, 화해와 통합을 지향하는 선조들의 정신이 반영된 것이다. 이 설화와 관련이 있는 단야루와 단야각은 현재 벽골제 단지 내에 조성되어 단야낭자의 효심과 희생정신을 기리고 있다.

 





한 해의 풍년을 기원하는 전통 축제

─지평선축제


매년 9월에서 10월 사이, 벼가 익어 고개를 숙이면 노란 황금 들판이 지평선을 물들이고 활짝 핀 코스모스 길은 관광객들의 발을 이끈다. 벽골제를 중심으로 열리는 김제지평선축제는 1999년, 김제를 널리 알리고 지평선 쌀을 홍보하기 위해 시작한 지역특성화 축제다. 한 해의 풍년을 기원하는 벽골제 쌍룡놀이, 풍년 기원 입석 줄다리기, 아궁이 쌀밥 짓기, 연날리기 등을 통해 전통 농경문화를 계승하고, 시골 먹거리 장터 등 지역주민의 소득을 증대시키고 쌀의 소비량을 늘리는 프로그램으로 구성했다.


지난 축제에서는 지평선 쌀을 알리고자 330m 길이의 대형 가래떡을 만드는 ‘가래떡 퍼포먼스’를 선보였으며 ‘플로깅’으로 축제 참여를 통해 환경을 보호하는 친환경 프로그램을 선보였다. 특히 코로나19 이후 3년 만의 대면 축제로 30만 명이 찾아오는 지역대표 축제로 자리매김하였다. 코로나19로 지역 축제가 중단되었을 때에도 지평선축제는 비대면 온라인 축제로 그 맥을 이어왔다. ‘라이스 키트’를 판매하거나 응모를 통해 체험꾸러미를 제공하여, 랜선으로 들려주는 김제이야기, 온라인 쿠킹클래스 등을 통해 지평선 특산물을 홍보했다. 현장감이 떨어지는 아쉬움은 남았지만, 집에서도 체험할 수 있어 많은 관심을 받았다.


김제 지평선 축제는 지역 주민들이 주도하고 세계인이 함께하는 글로벌 축제로 만들기 위해 세계인 쌀 솜씨 자랑, 글로벌 문화체험 등 매년 다양한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있다. 그 노력의 결실로 2018년부터 2019년까지 문화체육관광부 지정 글로벌육성축제로 2020년부터는 2년째 대한민국 명예대표 문화관광축제로 선정되었다. 올해로 25회째를 맞는 김제지평선축제는 10월 5일부터 10월 9일까지 5일간 진행된다. 2018년에 이어 6년 연속 대한민국 공군 특수비행팀 블랙이글스의 에어쇼 공연도 열린다.






글 성륜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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