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요로워서 서러운 땅,
문학으로 되살아나다
고대부터 한반도의 70퍼센트를 먹여살렸다는 김제의 평야는 이곳에서 생산되는 낟알만큼이나 많은 이야기들을 담고 있다. 어떤 이는 환상적인 금빛 물결을 바라보며 감상에 젖어 아름다움을 노래했지만, 다른 이는 금빛 물결을 만들어내기 위해 허리가 굽어갔다. 만경 평야를 얼싸안고 흐르는 강물을 따라서 흐르는 이야기들에 귀기울여 보자. 김제 땅에 숨겨져 있던 아름다운 추억과 쓰라린 고통이 동시에 들려온다.
조정래 소설 ‘아리랑’
“그들 세 사람은 걸어도 걸어도 끝도 한정도 없이 펼쳐져 있는 들판을 걷기에 지쳐 있었다. 그 끝이 하늘과 맞닿아 있는 넓디나 넓은 들녘은 어느 누구나 기를 쓰고 걸어도 언제나 제자리에서 헛걸음질을 하고 있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지게 만들었다. 그 벌판은 <징게 맹갱 외에맛들>이라 불리는 김제·만경 평야로 곧 호남평야의 일부였다. 호남평야 안에서도 김제·만경 벌은 특히나 막히는 것 없이 탁 트여서 한반도 땅에서는 유일하게 지평선을 이루어내고 있는 곳이었다.”
(아리랑 1권 中)
한반도의 가장 큰 곡창지대로서 천석꾼, 만석꾼도 많았다던 김제는 식민지 경제 속에서 가장 빈곤한 도시가 되어 버린다. 1930년 조선총독부 자료에 의하면 전체 농가 중 2/3가 봄에 양식이 떨어지고, 1/2이 이에 땅을 빼앗긴 사람들은 먹고 살기 위하여 막일을 할 정도였다고. 이 비극적 역사의 뒤에는 ‘군산항의 개항’과 ‘토지조사사업’이 있었다.
김제의 수난사는 군산이 개항하며 시작된다. 1899년 일제는 호남의 쌀을 효과적으로 수탈하기 위해서 군산의 개항을 감행하고, 그곳에 다양한 기관과 회사를 설립했다. 이에 그치지 않고 철도부설권을 확보하여 1914년 충남, 전북, 전남의 3도를 아우르는 호남선의 공사를 마친다. 군산이 하나 둘 근대 도시의 모습을 갖추자 일제는 호남 곳곳의 땅을 사들이며 본격적인 쌀을 수탈하기 시작한다. 이때 가장 큰 규모의 토지매입이 이루어진 곳이 바로 김제의 만경평야. 벼를 도정하여 군산항을 통해 오사카로 실어 나르면 돈과 시간을 아낄 수 있다는 이유였다. 한반도의 젖줄과 다름없던 만경평야가 일본인의 쌀 창고가 되어버린 것이었다.
토지조사사업은 1910년부터 1918년까지 조선총독부가 주도한 사업. 조선에 ‘근대적’인 토지제도와 지세제도를 마련한다는 명분이었다. 총독부는 조상으로부터 대대손손 내려오던 토지를 소유권 중심으로 정리하기 시작한다. 그 결과 땅을 가진 사람들의 권한과 총독부의 조세 수입은 더욱 늘어났으나, 평범한 농민들은 한 순간에 삶의 터전을 잃는다.
조정래의 소설 아리랑에는 김제가 식민지형 소도시로 전락되는 과정의 면면이 잘 나타나있다. 소설은 1904년 김제 만경벌판에서 시작하여 1945년 일본이 항복을 선언하기까지의 역사를 그린다. 나라를 잃고 일본, 만주, 하와이 등 만리 타향을 떠돌어야만 했던 암흑기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겪었던 민족적 상황, 일제의 수탈과 착취, 친일파들의 실상과 애국지사들의 절절한 사연이 극적으로 묘사된다.
소설 속 주인공인 감골댁 일가와 지삼출의 고향인 김제 죽산면 내촌마을에는 ‘아리랑문학마을’이 생겼다. 가장 큰 건물인 일제수탈관에서는 식민침탈의 전 과정과 김제만경평야의 수탈사 등을 둘러보며 일제가 왜 수탈의 대상으로 김제를 선택했는지 생각할 수 있는 실마리를 제공한다. 야외에는 ‘일제수탈기관’과 ‘내촌·외리마을’이 조성되었다. ‘일제수탈기관’은 수탈의 대표기관인 주재소와 면사무소, 우체국, 정미소가 한 동씩 마련되었다. 내부에 들어서면 아리랑 속 장면들을 각색한 ‘오디오 드라마’가 송출되어 생생함을 더한다. ‘내촌·외리마을’에서는 소설의 주요인물인 감골댁, 송수익, 지삼출, 손판석, 차득보의 가옥을 인물 설명과 함께 만날 수 있다. 그밖에도 일제강점기 조국에서 버티지 못해 만주로 이주한 이들이 살던 ‘이민자가옥’,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 사살했던 ‘하얼빈역’도 재현되어 있다.
아리랑문학마을을 더욱 스마트하게 즐기는 법
아리랑문학마을을 더욱 재미있고 스마트하게 즐기는 방법이 있다. 바로 어플 ‘Odii’와 ‘로스트404’를 활용하는 것이다.
‘Odii’는 한국관광공사가 직접 개발한 오디오가이드 어플리케이션이다. GPS와 지도를 활용하여 주변 관광지 곳곳에 숨어있는 이야기들을 추천해 준다. 오디오 도슨트 뿐만 아니라 사진등의 다양한 콘텐츠도 함께 제공되어 여행을 계획할 때에도 도움을 준다. 아리랑문학마을의 경우 한국관광공사의 전북지부에서 만든 대본을 기반으로 한 12가지의 이야기가 수록되었다. ‘로스트404’는 도심을 돌아다니며 단서를 수집하고 이야기를 추리해나가는 야외방탈출 게임이다. 특히 아리랑문학마을을 배경으로 하는 에피소드인 ‘아리랑 고개로’에서는 소설 아리랑을 모티프로 김제에서 일어난 만세운동을 다룬다. 플레이어는 마을 내에 조성된 우체국, 주재소, 면사무소, 당산나무, 손판석집, 차득보집을 직접 돌아다니며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AR기술이 도입되어 스마트폰의 렌즈를 통해 역사의 현장을 더욱 생생하게 체험할 수 있다.
임영춘 소설 ‘갯들’
“이 공사는 1924년에 기공하여 25년 봄, 날씨가 풀리자 이곳 간척지 방조제를 쌓기 위해 전국 각처에서 일꾼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가도 가도 안 나오니 하늘 끝인가 배.」 타관 사람들의 낯선 첫 걸음은 멀기도 한 것이었다. 과연 해가 지는 서쪽 끝까지 가야 갯벌이 나온다. 이 갯벌도 간척지가 된 뒤에는 역시 김만경 들의 일단이다.”
오늘날 ‘새만금’은 군산의 ‘새만금 방조제’를 일컫는 말이다. 그러나 넓은 의미로 보면 군산, 김제, 부안 지역까지를 아우를 수 있는 용어이다. ‘새만금’이라는 명칭 자체가 김제·만경 방조제를 더 크게 확장한다는 뜻에서 ‘금만(金萬)’을 ‘만금’으로 바꾸고 관형사 ‘새’를 붙여 만들어진 말이다. 그렇다면, 새만금은 언제 어디에서 처음으로 시작되었을까?
그 역사는 일제강점기의 ‘동진수리협동조합’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수리조합은 농사를 짓기 위해 필요한 물을 관리하기 위해 저수지나 제방을 관리하고 수해를 예방 사업을 하던 조직이다. 그러나 일제는 근대식 농사법을 개선한다는 명분을 내세우며 갈수록 악화되는 일본의 식량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다. 이 시기 설립된 동진수리조합도 마찬가지였다. 조합은 당시 우리나라 최대의 수리조합으로, 김제 광활면 일대에서 대대적인 간척 사업을 실시했다. 조합은 훗날 한국농어촌공사의 큰 뿌리가 되어 한국농어촌공사 동진지사로 남게 되었다.
조합은 본격적으로 간척지를 조성하기 이전 섬진강의 운암제를 먼저 조성했다. 동진강의 물이 농업용수로 사용하기에는 부족했기 때문이다. 이후 1929년부터 1935년까지 농토가 조성되는 대로 이민 심사를 거쳐 합격한 사람들이 이주했다. 대흉년과 토지 수탈로 인해 전국적으로 백만명 이상의 기아가 발생한 시기였기에, 사람들은 이주만 하면 살 곳과 쌀을 제공한다는 조합의 꾐에 넘어갈 수밖에 없었다. 철저한 감시 아래 이주민 700세대는 꼼짝없이 착취당했다.
임영춘의 소설 ‘갯들’은 1920년대 후반부터 해방되던 초등학교 5학년 때까지 부모가 간척지로 이주해서 살았던 이야기를 담은 자전적 소설이다. ‘동진농장’의 자리에서 나고 자란 작가는 어린 시절부터 성인에 이르기까지 간척지에 대해 직접 보고, 듣고, 경험한 기억을 되살려내고 여러 해 동안 관련 자료를 수집하여 지역의 슬픈 역사를 소설로 승화할 수 있었다고.
윤흥길 소설 ‘완장’
“어느 시기나 다 마찬가지로 돈을 벌어 보려고 몸부림치는 그의 노력 앞에는 언제나 완장들이 도사리고 있었던 셈이다. 완장 앞에서는 선천적으로 약한 체질이었다. 완장 때문에 녹아나는 건 늘 제 쪽이었다. 제각각 색깔 다르고 글씨도 다른 그 숱한 완장들에 그간 얼마나 많은 한을 품어 왔던가.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 완장들을 얼마나 또 많이 선망해 왔던가.” (완장 中)
리얼리즘 기법을 통해 시대의 모순을 드러내는 작가 윤흥길. 그의 작품은 절도있는 문체로 왜곡된 역사현실과 삶의 부조리, 그리고 그것을 극복하려는 인간의 노력을 묘사하여 대중들로부터 큰 사랑을 받고 있다. 그 중에서도 소설 ‘완장’은 중고등학생들의 문학 교과서에도 수록되며 작품성을 인정받았다.
소설에서 작가는 권력의 폭력과 허황됨을 폭로한다. 소설은 땅 투기로 성공한 최 사장이 저수지 사용권을 얻어 양어장을 만들고 그것을 동네 한량인 임종술에게 맡기며 시작한다. 저수지 감시원 완장을 차게 된 종술은 저수지에서 낚시를 하는 사람들에게 기합을 주거나 폭행하며 권력의 맛에 빠져들게 된다.
이때 등장하는 저수지는 김제 백산면에 있는 백산저수지를 모티프로 한다. 백산저수지는 흐르는 물이 저장되는 다른 곳들과는 달리 섬진강댐에서 방류된 물을 호남양수장의 펌프를 이용해 퍼 올리는 양수 저수지다. 이곳은 아름다운 서해의 낙조와 자연농원지구, 그리고 금만경평야를 한눈에 바라볼 수 있는 공간이기도 하다. 백산 저수지의 근처에 있는 두악산에는 전망대가 설치되어 아름다운 경관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다.
윤흥길 소설 ‘장마’와 정양 시 ‘내 살던 뒤안에’
김제의 사투리를 맛깔나게 살린 시집이 나왔다. 원로 시인인 정양 교수의 ‘암시랑토앙케’가 그것. 시집은 시인의 고향 마을인 ‘김제 공덕면 마현리’의 이야기를 소재로 한 ‘들마을 민화’와 잊혀져 가는 순간과 사람의 모습을 포착한 ‘질 게 뻔해도’로 구성되었다. 책의 한장 한 장에는 마을 사람들의 자연과 더불어 사는 순박한 삶이 담겼다. 정양 시인은 윤흥길 소설가와 막역한 친구사이이다. 지난 2월에는 정 교수의 출판기념회에서 대담을 펼치기도 했다. 둘은 ‘정 교수의 아버지가 좌·우익간의 사상싸움으로 끝내 실종되었는데, 점쟁이가 살아서 돌아올 것이라고 예언한 날 시골 집에 커다란 구렁이가 들어왔다’는 이야기를 소재로 각자의 시와 소설에 녹여내었다. 그렇게 탄생한 작품이 시 ‘내 살던 뒤안에’와 소설 ‘장마’이다.
양귀자 소설 ‘숨은 꽃’
“확실히 그곳은 멀리서 일부러 들른 사람들에게 구경시켜줄 만한 아무것도 지니지 못한 절임에는 분명했다. 본당의 문을 열어 빛이 사그라들기 시작한 금동불상을 보기 전에는 여느 어염집으로 여기고 지나치기 십상인 외양이어서 그때도 그 흔한 관광객 한 사람 보이지 않았다. / 그러나 눈으로 보지 않고 마음으로 보면 상당히 많은 말을 하고 있는 절이 귀신사였다. 드러나는 아무것도 없으면서 모든 것을 다 가지고 있는 낡고 허름한 귀신사의 풍경은 여행 중의 온갖 화사한 기억을 다 물리치고 가장 오래도록 내 마음에 머물러 있었다.”
김제 금산면 청도마을에는 금산사의 말사인 귀신사가 있다. 전주에서 김제로 향하는 길에서 ‘해탈교’라는 이름의 짧은 다리 하나만 건너면 바로 위치해 있어 주차장에 꽂힌 작은 팻말이 없다면 소박한 옛집으로 착각하기 쉽다. 이곳은 통일신라시대에 의상대사가 창건했으며, 7개 이상의 암자가 있었다고 전해진다. 현재는 대적광전, 영산전, 명부전, 요사채 등 소담한 건물 몇채와 꼭대기가 망가진 작은 탑만 남아있는 이곳은 양귀자의 소설 ‘숨은 꽃’의 배경이 됐다.
소설은 소설가인 주인공이 쓰다가 멈춘 단편소설을 다시 쓰기로 마음 먹고 귀신사를 찾으며 시작한다. 그곳에서 그는 섬마을에서 교사로 일하던 시절 만났던 ‘김종구’를 만나게 되고 그에 대한 네 가지 일화를 떠올리며 인간성에 대해 다시 생각한다. 이튿날 주인공이 눈에 잘 띄지 않지만 인간다운 아름다움을 간직하는 사람들에 대한 소설을 쓰기로 결심하며 글은 마무리 된다. 소설은 1992년 제16회 이상문학상을 수상했다.
다만 소설에는 작은 오해가 있다. 소설 속에서 작가는 ‘귀신사’라는 오싹한 이름을 ‘영원을 돌아다니다 지친 신이 쉬러 돌아오는 자리’라고 풀이한다. 그러나 처음 세워질 당시 이곳의 이름은 ‘국신사’였다. 이후 통일신라 말기 도윤이 ‘귀신사’로 개칭하였다. 이후 고려 대에 들어서는 ‘구순사’가 되었으며, 1990년도에 들어서야 다시 ‘귀신사’가 되었다. 또한 소설에는 귀신사 본당의 문을 열면 빛이 사그라들기 시작한 금동불상이 있다고 적혀 있지만 귀신사의 대적광전에 모셔져 있는 삼불상은 금동이 아니라 점토로 만들어졌다.
글 신동하 기자